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의 근거'다"
[추모글] 김근태 선배님 가신 날 아침에
11.12.30 10:28 ㅣ최종 업데이트 11.12.30 11:34  최경환 (beyondiom)

▲ 양손에 포승줄을 한 채 밝은 미소를 짓는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1986년 나는 김근태 선배와 강릉교도소에서 함께 있었다. 나는 1986년 5월 민청련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2가 YMCA 앞에서 "광주학살원흉처단국민대회" 시위를 주동하여 10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강릉교도소에 수감되었다.
 
'민청련 사건'으로 수감된 김 선배는 이미 강릉교도소에서 감옥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 선배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살인적 고문을 당한 후 계속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강릉교도소에는 미문화원 사건으로 수감된 학생들도 함께 있었다. (미국문화원 사건이란 1985년 5월 미국문화원에 73명의 서울시내 소재 5개 대학 학생들이 기습점거 농성한 사건이다. 학생들은 80년 5월의 광주항쟁 시 미국이 한국공수부대 등의 투입을 동의했는지, 미국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출범, 지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따지고 미국대사의 면담을 요청한 사건이다.)
 
강릉교도소에 수감 중인 1986년 10월 건국대 사건이 일어났다. (건국대 사건이란 서울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발족식에 경찰력이 투입돼 4일 동안 학생과 대치해 1290명의 학생의 구속된 사건이다. 사법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최고의 기록이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고 감옥에 있던 학생들과 옥중투쟁을 결의하고 '옥중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선배인 내가 옥중투쟁위원장을 맡았다.
 
우리는 별도의 사동에 격리돼 수감 중인 김 선배에게 우리의 계획을 은밀하게 알렸다. 김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먼저 새벽에 문짝을 차고 시작하겠다. 그것을 시작으로 함께하자."
 
후배들이 먼저 시작하여 '먹방'(징벌방) 수감 등 수감생활에 불이익을 받는 것을 염려한 김 선배의 배려였다. 우리는 새벽에 김 선배의 행동, 신호를 기다렸다. 새벽, 김 선배의 문짝 차는 소리가 울렸다. 쿵… 쿵… . 조용한 강릉교도소 감옥은 순식간 큰 소동이 벌어졌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함께 문짝을 차고 구호를 외쳤다. 재소자들도 함께 동조했다. 그리고 7일간의 단식에 들어갔다.
 
김 선배는 이런 분이었다. 전두환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1983년 민청련을 조직해 공개적으로 싸웠다. 의장에 취임해 앞장서 투쟁했다. 김대중 대통령 말처럼 김 선배는 "말해야 할 때 먼저 말하고 실천해야 할 때 먼저 실천한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전두환 독재에 저항해 자신의 몸 던진 '행동하는 양심' 김근태
 
▲ 석방 기념 인터뷰하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김근태 선배는 1983년, 37세 때 민청련을 창립하고 의장에 취임했다. 민청련은 자신의 상징으로 독을 품은 두꺼비를 내세웠다. 몸속에 알을 밴 두꺼비는 뱀을 찾아가 싸움을 건다. 그리고 잡아먹힌다. 두꺼비는 자신의 몸속에 든 독으로 뱀을 죽이고 두꺼비 알들은 뱀을 자양분으로 삼아 부화하게 된다.
 
김 선배는 민청련을 조직하고 의장에 취임해 맨 앞에 서서 전두환 독재에 저항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뱀에게 잡아 먹혀 뱀을 자양분으로 알을 키우는 두꺼비가 되고자 했다. 실제 민청련 창립 이후 노동, 농민, 시민사회, 학생, 종교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운동조직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1987년 6·10민주화운동으로 꽃 피웠다.
 
그러나 김 선배는 뱀에 잡아먹히는 두꺼비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살인적인 물고문, 전기고문….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를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김 선배는 신념을 굽히지 않은 투사였다. 세상에 고문 내용을 폭로했다. 우리 국민들과 세계의 양심들은 분노했다. 김 선배는 감옥 안에서 장문의 항소이유서를 썼다. 고문 내용을 낱낱이 폭로한 내용이었다.
 
나는 1987년 3월 감옥에서 나온 이후 김 선배의 항소이유서를 책으로 출판하는데 편집을 맡았다. 김 선배가 감옥안에서 펜으로 쓴 항소이유서, 그 속에는 고문의 종류와 내용, 그 과정에서 겪은 인간적 모멸과 고통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밤을 세우며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원고를 다듬었다. 항소이유서는 <남영동>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시대의 영웅, 세상을 바꿨다... 우리에게 영원히 '희망의 근거'
 
▲ 양심수석방촉구 시민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김근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김근태는 실천과 행동에 앞장섰지만 동시에 이론을 겸비한 지도자였다. 탁월한 이론가였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내부에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독재를 이겨내고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운동 내부에는 항상 정세에 대한 인식, 전략 전술적 견해 차이를 가지고 쉼 없는 논쟁이 계속됐다. 민주, 민족, 민중의 키워드를 붙잡고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 행동할 것인지 아니면 준비할 것인지 하는 논쟁들이었다.
 
김근태는 여기에 대해서 분명했다. 김근태는 폭압적인 전두환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국민의 요구임을 분명히 했다. 김근태의 철학적, 사상적 깊이는 운동 내부에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현실의 운동에서는 국민의 요구를 중시했다.
 
김근태의 리더십은 실천력에서 빛났다. 김근태는 경찰, 안기부 등에게 가장 많이 두들겨 맞았다. 유치장, 감옥을 밥먹듯 드나들었다. 그리고 김근태는 따뜻한 품성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이 점이야말로 김근태 선배의 매력이다. 후배들의 생활을 살펴주었으며, 고민을 이해했고, 그속에서 함께 실천의 길을 찾았다. 김근태 선배는 1986년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해 보건복지부 장관, 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김근태 선배는 우리 정치의 진보진영의 수장으로서 그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김근태의 선배의 가장 큰 회한은 이명박 정권일 것이다. 평생 갖은 고문을 당하고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가 무너져가는 앞에서 김근태 선배는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실제 김근태 선배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 "민간독재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운동성을 강화해야 한다"(2011년 3월, 민주개혁모임 창립식)고 강조했다.
 
김근태는 시대가 낳은 영웅이었고, 영웅 김근태는 세상을 바꿨다. 김근태 선배는 눈을 감았지만 김근태의 길, 즉 민주화의 길, 조국통일의 길,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의 길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김근태 선배는 우리에게 영원히 '희망의 근거'이다.
 
김근태 선배의 영면을 기원한다. 인재근 형수, 아들 병준, 딸 병민과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선배님 가신 날 아침
 
민청련동지회 회장 최경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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