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3160001
질지왕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가락국(금관가야) 제8대 왕
생몰년 : ?-492
재위년 : 451-492
일반정보
가락국(금관가야) 제8대 왕으로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제7대 취희왕(吹希王)이고 어머니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 인덕(仁德)이다. 취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기간은 451년부터 492년까지이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고, 아들은 제9대 겸지왕(鉗知王)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에는 질지왕에 대해 김질왕(金銍王)이라는 이칭과 아버지와 어머니, 즉위년과 다스린 햇수만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의 맨 뒷부분에 붙어 있는 가락국 세계(世系)에는 “질지왕은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하며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였다. 이듬해에 세조(世祖: 수로왕)와 허황옥(許黃玉) 왕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만났던 곳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창건하고, 전(田) 10결을 바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治世) 42년인 영명(永明) 10년(492) 임신 10월 4일에 붕(崩)하였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이고,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 創寺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라고 하여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두 기록에 따르면 질지왕은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불렸는데, 이에 대해서는 질지왕의 지(知)를 신지(臣智)나 질지(叱知: 좌지왕의 이칭) 등에서 쓰인 것과 같은 존칭으로 보고, 본래는 “질왕(銍王)”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측한 견해가 있다. 즉 질지왕에 대한 본래의 기록은 “一云銍 金氏” 또는 “一云金銍 金氏”였을 것이나, 이것을 왕력과 『가락국기』에서 “銍知王 一云金銍王”이라고 고쳐서 기록했다는 것이다.(村上四男, 1978)
질지왕의 재위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왕력과 『가락국기』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 즉위년은 신묘년=원가(元嘉) 28년(451)으로 일치하지만, 다스린 햇수는 각각 36년과 42년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에는 제9대 겸지왕의 즉위년이 임신년(492)으로 기록되어 있고, 『가락국기』에도 겸지왕이 영명(永明) 10년(492)에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가락국기』의 “42년” 기록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가락국기』의 가락국 세계(世系)에는 질지왕이 재위 2년(452)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사(王后寺)를 창건하고 전(田) 10결을 주어 비용으로 쓰도록 했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권3 탑상4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도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壬辰)에 왕후사를 창건하였으며 지금(『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까지 복을 빌고 남왜(南倭)를 진압하는 역할을 한다고 되어 있다.
왕후사의 창건과 연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조의 본문에 더욱 자세히 전한다. 그에 따르면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이 정사(政事)에 부지런하고 간절히 불법을 숭상하였는데, 원가(元嘉) 29년 임진(壬辰)에 세조(世祖: 거등왕)의 어머니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와 황후가 합혼(合婚)한 곳에 왕후사라는 절을 세우고, 사자(使者)를 보내 전(田) 10결을 바쳐 삼보(三寶)의 공양 비용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그 후 500년이 지나 장유사(長遊寺)를 세우고 전시(田柴) 300결을 바쳤는데,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표(標) 안에 있으므로 왕후사를 없애고 전장(田莊)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후사 창건에 관한 전승이 이처럼 구체적이므로, 질지왕 2년(452)의 왕후사 창건은 대체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왕후사 창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를 가락국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로 보면서 이때에 처음으로 가락국에 불교가 수용되었다고 보는 견해(김영태, 1990)와 가락국에는 일찍이 불교가 들어왔으나 그동안 일부 계층에 개인적인 종교로만 전해지다가, 이 시기에 비로소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왕실의 불교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홍윤식, 1992)가 있다.
한편 질지왕을 『남제서(南齊書)』에 보이는 “하지왕(荷知王)”과 동일인물로 보기도 한다. 즉 『남제서』 권58 열전39 만동남이(蠻東南夷) 가라(加羅)조에는 건원(建元) 원년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 방물을 바쳤고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으로 삼았다(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 可授輔國將軍本國王)는 기록이 있는데, 하지가 남제에 사신을 보낸 건원 원년(479)은 질지왕대에 해당되므로, 하지왕은 곧 질지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村上四男, 1978) 그러나 하지왕은 제9대 겸지왕(今西龍, 1937) 또는 대가야의 왕으로 여겨지기도 하므로(천관우, 1989) 이를 곧 질지왕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질지왕은 영명(永明) 10년(492) 임신(壬申) 10월 4일에 죽었다. 질지왕과 왕비 김상(金相) 사간(沙干)의 딸 방원(邦媛) 사이에서 낳은 아들 겸지(鉗知)가 질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7, 『朝鮮古史の硏究』, 近澤書店.
村上四男, 1978, 『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김영태, 1990, 「駕洛佛敎의 傳來와 그 展開」 『佛敎學報』 27,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홍윤식, 1992, 「伽耶佛敎에 대한 諸問題와 그 史的 意義」 『伽耶考古學論叢』1,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왕력)
第八 銍知王 [一云金銍 (父吹)希 母仁德 辛卯立 治三十六年]
제8 질지왕 [김질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취희왕이고 어머니는 인덕이다. 신묘년에 즉위하여 36년간 다스렸다.]
第九 鉗知王 [父銍知王 母邦媛 壬申立 理二十九年]
제9 겸지왕 [아버지는 질지왕이고 어머니는 방원이다. 임신에 즉위하여 29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가락국기)
駕洛國記[文廟朝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銍知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한다. 김씨이다. 영초(永初) 2년(421)에 즉위하였는데, 치세는 31년이며,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角干)의 딸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에 즉위하여 다음해에 세조(世祖)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조와 왕후가 처음 만났던 곳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고 이름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 치세는 42년이며, 영명(永明) 10년 임신(任申, 492)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금상(金相) 사간(沙干)의 딸인 방원(邦媛)인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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