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vop.co.kr/A00001175117.html
“한국군은 죽은 사람 시체까지 무덤에서 꺼내 불도저로 밀어버렸어요”
[기획연재②] 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목격자들의 증언
김남주 변호사(민변 베트남전TF) 발행 2017-07-03 14:50:45 수정 2017-07-03 14:50:45
본 연재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법정과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민변 변호사들이 직접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던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 작성한 글들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산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이하 “민변 베트남전 TF“) 소속 변호사 6명은 지난 6월 2일부터 6일까지 베트남 중부 꽝남성을 방문하여 학살 피해자들을 인터뷰하였습니다. 한국 법률가들이 집단적으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현지 조사한 것은 이번이 최초였습니다.
민변 베트남전 TF는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내년 4월경 한-베 평화재단과 함께 한국 정부의 학살책임을 묻는 시민법정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후 학살 피해자들을 원고로 한국 정부를 피고로 하는 국가배상소송을 국내 법원에 제기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마을 학살 사건은 한국의 압력으로 유가족들이 위령비의 비문을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덮어버렸던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한국에 의해 여러 차례의 가해를 당했던 것이다. 1차 가해는 집단학살이요, 2차 가해는 한국군이 학살 다음 날 다시 돌아와 무덤과 시신을 불도저로 훼손해버린 만행이었고, 셋째는 위령비 비문을 수정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일이다. 이 위령비는 한국의 한 참전군인 단체가 건립 기금을 지원했다. 이 참전군인 단체는 위령비 비문에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학살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국 외교관의 힘을 빌어 유족에게 그 내용을 수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유족들은 비문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비문을 덮어버렸던 것이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 하미마을 위령비 비문 중 일부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비문이 연꽃 문양으로 덮여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하미마을 학살은 현재까지 조사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생존자 중에서 4명, 그리고 유족회 연락반장을 만나 학살 당시 상황과 학살 후 생존자들의 고통에 대해 조사했다.
하미마을 학살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갓난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 전부를 죽였다. 둘째, 학살당한 사람들이 도발하거나 저항을 하지 않았고, 살해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셋째, 집을 태우고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하미마을 학살의 개요는 이렇다. 한국군은 초기에 하미마을에 와서 주민들에게 쌀도 주고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8년 2월 22일 아침 7시 즈음 한국군이 하미마을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을 4군데로 모았다. 그리고 7시반 즈음부터 한국군은 이렇게 모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동소총, 유탄발사기를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학살했다. 집도 모두 불태웠다. 한국군은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에 확인사살까지 한 후 돌아갔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135명, 살아남은 자는 겨우 18명이었다. 학살 다음날 한국군은 불도저를 동원해 희생자 무덤을 파헤친 다음 시체를 꺼내서 밀어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도, 두 다리가 잘려 평생 의족 신세를 지거나 모든 가족이 학살당해 고아로 살아가거나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죽은 이들 중 10살이 안 되는 어린이가 57명이나 됐다. 태어난 지 채 두달이 안 된 영아도 3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일부 한국군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는지, 한 남자아이에게는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숨으라고 해서 살려주거나 학살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쯔엉 티 투:그녀는 학살 당시 파편에 맞아 오른 쪽 발 앞부분을 절단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생존자인 쯔엉 티 투 할머니는 딱 봐도 전쟁의 상처가 온몸에 박혀 있었다. 투 할머니의 학살 때 다친 오른 발 앞을 잘라야 했다. 투 할머니는 학살 당시 30세였는데, 한국군에 의해 7살배기 딸과 4살배기 아들을 잃었다. 투 할머니도 발과 몸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군은 집에 불을 질렀고, 투 할머니는 부상을 입은 채 타죽지 않으려고 3개월 된 딸의 팔을 잡아 질질 끌고 집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 때 딸도 다리에 불덩이가 떨어져 심한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걷기가 불편하고 아직도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딸은 그 때 화상으로 걷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우리 일행에게 투 할머니는 안 아프게 해주는 약을 보내달라고 연신 부탁하셨다. 한국이 양국 우호증진을 위해 지어주었다는 꽝남성 종합병원의 손길은 왜 투 할머니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 번째로 응웬 티 홍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홍은 학살 당시 12살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투 할머니와는 조카 숙모 사이다. 학살 당시 홍은 외할머니, 이모, 어머니, 친동생 3명이 죽임을 당했다. 할아버지, 오빠, 홍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한국 군인들은 홍의 집 안마당에 하미마을 주민들을 세워놓고 지휘관 명령에 따라 사격을 가하고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전부터 알고 있던 한국 군인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학살을 하면서도 울었다고 한다. 홍은 할아버지와 함께 집안 제단 속에 숨어서 이 비극을 목격했다. 홍의 오빠 응웬 쑤언 호아는 학살 전에 소를 몰러 나갔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 군인이 오빠를 보고 방공호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고, 오빠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홍은 오빠를 살려준 그 한국 군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며 꼭 찾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참 착한 사람이다.
응웬 티 홍(맨 오른쪽)이 자신의 집에서 학살 당시 목격한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당 티 코아의 온가족 6명은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할머니, 어머니, 언니 2명, 동생 2명이 살해됐다. 자신만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살았다. 아버지는 학살 이전에 돌아가셨기에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전쟁고아가 됐다. 그녀는 학살 때 3살 정도였고 자신의 이름만 기억난다고 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온 뒤로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구걸하며 살다가 식모살이,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나중에 친척을 만나게 되어 고향 하미마을에서 온가족이 살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군은 하미마을 사람들을 씨를 말릴 듯 죽여댔지만, 그녀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손주들까지 둔 번창한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하미마을 학살은 ‘학살’임에 분명하다. 사전적 의미로 학살(虐殺)이란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는 뜻이고, 모질 학(虐)에 죽일 살(殺)자로 되어 있다. 모질 학(虐)은 모질다, 사납다, 험악하다, 혹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국군은 저항하지도 않는 민간인들을 모질게 씨도 안남기도록 갓난아이까지 마구 다 죽였다. 생존자였던 팜 티 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번에 직접 확인은 하지 못하였으나 생전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임신한 사촌올케를 성폭행하고 칼로 배를 갈라 태아와 창자를 꺼내 죽였다. 이렇듯 한국군은 사납고 가혹하게 마구 죽였던 것이다.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인류사에 다시 이런 반인간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미마을 학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반성하며, 희생자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군은 죽은 사람 시체까지 무덤에서 꺼내 불도저로 밀어버렸어요”
[기획연재②] 베트남 하미마을 학살 목격자들의 증언
김남주 변호사(민변 베트남전TF) 발행 2017-07-03 14:50:45 수정 2017-07-03 14:50:45
본 연재는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시민법정과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민변 변호사들이 직접 현지조사를 통해 확인하였던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아 작성한 글들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산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TF’(이하 “민변 베트남전 TF“) 소속 변호사 6명은 지난 6월 2일부터 6일까지 베트남 중부 꽝남성을 방문하여 학살 피해자들을 인터뷰하였습니다. 한국 법률가들이 집단적으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를 현지 조사한 것은 이번이 최초였습니다.
민변 베트남전 TF는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내년 4월경 한-베 평화재단과 함께 한국 정부의 학살책임을 묻는 시민법정을 개최하고자 합니다. 이후 학살 피해자들을 원고로 한국 정부를 피고로 하는 국가배상소송을 국내 법원에 제기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마을 학살 사건은 한국의 압력으로 유가족들이 위령비의 비문을 연꽃 문양 대리석으로 덮어버렸던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한국에 의해 여러 차례의 가해를 당했던 것이다. 1차 가해는 집단학살이요, 2차 가해는 한국군이 학살 다음 날 다시 돌아와 무덤과 시신을 불도저로 훼손해버린 만행이었고, 셋째는 위령비 비문을 수정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일이다. 이 위령비는 한국의 한 참전군인 단체가 건립 기금을 지원했다. 이 참전군인 단체는 위령비 비문에 한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학살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한국 외교관의 힘을 빌어 유족에게 그 내용을 수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유족들은 비문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비문을 덮어버렸던 것이다.
“1968년 이른 봄, 정월 24일에 청룡부대 병사들이 미친 듯이 몰려와 선량한 주민들을 모아 놓고 잔인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하미마을 30가구, 135명의 시체가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마을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 하미마을 위령비 비문 중 일부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비문이 연꽃 문양으로 덮여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하미마을 학살은 현재까지 조사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사실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생존자 중에서 4명, 그리고 유족회 연락반장을 만나 학살 당시 상황과 학살 후 생존자들의 고통에 대해 조사했다.
하미마을 학살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갓난아이까지 가리지 않고 마을 사람 전부를 죽였다. 둘째, 학살당한 사람들이 도발하거나 저항을 하지 않았고, 살해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셋째, 집을 태우고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알게 된 하미마을 학살의 개요는 이렇다. 한국군은 초기에 하미마을에 와서 주민들에게 쌀도 주고 아이들에게 사탕도 주면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8년 2월 22일 아침 7시 즈음 한국군이 하미마을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을 4군데로 모았다. 그리고 7시반 즈음부터 한국군은 이렇게 모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동소총, 유탄발사기를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학살했다. 집도 모두 불태웠다. 한국군은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에 확인사살까지 한 후 돌아갔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이 135명, 살아남은 자는 겨우 18명이었다. 학살 다음날 한국군은 불도저를 동원해 희생자 무덤을 파헤친 다음 시체를 꺼내서 밀어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도, 두 다리가 잘려 평생 의족 신세를 지거나 모든 가족이 학살당해 고아로 살아가거나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죽은 이들 중 10살이 안 되는 어린이가 57명이나 됐다. 태어난 지 채 두달이 안 된 영아도 3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일부 한국군은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는지, 한 남자아이에게는 마을로 돌아가지 말고 숨으라고 해서 살려주거나 학살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쯔엉 티 투:그녀는 학살 당시 파편에 맞아 오른 쪽 발 앞부분을 절단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생존자인 쯔엉 티 투 할머니는 딱 봐도 전쟁의 상처가 온몸에 박혀 있었다. 투 할머니의 학살 때 다친 오른 발 앞을 잘라야 했다. 투 할머니는 학살 당시 30세였는데, 한국군에 의해 7살배기 딸과 4살배기 아들을 잃었다. 투 할머니도 발과 몸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군은 집에 불을 질렀고, 투 할머니는 부상을 입은 채 타죽지 않으려고 3개월 된 딸의 팔을 잡아 질질 끌고 집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 때 딸도 다리에 불덩이가 떨어져 심한 화상을 입었다. 할머니는 걷기가 불편하고 아직도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딸은 그 때 화상으로 걷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려는 우리 일행에게 투 할머니는 안 아프게 해주는 약을 보내달라고 연신 부탁하셨다. 한국이 양국 우호증진을 위해 지어주었다는 꽝남성 종합병원의 손길은 왜 투 할머니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 번째로 응웬 티 홍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홍은 학살 당시 12살 여자 아이였다. 그녀는 투 할머니와는 조카 숙모 사이다. 학살 당시 홍은 외할머니, 이모, 어머니, 친동생 3명이 죽임을 당했다. 할아버지, 오빠, 홍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한국 군인들은 홍의 집 안마당에 하미마을 주민들을 세워놓고 지휘관 명령에 따라 사격을 가하고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전부터 알고 있던 한국 군인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학살을 하면서도 울었다고 한다. 홍은 할아버지와 함께 집안 제단 속에 숨어서 이 비극을 목격했다. 홍의 오빠 응웬 쑤언 호아는 학살 전에 소를 몰러 나갔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 군인이 오빠를 보고 방공호에 숨어 있으라고 말했고, 오빠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홍은 오빠를 살려준 그 한국 군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며 꼭 찾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참 착한 사람이다.
응웬 티 홍(맨 오른쪽)이 자신의 집에서 학살 당시 목격한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민변 베트남전 TF 제공
당 티 코아의 온가족 6명은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할머니, 어머니, 언니 2명, 동생 2명이 살해됐다. 자신만 머리에 부상을 입고 살았다. 아버지는 학살 이전에 돌아가셨기에 그녀는 어린 나이에 전쟁고아가 됐다. 그녀는 학살 때 3살 정도였고 자신의 이름만 기억난다고 했다. 그녀는 병원에서 나온 뒤로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구걸하며 살다가 식모살이,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나중에 친척을 만나게 되어 고향 하미마을에서 온가족이 살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군은 하미마을 사람들을 씨를 말릴 듯 죽여댔지만, 그녀는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손주들까지 둔 번창한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하미마을 학살은 ‘학살’임에 분명하다. 사전적 의미로 학살(虐殺)이란 “가혹하게 마구 죽임”이라는 뜻이고, 모질 학(虐)에 죽일 살(殺)자로 되어 있다. 모질 학(虐)은 모질다, 사납다, 험악하다, 혹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국군은 저항하지도 않는 민간인들을 모질게 씨도 안남기도록 갓난아이까지 마구 다 죽였다. 생존자였던 팜 티 호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번에 직접 확인은 하지 못하였으나 생전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임신한 사촌올케를 성폭행하고 칼로 배를 갈라 태아와 창자를 꺼내 죽였다. 이렇듯 한국군은 사납고 가혹하게 마구 죽였던 것이다. 인간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인류사에 다시 이런 반인간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미마을 학살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반성하며, 희생자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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