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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된 가토 다쓰야…박근혜, 아베 정권에 덜미 잡혔나?
[기획-‘위안부’ ⑦] 진상규명 대상이 된 ‘위안부 합의’, 산케이 사건 이후 한일관계 급변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7월 01일 토요일
1970년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참회한 사진은 유명하다. 빌리브란트 총리는 2차 대전 후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의 첫 현직수상이었다. 비가 오는 가운데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서독 총리에 대해 유럽 언론은 “한 사람이 무릎 꿇음으로써 독일 전체가 일어섰다”고 찬사를 던졌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함께 나온 아베 신조의 유감 표명을 두고 사람들은 빌리브란트의 사죄를 떠올렸다.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브란트와 달리 일본의 아베 수상은 유감 표명 직후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 한일 외무부장관의 위안부 합의 발표 다음날 아베 신조 총리는 “어제로써 다 끝났다”며 “이는 (28일 박 대통령과의)전화 회담에서도 말해뒀다”고 했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발표. ⓒ 연합뉴스
유감표명의 내용을 떠나 일본의 이같은 태도에서 피해국 국민들은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베 총리는 일본 외무상이 대독한 입장 발표 이외에 어떤 사과 발언이나 서한도 보내지 않는 대신에 “이번엔 한국 외교부 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不可逆的ㆍ돌이킬 수 없음)이라 말했고 그것을 미국이 평가한다는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한국이 약속을 어기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끝난다”는 식으로 피해국을 훈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독일의 지도자들이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 연설)이라며 대를 이어 기억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진정성이 없다는 점은 일본 정부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2.28 위안부 합의’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UN의 기준과 절차(반 보벤 보고서 등)에 비춰 “내용 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실질적 참여도 없이 정부간 성명서의 낭독을 통해 ‘졸지에’ 발표해 버렸다는 점에서 격식도 예의도 없는 절차”라고 비판했다.(‘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2015년 한일외교장관 회담의 문제점’. 양현아. 2016.) 국제인권기준은 피해자들이 수사 및 재판절차에 통합되고 증언을 진술할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피해의 회복이자 사회복귀의 중요한 과정임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일 합의가 “유족은 물론 (20만으로 추산되는)사자들에 대한 고려도 언급도 없다”며 “만약 일본 정부의 “책임의 통감”이 생존자 뿐 아니라 사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면 ‘소녀상’은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 할 존엄의 표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정말 사죄했는가?
12.28 위안부 합의에서 발표된 일본측 입장은 내용적으로도 사죄가 아니었다. 아베 총리의 입장 표명이 담긴 공동 발표문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송구함(お?び, 오와비)과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일본은 ‘샤자이 (謝罪)’가 아니라 오와비(お?び)라고 했다. 이는 사죄가 아니라 ‘미안하다’ 내지는 ‘송구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죄가 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사죄를 해야 할 ‘행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범죄 피의자가 ‘난 그런 범행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당신이 고통을 받았다면 유감이다’라고 발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 전에도 후에도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위안부 동원을 정부와 일본군이 주도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법적 책임’은 부인했다.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나서 이같은 합의 내용에 대해 일본은 자국 언론에 정확하게 발표했다.
합의 직후 기시다 외무상은 “(일본이)잃은 것이라고 하면 10억 엔일 것“이라며 “도의적 책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으며 법적 책임은 (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해결이 끝났다는 점도 변함 없다. 다만 이번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로 책임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다. 합의 당일인 28일 저녁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에 따라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남은 것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밝혔다. 10억엔 역시 일본은 ‘배상금’이 아니라고 못박았고 종전에 피해자들이 거부했던 국민기금과 마찬가지로 도의적,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금임을 분명히 했다.
결국 12.28 위안부 합의에서 이뤄진 일본의 조치란 수사적인 차원의 유감표명과 인도적 지원금 형태의 10억엔 출연이 전부인 것이다.
위안부 생존 피해자 및 정대협 등 각국의 지원단체, 그리고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일본에 요구해 온 조치를 △범죄사실의 인정(위안부 강제연행 사실 및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입안하고 주도함) △그에 대해 공식 사죄할 것(국회결의 포함) △보유자료 전면 공개와 진상규명 △법적 배상 △역사교육 △책임자 처벌 등 6개항이라고 볼 때, 그 어느 것도 12.28 합의에선 실현되지가 않았다.
▲ 2015년 12월3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는 사람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러나 일본이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일본은 10억엔 거출을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한국측 선언을 얻어냈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은 “일본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공언했다.
가해자와 동조자들간의 야합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최초보도하고 여러 특종을 해 온 아사히 신문은 위안부 합의 직후 한일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큰 역할을 한 기시 노부스케(미디어오늘: 일본 극우의 좌장. 일본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을 지낸 A급 전범) 전 총리, 국내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박정희 전 대통령. 각각의 손자와 딸인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한일 신시대의 막을 열려고 하고있다”고 숨겨진 맥락을 짚어냈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추진할 당시 일본 정가의 막후 조정자였다.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이 만든 만주국의 실세로서, 괴뢰국가인 만주국 경영을 총지휘했다. 물론 기시는 만주국에서 근무하던 박정희의 상관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이케다 당시 수상을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을 때 기시 노부스케와 만주국 군관학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도 박정희와 만찬에 함께한다.
2015년 8월 중국에선 일본의 만주국이 위안부로 끌고온 한국여성 2,000명을 기록한 문서가 추가로 공개됐다. 1941년 일본이 무단장 쑤이양의 한 지역에 군 위안소를 열고 한국 여성들을 수용한 것으로, 이들 문건엔 일본이 일본군 전용 요리점을 연다고 속여 한국여성들을 끌고왔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법적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한일협정은 만주국 장교였던 박정희와 전범 기시 노부스케에 의해 이뤄졌고, 그들의 정치적 DNA를 그대로 따르는 박근혜와 아베 신조가 다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죄는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잘못을 적시하고 진정 용서를 구할 때, 그리고 재발방지를 약속할 때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12.28합의가 “자격 없는 자들끼리의 허망한 권리주장”이자 “피해자와 지원 단체들을 배제한 가해자와 동조자들끼리의 야합”이라고 규정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비추어 본 2015년 한일외교장관 회담의 문제’ 이나영. 2016)
“아베는 가토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어봤을 것”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낸 양국 정부의 정치적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이 합의는 여러 납득하기 어려운 면모를 갖고 있다.
이 합의는 그동안의 여러 UN 결의안, 국제엠네스티나 ILO 등 국제사회의 권고 내용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국제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조시현 전 건국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와 같이 역사적, 법적 쟁점들이 착종된 문제에 있어서 국제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 “국제법의 관점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했다.
▲ 2015년 12월17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가토 다쓰야.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위안부 문제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법적 책임 부분에서도 한국측의 태도는 석연치 않았다. 조시현 교수는 “협상의 최종 단계에서 한국 측에서 ‘법적 책임’을 삭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는 보도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법적 문제들이 협상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가)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의 법적 함의’ 조시현. 2016)
12.28합의가 발표되기 이전에 나온 일본 언론 보도를 보면, 이 합의가 일본의 로드맵과 의도된 ‘표현’을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언론을 통해 합의 이전에 이미 공개된 “종군 위안부 문제 타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확충하기 위해 1억엔의 새로운 기금 창설을 제안”, 한국이 중시하는 ‘국가의 책임’과 ‘사죄’를 아베 총리가 “책임 통감”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것, 한일간에 도출될 합의문에 “최종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명기하는 것 등이다.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와 관련해서도 일본 언론은“소녀상 철거는 (협상)타결 이후 한국이 자발적인 형태로 기념관 등으로 옮기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고 언급이 됐던 사안이다.
한마디로 일본이 만든 합의의 내용과 방식을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따라갔다는 얘기가 된다. 합의 직후 일본의 3대 신문(요미우리, 마이니치, 아사히)은 예외없이 일본의 승리임을 확인했다. 이들 신문들은 ‘진의를 의심하게하는 언행에 조심해야한다’ ‘문제가 다시 재론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일본 정가의 표정관리를 주문하기도 했다.
이번 위안부 합의 과정에 미국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달 초에 발간된 여성가족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이는 공공연하게 언급됐다. “오바마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과 마찰을 벌이는 한일관계가 미국이 추진하는 아시아로의 회귀, 재 균형정책으로 불리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추진에 큰 저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우려하여 한일 간 ‘위안부’ 협상타결을 배후에서 또는 표면적으로 촉진해 왔다”는 것이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핵심은 미국의 압력일 것”이라며 “동북아에 있어서 한일정보보호협정이라든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뭐냐라고 할 때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였다. 미국의 여러가지의 강력한 압력과 국내의 보수적인 바람을 일본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협상 과정의 배후에서 가해진 미국의 압력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도 작용했다. 때문에 위안부 합의가 일본측에만 유리하게 맺어진 배경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무엇인가 “덜미를 잡힌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이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의 배경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주철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2013년2월~2015년10월)은 지난 5월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서두른 측면이 있었다”며 “가토 다쓰야 무죄 판결(2015년 12월 17일)뒤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갑자기 (한일간에 논의가 오가던 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오면서 정부도 서둘렀다”고 말했다.
합의의 당사자인 박근혜 정부의 외교수석이었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가토 다쓰야 지국장과 위안부 합의의 관련성에 대한 단서는 적지 않다.
유흥수 주일대사는 지난해 7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가토 지국장의 문제가)비중이 다르다는 것을 본국(한국정부)에 보고했다”면서 “가토 전 지국장을 선처해 달라는 일본 입장을 법무부에 전달했고 11월에 무죄 판결이 났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12월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합의됐다”고 했다.
가토 다쓰야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의 대통령 7시간에 대한 조선일보 칼럼 내용을 인용해 정윤회 씨와의 밀회설 및 최태민-최순실 일가와 박 전대통령의 관계를 다뤘다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세월호 유가족 및 생존자 김성묵씨는 가토 다쓰야 전 지국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면서 도쿄 경시청의 고위관료를 비공개 면담한 적이 있다. 지금은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긴 이 고위관료는 2015년 4월 귀국한 가토 다쓰야와 아베 총리의 독대 이후 일본의 태도가 강경해졌다며, 그 배경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독대 이후 아베는 가토의 건강까지 챙기며 독려했으며 일본 언론은 가토를 영웅시 하는 기사로 도배됐다”며 “그 만남에서 아베는 가토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것을 물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일관계에 자국의 이익으로 돌릴 것인가를 계산했음에 틀림없다”고도 했다.
실제 가토 다쓰야의 귀국 이후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행보는 아베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4월29일), NPT평가회의에 외무성 심의관 파견(원폭 투하지인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각국 정상의 방문을 추진) 등 한층 적극적이고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영웅이 된 가토 다쓰야…박근혜, 아베 정권에 덜미 잡혔나?
[기획-‘위안부’ ⑦] 진상규명 대상이 된 ‘위안부 합의’, 산케이 사건 이후 한일관계 급변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7년 07월 01일 토요일
1970년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나치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참회한 사진은 유명하다. 빌리브란트 총리는 2차 대전 후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의 첫 현직수상이었다. 비가 오는 가운데 콘크리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서독 총리에 대해 유럽 언론은 “한 사람이 무릎 꿇음으로써 독일 전체가 일어섰다”고 찬사를 던졌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함께 나온 아베 신조의 유감 표명을 두고 사람들은 빌리브란트의 사죄를 떠올렸다. 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브란트와 달리 일본의 아베 수상은 유감 표명 직후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 한일 외무부장관의 위안부 합의 발표 다음날 아베 신조 총리는 “어제로써 다 끝났다”며 “이는 (28일 박 대통령과의)전화 회담에서도 말해뒀다”고 했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 2015년 '12.28 위안부 합의' 발표. ⓒ 연합뉴스
유감표명의 내용을 떠나 일본의 이같은 태도에서 피해국 국민들은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베 총리는 일본 외무상이 대독한 입장 발표 이외에 어떤 사과 발언이나 서한도 보내지 않는 대신에 “이번엔 한국 외교부 장관이 TV 카메라 앞에서 불가역적(不可逆的ㆍ돌이킬 수 없음)이라 말했고 그것을 미국이 평가한다는 절차를 밟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상 한국이 약속을 어기면 한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끝난다”는 식으로 피해국을 훈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독일의 지도자들이 “나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 연설)이라며 대를 이어 기억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과는 완전히 딴 판이다.
진정성이 없다는 점은 일본 정부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양현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2.28 위안부 합의’가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UN의 기준과 절차(반 보벤 보고서 등)에 비춰 “내용 뿐 아니라 피해자들의 실질적 참여도 없이 정부간 성명서의 낭독을 통해 ‘졸지에’ 발표해 버렸다는 점에서 격식도 예의도 없는 절차”라고 비판했다.(‘피해자의 입장에서 본 2015년 한일외교장관 회담의 문제점’. 양현아. 2016.) 국제인권기준은 피해자들이 수사 및 재판절차에 통합되고 증언을 진술할 충분한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피해의 회복이자 사회복귀의 중요한 과정임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일 합의가 “유족은 물론 (20만으로 추산되는)사자들에 대한 고려도 언급도 없다”며 “만약 일본 정부의 “책임의 통감”이 생존자 뿐 아니라 사자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면 ‘소녀상’은 철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해야 할 존엄의 표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정말 사죄했는가?
12.28 위안부 합의에서 발표된 일본측 입장은 내용적으로도 사죄가 아니었다. 아베 총리의 입장 표명이 담긴 공동 발표문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송구함(お?び, 오와비)과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일본은 ‘샤자이 (謝罪)’가 아니라 오와비(お?び)라고 했다. 이는 사죄가 아니라 ‘미안하다’ 내지는 ‘송구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죄가 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일본이 사죄를 해야 할 ‘행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범죄 피의자가 ‘난 그런 범행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당신이 고통을 받았다면 유감이다’라고 발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 전에도 후에도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위안부 동원을 정부와 일본군이 주도한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법적 책임’은 부인했다. 행위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수사적 표현에 불과하다.
그리고나서 이같은 합의 내용에 대해 일본은 자국 언론에 정확하게 발표했다.
합의 직후 기시다 외무상은 “(일본이)잃은 것이라고 하면 10억 엔일 것“이라며 “도의적 책임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으며 법적 책임은 (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해결이 끝났다는 점도 변함 없다. 다만 이번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로 책임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다. 합의 당일인 28일 저녁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1965년 일한 청구권협정에 따라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이 끝났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며 남은 것은 도의적 책임이라는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밝혔다. 10억엔 역시 일본은 ‘배상금’이 아니라고 못박았고 종전에 피해자들이 거부했던 국민기금과 마찬가지로 도의적, 인도적인 차원의 지원금임을 분명히 했다.
결국 12.28 위안부 합의에서 이뤄진 일본의 조치란 수사적인 차원의 유감표명과 인도적 지원금 형태의 10억엔 출연이 전부인 것이다.
위안부 생존 피해자 및 정대협 등 각국의 지원단체, 그리고 UN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일본에 요구해 온 조치를 △범죄사실의 인정(위안부 강제연행 사실 및 일본정부와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입안하고 주도함) △그에 대해 공식 사죄할 것(국회결의 포함) △보유자료 전면 공개와 진상규명 △법적 배상 △역사교육 △책임자 처벌 등 6개항이라고 볼 때, 그 어느 것도 12.28 합의에선 실현되지가 않았다.
▲ 2015년 12월30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는 사람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러나 일본이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일본은 10억엔 거출을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한국측 선언을 얻어냈고 그 연장선에서 한국은 “일본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가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공언했다.
가해자와 동조자들간의 야합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최초보도하고 여러 특종을 해 온 아사히 신문은 위안부 합의 직후 한일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큰 역할을 한 기시 노부스케(미디어오늘: 일본 극우의 좌장. 일본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을 지낸 A급 전범) 전 총리, 국내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박정희 전 대통령. 각각의 손자와 딸인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이 한일 신시대의 막을 열려고 하고있다”고 숨겨진 맥락을 짚어냈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추진할 당시 일본 정가의 막후 조정자였다.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이 만든 만주국의 실세로서, 괴뢰국가인 만주국 경영을 총지휘했다. 물론 기시는 만주국에서 근무하던 박정희의 상관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정희가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이케다 당시 수상을 만나러 일본을 방문했을 때 기시 노부스케와 만주국 군관학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도 박정희와 만찬에 함께한다.
2015년 8월 중국에선 일본의 만주국이 위안부로 끌고온 한국여성 2,000명을 기록한 문서가 추가로 공개됐다. 1941년 일본이 무단장 쑤이양의 한 지역에 군 위안소를 열고 한국 여성들을 수용한 것으로, 이들 문건엔 일본이 일본군 전용 요리점을 연다고 속여 한국여성들을 끌고왔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법적 해결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한일협정은 만주국 장교였던 박정희와 전범 기시 노부스케에 의해 이뤄졌고, 그들의 정치적 DNA를 그대로 따르는 박근혜와 아베 신조가 다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죄는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잘못을 적시하고 진정 용서를 구할 때, 그리고 재발방지를 약속할 때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며 12.28합의가 “자격 없는 자들끼리의 허망한 권리주장”이자 “피해자와 지원 단체들을 배제한 가해자와 동조자들끼리의 야합”이라고 규정했다. (‘일본군‘위안부’ 운동에 비추어 본 2015년 한일외교장관 회담의 문제’ 이나영. 2016)
“아베는 가토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물어봤을 것”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낸 양국 정부의 정치적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이 합의는 여러 납득하기 어려운 면모를 갖고 있다.
이 합의는 그동안의 여러 UN 결의안, 국제엠네스티나 ILO 등 국제사회의 권고 내용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국제법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조시현 전 건국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와 같이 역사적, 법적 쟁점들이 착종된 문제에 있어서 국제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 “국제법의 관점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이라고 했다.
▲ 2015년 12월17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가토 다쓰야.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위안부 문제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인 법적 책임 부분에서도 한국측의 태도는 석연치 않았다. 조시현 교수는 “협상의 최종 단계에서 한국 측에서 ‘법적 책임’을 삭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는 보도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러한 법적 문제들이 협상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가)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라고 지적했다.(‘2015년 한일외교장관 합의의 법적 함의’ 조시현. 2016)
12.28합의가 발표되기 이전에 나온 일본 언론 보도를 보면, 이 합의가 일본의 로드맵과 의도된 ‘표현’을 그대로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본 언론을 통해 합의 이전에 이미 공개된 “종군 위안부 문제 타결을 위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확충하기 위해 1억엔의 새로운 기금 창설을 제안”, 한국이 중시하는 ‘국가의 책임’과 ‘사죄’를 아베 총리가 “책임 통감”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것, 한일간에 도출될 합의문에 “최종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표현을 명기하는 것 등이다.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와 관련해서도 일본 언론은“소녀상 철거는 (협상)타결 이후 한국이 자발적인 형태로 기념관 등으로 옮기는 방안”이 나오고 있다고 언급이 됐던 사안이다.
한마디로 일본이 만든 합의의 내용과 방식을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따라갔다는 얘기가 된다. 합의 직후 일본의 3대 신문(요미우리, 마이니치, 아사히)은 예외없이 일본의 승리임을 확인했다. 이들 신문들은 ‘진의를 의심하게하는 언행에 조심해야한다’ ‘문제가 다시 재론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일본 정가의 표정관리를 주문하기도 했다.
이번 위안부 합의 과정에 미국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달 초에 발간된 여성가족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이는 공공연하게 언급됐다. “오바마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과 마찰을 벌이는 한일관계가 미국이 추진하는 아시아로의 회귀, 재 균형정책으로 불리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추진에 큰 저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경계,우려하여 한일 간 ‘위안부’ 협상타결을 배후에서 또는 표면적으로 촉진해 왔다”는 것이다.
이장희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핵심은 미국의 압력일 것”이라며 “동북아에 있어서 한일정보보호협정이라든가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뭐냐라고 할 때 한일간의 위안부 문제였다. 미국의 여러가지의 강력한 압력과 국내의 보수적인 바람을 일본도 이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협상 과정의 배후에서 가해진 미국의 압력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도 작용했다. 때문에 위안부 합의가 일본측에만 유리하게 맺어진 배경에 대해 박근혜 정부가 무엇인가 “덜미를 잡힌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사건이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의 배경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주철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2013년2월~2015년10월)은 지난 5월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서두른 측면이 있었다”며 “가토 다쓰야 무죄 판결(2015년 12월 17일)뒤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갑자기 (한일간에 논의가 오가던 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나오면서 정부도 서둘렀다”고 말했다.
합의의 당사자인 박근혜 정부의 외교수석이었던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가토 다쓰야 지국장과 위안부 합의의 관련성에 대한 단서는 적지 않다.
유흥수 주일대사는 지난해 7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가토 지국장의 문제가)비중이 다르다는 것을 본국(한국정부)에 보고했다”면서 “가토 전 지국장을 선처해 달라는 일본 입장을 법무부에 전달했고 11월에 무죄 판결이 났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12월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합의됐다”고 했다.
가토 다쓰야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당일의 대통령 7시간에 대한 조선일보 칼럼 내용을 인용해 정윤회 씨와의 밀회설 및 최태민-최순실 일가와 박 전대통령의 관계를 다뤘다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세월호 유가족 및 생존자 김성묵씨는 가토 다쓰야 전 지국장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면서 도쿄 경시청의 고위관료를 비공개 면담한 적이 있다. 지금은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긴 이 고위관료는 2015년 4월 귀국한 가토 다쓰야와 아베 총리의 독대 이후 일본의 태도가 강경해졌다며, 그 배경과 관련해 “일본 정부가 세월호 7시간의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독대 이후 아베는 가토의 건강까지 챙기며 독려했으며 일본 언론은 가토를 영웅시 하는 기사로 도배됐다”며 “그 만남에서 아베는 가토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것을 물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일관계에 자국의 이익으로 돌릴 것인가를 계산했음에 틀림없다”고도 했다.
실제 가토 다쓰야의 귀국 이후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행보는 아베 총리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4월29일), NPT평가회의에 외무성 심의관 파견(원폭 투하지인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각국 정상의 방문을 추진) 등 한층 적극적이고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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