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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합법적 매춘부라는 정치인들의 집합소, 아베 내각
[기획-‘위안부’ ⑤] 20년 역사전쟁 끝에 교과서에서 ‘군국주의’ 재생…위안부 최종 합의 강조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6월 18일 일요일
2012년 11월4일 미국 뉴저지주의 신문 <스타레저>엔 “그래 우리는 사실을 기억한다”라는 제목의 대형광고가 실렸다. 여기엔 일본군이 끌고간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그들은 당시 세계 어디에나 흔히 존재했던 합법적인 매춘부였다”며 “그들은 사실 장교나 심지어 장군들보다도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렸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증거가 많다”는 주장이 실렸다. 또한 위안부가 20세기에 이뤄진 최대의 인신매매 범죄로서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로 유인했다는 것은 일본 군대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자 모욕이라고 했다.
이 광고는 ‘역사사실위원회(the Committee for Historical Facts)’라는 일본 우익단체와 아베 신조를 비롯한 장관 5명, 그리고 37명의 국회의원이 함께 낸 것이었다.
수많은 위안부 희생자와 생존 피해자들을 직업 매춘부로 호도한 이 광고는,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정부, 국제 NGO들의 분노를 샀다. 그렇지만 일본 국내에서 아베와 자민당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고 한달여 뒤 아베 총재의 자민당은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 아베 신조가 참여했던 스타레저 위안부 왜곡 광고. 사진출처=KACE 시민참여센터
2012년 12월16일 치러진 총선거로 발족한 제2차 아베 내각은, 역사 개작(改作)을 위한 내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아베 내각의 19명의 장관 중에서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 ‘교과서 의련’ 등 역사교과서 ‘개작’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인 모임에 가담한 인물은 12명. ‘역사’나 ‘교과서’의 이름을 달지 않고도 교과서 문제에 개입해온 ‘신도 의련’ ‘야스쿠니 의련’ ‘신헌법제정의원동맹’ ‘창생 일본(전후 질서 탈각과 개헌을 목표로 하는 의원연맹)’, ‘친학추진의원연맹’ 등 극우적 성향의 단체에 가입한 이들은 19명 전원이다.
아베 신조의 부상은 일본의 우익세력 내에서도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몰락하고 평화헌법과 전후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개악되는 과정과도 정확하게 맞물린다.
아베 신조의 부상과 위안부 문제의 왜곡
비록 형식적이고 불충분하나마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기술이 들어가게 된 것은 1993년 고노 담화 이후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첫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90년 6월에 나왔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한국 여성단체들의 문제제기를 받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질의하자,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과는 관계가 없는 민간업자의 활동이었고, 조사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공식적인 첫 증언이 나온 것은 ‘일본군과 관계가 없는 민간업자의 활동’이었다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답변 때문이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최초의 증언을 내고 이후 여러 피해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듬해엔 일본의 역사학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일본은 더이상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요시미 교수가 공개한 공문서는 1938년 육군성 차관이 위안부 모집을 위한 민간업자 선정과 지역의 헌병 또는 경찰과의 연계 등을 지시한 내용의 ‘부관으로부터 북지나 방면과 중지나 파견 군 참모장 앞으로 보내는 통첩안’ 등 6건이었다.
그리고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1993년에 나온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내각관방장관 담화’ 즉, 고노 담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장기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지만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한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고,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속에서 참혹한 것이었다.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직시해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
▲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사진출처='Fight for Justice'
고노 담화는 그 내용을 추상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위안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군의 관여’라는 불명확한 표현으로 책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희석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를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명시한 부분은 일본의 책임 문제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발표가 나오면서 역사교과서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다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1994년, 1995년 판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와 함께, 현대사회, 지리, 정치경제, 윤리 등 몇 종이 위안부 문제를 싣게 됐다. 일본사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교과서 전 종에서 위안부 문제를 기술했다.
이들 교과서의 내용은 고노 담화 이후의 역사 연구는 물론이고, 고노 담화의 내용을 수록하는데 조차 인색할 정도지만 강제연행 여부는 점차적으로 반영이 되는 추세였다.
1. 동경서적 1995년, 일본사A
“또, 방대한 수에 달하는 여성이 정신대로 모집되어지고,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의 점령지의 여성이 전지의 업무라는 구실로 종군위안부에 동원되었다”
<주> “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엄청난 수에 달하고 있다. 또 종군 위안부는, 중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각지로부터도 동원되었다”
2. 일본서적 1994년, 최신고교일본사B
“조선 및 대만·필리핀에서는, 다수의 젊은 여성들을 모집하여, 일본의 위안부로서 중국 전선 등의 지역으로 보내주었다”
<주> “1991년 12월, 전 종군위안부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실태 조사와 사죄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정부도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서는 과거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3. 삼성사 1995년, 신일본사B
“또, 다수의 조선인 여성을 납치하여 종군위안부로 삼아, 전선에 배치했다”
<주> 종군위안부에는, 조선인, 일본인 이외에, 네덜란드인, 필리핀인 등의 여성도 있었던 것이 밝혀져오고 있다“ (‘논쟁에 휩싸인 일본의 역사교육-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교과서 서을 중심으로’. 정재정.)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위안부 문제가 기술됨으로써 1997년부터는 중학교 역사교과서 전체 7종에도 위안부 문제가 기술됐다.
제3차 교과서 공격, 그 주역이었던 아베 신조
일본 내에서 이른바 ‘제3차 교과서 공격’이 시작된 것은 1996년부터로, 위안부 문제가 교과서에 포함된 것이 그 계기였다.
정계에선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1993년 8월~1995년 2월)의 맥을 이어 1996년 6월 발족한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 그리고 1997년 2월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 나섰다. 이 두 단체엔 아베 신조가 사무국 차장과 사무국장으로 각각 참여했다.
학계에선 후지오카 노부카쓰 도쿄대 교수를 중심으로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중심이 되었는데,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이들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과 관련해 “무시무시함으로 가득 찬 암흑사관, 자학사관, 반일사관의 대행진. 검정을 통과한 7개 출판사의 교과서는 일본인을 위해 쓰인 교과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일본의 번영을 증오하는 여러 외국의 이른바 ‘간접침략’이 국민 공유지식의 골격을 이루는 역사 교과서라는 영역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는 주장을 폈다.
이 3차 교과서 공격은 일본군 위안부가 합법적이고 자발적인 매춘부였다거나, 난징대학살이 실재하지 않은 허구라고 주장 등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정착된 과거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려는 특징을 띄고 있다.(‘일본 보수세력의 교육개혁과 교과서 공격-제3차 교과서 공격을 중심으로’ 서종진)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군 사이에서 위안부를 ‘공동변소’라고 부른 사실에 빗대어 “화장실 구조의 역사를 교과서에 쓸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고, 같은 단체의 지지자 오카자키 히사히코(전 주한 대사)는 위안부 문제를 “에로틱한 성상 등이 있는 사원에서 전시하는 그림과 같은 것”이라며 “그런 종류의 그림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교과서 문제와 우익의 동향’. 다와라 요시후미)
위안부 문제 기술 등 역사 교과서에 일본의 침략행위와 조직적인 범죄가 포함되는 것을 막기위해 결성된 ‘새역모’는 아베 신조 내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실제로 새역모는 2000년 4월 후소샤(후지 산케이 그룹 출판부문)를 통해 중학교 교과서와 공민 교과서를 검정 신청함으로써 교과서 출판에 참여하게 된다.
▲ 새역모의 중학교용 역사, 공민 검정 교과서 발간을 지원하기 위해 발족한 것이 바로 아베 신조가 사무국장으로 참여한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었다. 사진은 KBS 뉴스화면 캡쳐.
위안부는 삭제, 위안부 합의는 적극 반영
일본 우익의 발호와 교과서공격 하에서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선 대체로 2005년까지 위안부 기술이 사라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과서를 발간하는 출판사엔 총리관저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오는 등의 압박이 있었고 위안부 기술을 없애기 위해 교과서 채택제도도 개악됐다.
고등학교 교과서 역시도 2005년~2007년을 전후해 위안부 관련 기술이 사라지거나, 유지하더라도 강제성 부분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악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되었다”라는 내용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되었다”로 바뀌거나 “조선인 여성을 중심으로 각종 구실을 붙여서 권유하거나, 강제연행해서 종군 위안부로 삼았다”는 내용이 “조선인을 중심으로 많은 여성이 위안부로서 전지에 보내졌다”등으로 책임주체의 문제, 강제연행에 대한 서술이 약화된 것이다.
2017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검정 신청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 13종 가운데 9종(69%)에만 위안부 기술이 포함됐다.
가장 정확한 역사 서술로 평가받아왔던 실교출판사의 경우에도 “강제 연행”이 사라지고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지에 반해서 모집됐던 사례가 다수 있다”고 후퇴했다. 다른 출판사들도 “위안부로서 전지의 위안시설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인 여성중에는 종군위안부가 되는 것을 강요당한 사람도 있었다” 등등 20년 전과 비교해서도 그 서술이 매우 후퇴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베 내각은 2013년 총리 직속으로 ‘교육재생실행회의’를 설치, 국가가 교과서에 내용 전반에 개입하고 규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고, 일본의 침략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술을 수정하지 못하도록 해놓은 ‘근린제국조항’은 사문화됐다.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기술하도록 강제했고, 위안부 기술은 삭제하거나 최소화하되 2015년 박근혜-아베 정부 외무장관의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한국 정부는)소녀상 문제의 적절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과 함께 적극 반영하도록 했다.
주요 참고자료
다와라 요시후미. 2014. ‘일본교과서 문제와 우익의 동향’.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후마니타스
정재정. 1998. ‘논쟁에 휩싸인 일본의 역사교육-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교과서 서술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일본학 17
남상구. 2008. ‘일본 역사교과서의 일본군 위안부 서술 변화’. 한일관계사연구 제30집
이아현. 2002. ‘역사교과서를 통해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한일 중등학교 역사교과서 서술을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호
타와라 요시후미. 2000. ‘역사를 개작하는 우파세력의 최근 동향-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5집
서종진. 2016. ‘일본 보수세력의 교육개혁과 교과서 공격-제3차 교과서 공격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제53호
연재순서
④-2 김혜원 선생이 말하는 정대협 1세대 활동가들
④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고립시킨 2개의 보고서
③-2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화나지만 화난 표정이 아닌
③“부러진 뼈는 신경쓰지 않고 성병검진만 했다”
②-2 “혼자 울 때 불어온 바람이, 위안부의 원혼으로 느껴졌다”
②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①-2“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①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위안부는 합법적 매춘부라는 정치인들의 집합소, 아베 내각
[기획-‘위안부’ ⑤] 20년 역사전쟁 끝에 교과서에서 ‘군국주의’ 재생…위안부 최종 합의 강조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6월 18일 일요일
2012년 11월4일 미국 뉴저지주의 신문 <스타레저>엔 “그래 우리는 사실을 기억한다”라는 제목의 대형광고가 실렸다. 여기엔 일본군이 끌고간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그들은 당시 세계 어디에나 흔히 존재했던 합법적인 매춘부였다”며 “그들은 사실 장교나 심지어 장군들보다도 훨씬 많은 수익을 올렸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증거가 많다”는 주장이 실렸다. 또한 위안부가 20세기에 이뤄진 최대의 인신매매 범죄로서 어린 여성들을 성노예로 유인했다는 것은 일본 군대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자 모욕이라고 했다.
이 광고는 ‘역사사실위원회(the Committee for Historical Facts)’라는 일본 우익단체와 아베 신조를 비롯한 장관 5명, 그리고 37명의 국회의원이 함께 낸 것이었다.
수많은 위안부 희생자와 생존 피해자들을 직업 매춘부로 호도한 이 광고는, 각국의 위안부 피해자들과 정부, 국제 NGO들의 분노를 샀다. 그렇지만 일본 국내에서 아베와 자민당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고 한달여 뒤 아베 총재의 자민당은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 아베 신조가 참여했던 스타레저 위안부 왜곡 광고. 사진출처=KACE 시민참여센터
2012년 12월16일 치러진 총선거로 발족한 제2차 아베 내각은, 역사 개작(改作)을 위한 내각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아베 내각의 19명의 장관 중에서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 ‘교과서 의련’ 등 역사교과서 ‘개작’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인 모임에 가담한 인물은 12명. ‘역사’나 ‘교과서’의 이름을 달지 않고도 교과서 문제에 개입해온 ‘신도 의련’ ‘야스쿠니 의련’ ‘신헌법제정의원동맹’ ‘창생 일본(전후 질서 탈각과 개헌을 목표로 하는 의원연맹)’, ‘친학추진의원연맹’ 등 극우적 성향의 단체에 가입한 이들은 19명 전원이다.
아베 신조의 부상은 일본의 우익세력 내에서도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몰락하고 평화헌법과 전후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이 부상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개악되는 과정과도 정확하게 맞물린다.
아베 신조의 부상과 위안부 문제의 왜곡
비록 형식적이고 불충분하나마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기술이 들어가게 된 것은 1993년 고노 담화 이후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첫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90년 6월에 나왔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사회당 모토오카 쇼지 의원이 한국 여성단체들의 문제제기를 받아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질의하자, 노동성 직업안정국장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과는 관계가 없는 민간업자의 활동이었고, 조사 자체도 불가능하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공식적인 첫 증언이 나온 것은 ‘일본군과 관계가 없는 민간업자의 활동’이었다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답변 때문이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최초의 증언을 내고 이후 여러 피해자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고발했다. 이듬해엔 일본의 역사학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자료를 공개함으로써 일본은 더이상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요시미 교수가 공개한 공문서는 1938년 육군성 차관이 위안부 모집을 위한 민간업자 선정과 지역의 헌병 또는 경찰과의 연계 등을 지시한 내용의 ‘부관으로부터 북지나 방면과 중지나 파견 군 참모장 앞으로 보내는 통첩안’ 등 6건이었다.
그리고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1993년에 나온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내각관방장관 담화’ 즉, 고노 담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장기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지만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한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고,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속에서 참혹한 것이었다.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수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다.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 직시해나가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다.
▲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사진출처='Fight for Justice'
고노 담화는 그 내용을 추상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위안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군의 관여’라는 불명확한 표현으로 책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희석하는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위안부 문제를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같은 잘못을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명시한 부분은 일본의 책임 문제에 있어서 매우 획기적인 진전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 발표가 나오면서 역사교과서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다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1994년, 1995년 판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와 함께, 현대사회, 지리, 정치경제, 윤리 등 몇 종이 위안부 문제를 싣게 됐다. 일본사 교과서의 경우 고등학교 교과서 전 종에서 위안부 문제를 기술했다.
이들 교과서의 내용은 고노 담화 이후의 역사 연구는 물론이고, 고노 담화의 내용을 수록하는데 조차 인색할 정도지만 강제연행 여부는 점차적으로 반영이 되는 추세였다.
1. 동경서적 1995년, 일본사A
“또, 방대한 수에 달하는 여성이 정신대로 모집되어지고,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의 점령지의 여성이 전지의 업무라는 구실로 종군위안부에 동원되었다”
<주> “수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엄청난 수에 달하고 있다. 또 종군 위안부는, 중국 필리핀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각지로부터도 동원되었다”
2. 일본서적 1994년, 최신고교일본사B
“조선 및 대만·필리핀에서는, 다수의 젊은 여성들을 모집하여, 일본의 위안부로서 중국 전선 등의 지역으로 보내주었다”
<주> “1991년 12월, 전 종군위안부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실태 조사와 사죄 및 보상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정부도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서는 과거 청산을 요구하고 있다”
3. 삼성사 1995년, 신일본사B
“또, 다수의 조선인 여성을 납치하여 종군위안부로 삼아, 전선에 배치했다”
<주> 종군위안부에는, 조선인, 일본인 이외에, 네덜란드인, 필리핀인 등의 여성도 있었던 것이 밝혀져오고 있다“ (‘논쟁에 휩싸인 일본의 역사교육-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교과서 서을 중심으로’. 정재정.)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위안부 문제가 기술됨으로써 1997년부터는 중학교 역사교과서 전체 7종에도 위안부 문제가 기술됐다.
제3차 교과서 공격, 그 주역이었던 아베 신조
일본 내에서 이른바 ‘제3차 교과서 공격’이 시작된 것은 1996년부터로, 위안부 문제가 교과서에 포함된 것이 그 계기였다.
정계에선 자민당 역사검토위원회(1993년 8월~1995년 2월)의 맥을 이어 1996년 6월 발족한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 그리고 1997년 2월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 나섰다. 이 두 단체엔 아베 신조가 사무국 차장과 사무국장으로 각각 참여했다.
학계에선 후지오카 노부카쓰 도쿄대 교수를 중심으로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인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중심이 되었는데,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이들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과 관련해 “무시무시함으로 가득 찬 암흑사관, 자학사관, 반일사관의 대행진. 검정을 통과한 7개 출판사의 교과서는 일본인을 위해 쓰인 교과서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일본의 번영을 증오하는 여러 외국의 이른바 ‘간접침략’이 국민 공유지식의 골격을 이루는 역사 교과서라는 영역에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는 주장을 폈다.
이 3차 교과서 공격은 일본군 위안부가 합법적이고 자발적인 매춘부였다거나, 난징대학살이 실재하지 않은 허구라고 주장 등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정착된 과거사를 은폐하고 정당화하려는 특징을 띄고 있다.(‘일본 보수세력의 교육개혁과 교과서 공격-제3차 교과서 공격을 중심으로’ 서종진)
후지오카 노부카쓰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군 사이에서 위안부를 ‘공동변소’라고 부른 사실에 빗대어 “화장실 구조의 역사를 교과서에 쓸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고, 같은 단체의 지지자 오카자키 히사히코(전 주한 대사)는 위안부 문제를 “에로틱한 성상 등이 있는 사원에서 전시하는 그림과 같은 것”이라며 “그런 종류의 그림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교과서 문제와 우익의 동향’. 다와라 요시후미)
위안부 문제 기술 등 역사 교과서에 일본의 침략행위와 조직적인 범죄가 포함되는 것을 막기위해 결성된 ‘새역모’는 아베 신조 내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실제로 새역모는 2000년 4월 후소샤(후지 산케이 그룹 출판부문)를 통해 중학교 교과서와 공민 교과서를 검정 신청함으로써 교과서 출판에 참여하게 된다.
▲ 새역모의 중학교용 역사, 공민 검정 교과서 발간을 지원하기 위해 발족한 것이 바로 아베 신조가 사무국장으로 참여한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모임’이었다. 사진은 KBS 뉴스화면 캡쳐.
위안부는 삭제, 위안부 합의는 적극 반영
일본 우익의 발호와 교과서공격 하에서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선 대체로 2005년까지 위안부 기술이 사라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과서를 발간하는 출판사엔 총리관저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오는 등의 압박이 있었고 위안부 기술을 없애기 위해 교과서 채택제도도 개악됐다.
고등학교 교과서 역시도 2005년~2007년을 전후해 위안부 관련 기술이 사라지거나, 유지하더라도 강제성 부분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개악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되었다”라는 내용이 “일본군의 위안부로 되었다”로 바뀌거나 “조선인 여성을 중심으로 각종 구실을 붙여서 권유하거나, 강제연행해서 종군 위안부로 삼았다”는 내용이 “조선인을 중심으로 많은 여성이 위안부로서 전지에 보내졌다”등으로 책임주체의 문제, 강제연행에 대한 서술이 약화된 것이다.
2017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검정 신청을 통과한 역사 교과서 13종 가운데 9종(69%)에만 위안부 기술이 포함됐다.
가장 정확한 역사 서술로 평가받아왔던 실교출판사의 경우에도 “강제 연행”이 사라지고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지에 반해서 모집됐던 사례가 다수 있다”고 후퇴했다. 다른 출판사들도 “위안부로서 전지의 위안시설에서 강제로 일하게 된 여성들도 있었다” “조선인 여성중에는 종군위안부가 되는 것을 강요당한 사람도 있었다” 등등 20년 전과 비교해서도 그 서술이 매우 후퇴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베 내각은 2013년 총리 직속으로 ‘교육재생실행회의’를 설치, 국가가 교과서에 내용 전반에 개입하고 규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고, 일본의 침략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술을 수정하지 못하도록 해놓은 ‘근린제국조항’은 사문화됐다. 독도는 “일본의 고유영토”로 기술하도록 강제했고, 위안부 기술은 삭제하거나 최소화하되 2015년 박근혜-아베 정부 외무장관의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한국 정부는)소녀상 문제의 적절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과 함께 적극 반영하도록 했다.
주요 참고자료
다와라 요시후미. 2014. ‘일본교과서 문제와 우익의 동향’. <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후마니타스
정재정. 1998. ‘논쟁에 휩싸인 일본의 역사교육-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교과서 서술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일본학 17
남상구. 2008. ‘일본 역사교과서의 일본군 위안부 서술 변화’. 한일관계사연구 제30집
이아현. 2002. ‘역사교과서를 통해 본 일본군 위안부 문제:한일 중등학교 역사교과서 서술을 중심으로’. 한일민족문제연구 제2호
타와라 요시후미. 2000. ‘역사를 개작하는 우파세력의 최근 동향-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5집
서종진. 2016. ‘일본 보수세력의 교육개혁과 교과서 공격-제3차 교과서 공격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제53호
연재순서
④-2 김혜원 선생이 말하는 정대협 1세대 활동가들
④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고립시킨 2개의 보고서
③-2 슬프지만 슬프지 않게, 화나지만 화난 표정이 아닌
③“부러진 뼈는 신경쓰지 않고 성병검진만 했다”
②-2 “혼자 울 때 불어온 바람이, 위안부의 원혼으로 느껴졌다”
② 위안부로 끌려간 열일곱살 박영심의 기록
①-2“사냥감은 13세, 14세의 소녀들이었다”
① 한 노(老)교수의 기획기사가 세계를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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