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631.html
“용서하도록 기도”했던 김근태, 이근안 특별사면까지 건의
[하니Only] 김도형 기자 등록 : 20111230 11:47 | 수정 : 20111230 12:11
2005년 경기도 여주교도소에서 이근안 옥중면회
이근안 “정말 그릇 큰 양반…용서 빌자 포옹해와”
≫ 수사대상자들을 불법 감금.고문한 혐의로 수감됐던 이근안씨가 2006년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와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 자료사진
설 연휴 전날이었던 2005년 2월7일 경기도 여주교도소 면회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하나가 펼쳐졌다.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1985년 9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17일간 매일 5시간 동안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을 고문한 혐의로 영어의 몸 신세가 된 이근안 전 경감을 찾아가 옥중면회를 한 것이다.
각 언론은 “이근안 전 경감은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고 참회를 빌었다”고 역사적 만남을 크게 보도했다.
‘짐승의 시간’을 통과한 민주화운동의 대부가 “민주화가 되면 네가 나한테 복수를 하라”고 비아냥댄 고문기술자에게 복수대신 용서를 택한 장면은 누가봐도 ‘멋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근태 전 장관은 20년 전 자신의 행위를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고문기술자를 만나고 온 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인 2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런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 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끝임없는 의구심이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나는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지나가고자 한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리고 있다”면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지금 나는…”고 끝을 맺었다.
그는 애초 이근안 전 경감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당시 학력위조 혐의로 여주교도소에 수감된 이상락 전 의원에 대해 “상당한 연민을 갖고 있던” 그는 가는 길에 이근안을 만나는 게 어떠냐는 비서진의 제안을 받고 마지못해 그럼 본인의 의견을 묻고 좋다고 하면 만나겠다고 해서 성사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의원이 언론에 귀뜸하는 바람에 사흘 뒤 뒤늦게 공개됐다.
≫ 목사 안수를 받고 있는 고문기술자 이근안.
이에 대해 이근안씨는 지난해 1월 <일요서울>과 한 인터뷰에서 김 전 장관에 대해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면서 “(옥중면회)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씨는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면서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김근태씨에 대한 전기고문에 대해서도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이라고 부인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뒤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면서 그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출소 뒤 이근안씨는 2008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김근태 전 장관이 고문당한 지 3개월가량 지난 19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고문받은 사실을 진술한 내용은 “건전지 두개로 겁만 주었다”는 이근안씨의 주장과는 사뭇 다르게 너무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9월5, 6일 한차례식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의 장례식이다’ 이런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씩 받았습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 옥사)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를 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 사람은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고문을 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하라. 여기에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를 했습니다. 결국 9월20일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25일 마침내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만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뒤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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