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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별세…“전두환‧이근안‧정형근은 잘 살아”
네티즌 “고문 트라우마에 수술도 거부…이게 예술이냐!”
민일성 기자 | newsface21@gmail.com  11.12.30 09:36 | 최종 수정시간 11.12.30 11:42      
 
ⓒ 김근태 상임고문 미니홈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64세의 나이로 30일 오전 5시 31분 타계했다. 

김 상임고문은 2006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아왔으며 지난달 29일 뇌정맥에 혈전이 발견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뇌정맥혈전증은 뇌의 정맥이 막혀 뇌에서 나온 혈액이 심장으로 잘 운반되지 못하는 증상으로, 심하면 뇌출혈 등을 일으킨다. 80년대 재야 운동 당시 받았던 살인적인 고문 후유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 상임고문은 12월 10일 딸 병민(29)씨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병을 앓아오다 29일 갑작스러운 장기 기능 저하로 중태에 빠졌었다. 기계 장치로 강제 호흡을 하다 결국 이날 새벽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김 고문은 서울대 경제학과 65학번으로 71년 서울대 내란 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수배된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을 지냈다.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인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당시 고문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 경감 등에게 무려 11차례의 전기고문, 물고문을 받는 등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후 김 상임고문은 콧물흘림과 손떨림, 단기기억 상실 등 극심한 고문 휴유증상을 보여왔다.

20여일 동안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 김근태 상임고문은 변호인접견실까지 기어나오는데 30분이 걸릴 정도로 몸이 걸레가 되었지만 그 상태에서 몸에 남아있던 피딱지를 근거로 고문일시, 방법, 가해자를 기억해 고발하고 끝까지 싸웠다. 

김 고문과 부인 인재근씨는 독재정권의 고문 사실을 폭로해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독일 함부르크 재단에 의해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됐다. 

김근태 상임고문의 타계소식에 트위터에는 애도 멘션이 쇄도했다. 특히 김 고문의 살인적인 고문과 후유증이 재주목되면서 고문을 행했던 당사자와 관련자들에 대한 분노가 쏟아졌다. 

소설가 공지영씨는 “김근태님 편히 가십시오. 다시는 고문도 없고 독재도 없고 가증스러운 꼼수들도 없는,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곳으로! 가셔서 아직도 이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주소서”라고 애도했다. 

공 씨는 “고문한 이근안과 그걸 지시한 독재자는 떵떵거리고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고문당한 김근태님이 끝내 저렇게 돌아가신 사실과 왕따는 결코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BBK 당사자는 권좌에 앉아있고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의혹을 제기한 정봉주가 감옥에 있는 것도 같습니다”라고 울분을 표했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씨는 “[근조] 김근태 전의원 별세. 명복을 빕니다. 요즘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은 별 의미 없는 ‘비유’가 되어버렸지만, 자유를 위해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이 계셨음을 잊지 맙시다”라고 멘션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김근태 의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무척 슬픈 아침입니다”라며 애통함을 감추지 못했고 같은 당 노회찬 공동대변인은 “이게 웬일입니까? 아침 5시에 김근태 선배님 생각하며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 제발 일어나시라고 트윗글을 올렸는데 5시 31분에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이군요. 황망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군요. 잘 가시란 말이 아직은 나오지 않습니다”라고 슬픔을 드러냈다. 

춘천 MBC 박대용 기자는 “전두환-정형근-이근안”, “전두환 정형근 이근안... 이들은 살아있다”라고 김 상임고문의 살인적 고문과 연관 있는 세 사람의 이름을 거듭해서 멘션했다. 박 기자는 “지금의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우리 대신 희생을 치른 분들을 위해 오늘 하루 잠시라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이라고 트위터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이정렬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김근태 의장님. 너무나 마음 아프고 죄송합니다. 의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뜻하신 일 꼭 이루시기를”이라고 애도했다. 

명까교 교주 ‘사라볼레’는 “고문 피해자 김근태 의장은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했고 그 가해자들인 이근안, 정형근, 전두환 등은 천수를 누리며 산다… ‘도가니’는 진행형이다”라고 분노를 표했다. 

또 그는 “박정희, 전두환이야 말로 ‘고문 시대’를 낳은 장본인… 박정희의 딸래미가 다음 대통령을 한다고 난리고 전두환의 사돈은…현직 대통령이다, 부자로 살아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는 “[민주당은 김근태 의장의 죽음을 성찰하라]이근안이 고문을 예술이라고 말하고 그 지시자 정형근이 권력을 누리고 이들의 수괴 전두환이 잘 처먹고 사는 세상…민주당, 당신들의 책임도 돌아보라…지금 이 순간에도…”라고 정치권에 일갈했다. 

명진 스님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영국 거사는 “적어도 오늘 하루, 불교는 사이비다! 김근태는 갔고, 그를 고문한 짐승은 목사로 살아 남아 애국과 예술 운운 한다. 인과응보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한탄했다. 

트위터에는 “김근태씨는 고문후유증으로 얻은 병들이 있었지만, 수술대에 올라가면 칠성판에 올라가는 것 같다며 수술을 거부해 왔고, 의사가 마취를 하려 하자 떨며 눈물을 보였어요.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를 남기는 게 예술입니까. 말이라고 다 말인가요. 이근안 XXX야”, “김근태 의원을 고문한 이근안(목사), 지시한 정형근(전 건보공단 이사장), 전두환이는 잘먹고 잘살고 있다. 이게 바로 개신교인들이 말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인간세상인가? 이근안이 진정 회개했다면 고문예술 개소리에 대해 엎드려 사죄하고 조용히 살아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김근태의 고난을 먹고 자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엔 김근태가 있습니다. 살면서 두렵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다고 느낄 때 우리 모두는 그를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내가 김근태 고문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한다면, (가)직접사인: 뇌정맥혈전증, (나)중간선행사인: 파킨슨병, (다)선행사인: ‘고문’이라고 써넣고야 말겠다”, “전공의 시절 첫 신체감정서는 총학생회장 출신 남성의 고문 후 생긴 정신장애에 대한 것이었다. 수술대에 오르는 것이 두렵고 마취가 무서워 우셨다던 김근태 선생님. 우리가 그분의 정신적 고통 하나하나까지 어찌 다 알까..이제는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등의 의견이 이어졌다. 

한 트위터러는 “85년 12월19일 김근태 법정진술. 법정은 눈물바다였다. 발가벗겨진 채 전기고문과 물고문, 집단폭행으로 23일간 짐승의 시간을 보냈던 참혹한 기록”이라며 85년 12월19일 김 상임고문의 당시 법정 진술을 올렸다. 해당 멘션은 ‘폭풍알티’ 되고 있다. 

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김근태 전 장관이 한 진술입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9월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 운동 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하는것을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김 고문을 직접 고문한 이근안 전 경감(73. 현 목사)은 지난해 2월 시사주간지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만 주었기 때문에 고문이 아니”라며 자신의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주장했었다. 30일 김근태 상임고문의 별세 소식에 주요 포털사이트와 SNS에는 ‘김근태 별세’, ‘이근안’, ‘파킨슨병’ 등이 실시간 이슈 검색어에 오르는 등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고문만행이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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