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가 큰 소리로 연설할 수 없었던 까닭은?
영원한 '선배'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을 추모하며
11.12.31 17:04 ㅣ최종 업데이트 11.12.31 17:04 고상만 (rights11)
▲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64세로 별세한 가운데,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영정사진이 놓여져 있다. ⓒ 유성호
2007년, 당시 열린우리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열기를 더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경선에 출마한 김근태 당시 의장을 지지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의장님이 경선 연설에서, 그리고 토론회에서 왜 좀 더 자신있게 하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정동영 후보처럼 큰 소리로 당당하게 연설을 해야지 왜 말투도 어눌하고 소리도 작냐는 식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의장님의 성품이 온화한 것은 좋은데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에서도 이러면 되냐느니, 또는 삼수갑산을 가더라도 큰소리를 뻥뻥 쳐야 하는데 아쉽다느니 하는 말들이 참 많아지던 때였습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따라서 바닥의 흐름 역시 더욱 비관적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감은 정말 김근태가 맞는데 아무래도 어렵겠다. 저런 식으로 연설해서 어느 국민이 후보를 지지하고 확신을 갖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빨리 핵심 참모에게 이런 여론을 알려 지금이라도 바꿔야 한다는 다양한 말들이 김근태 의장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떠 돌았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저 역시 전화를 했습니다. 의장님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있던 선배에게 "제발 연설할 때 큰 소리로, 당당하게 연설 좀 하시도록 말씀 좀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런 불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진 선배의 말은 놀라웠습니다.
고문으로 시달린 지난 26년의 삶, 김근태의 손수건
그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선배는 제 말에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우리도 알지. 그런데 문제는 의장님이 큰 소리로 연설을 할 수가 없어."
"아니 왜요? 그럼 여태 정치 연설을 그런 식으로 하셨다는 거예요?"
진실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이 역시도 바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1985년 8월, 민청련 활동과 관련하여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한 의장님을 간첩으로 조작하려는 음모였습니다. 그리고 알려진 것처럼 허위 자백을 강요하며 이근안은 의장님을 상대로 8번에 걸친 극심한 전기고문과 2번의 물고문을 가했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물고문 치사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의장님이 연설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고문 때문이었습니다. 고음으로 연설을 할 경우 콧물이 흐르고 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연설을 하며 늘 손수건을 준비해야 했다던 그 아픈 '숨겨진' 비밀을 들으며 그분이 감당해야 했던 그 비극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저는 새삼 깨달아야 했습니다.
▲ 2007년 10월, 제17대 대통령선거 대통합민주신당 중앙선대위 발대식에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오른쪽 끝)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 권우성
아내의 생일 축가 <사랑의 미로>가 슬픈 이유
민주화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장님은 영원한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인 인재근씨는 '형수'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던, 적던 후배들에게 그는 '김근태 선배'와 '인재근 형수'로 불렸습니다. 이 두 분의 눈물겨운 사랑 이야기는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두 차례에 걸쳐 5년 8개월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의장님이 아내인 인재근씨와 어린 자식들에게 쓴 편지를 모아 묶어낸 옥중 서간집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가 그것입니다.
1992년 출간된 이 책에서 의장님은 사랑하는 가족과 어린 아들, 딸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은 분이 바로 의장님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교도소로 면회온 아내를 위해 불러줬다는 가수 최진희씨의 노래 <사랑의 미로>입니다. 이근안으로부터 당한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몸인데도 불구하고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선물로 불러줬다는 그 노래를 들으며 인재근씨는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면회가 끝나고 되짚어 오는 길에서 아내 인재근씨가 흘린 하염없는 눈물은, 그래서 그 사연을 접한 이들에게 또 다른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의장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던 여느 정치인과 다른 따스함이 있었고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장님은 늘상 악수를 나누며 눈을 맞췄습니다. 그러면서 개개인에 대해 조그마한 변화나 느낌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누구처럼 그저 앞 사람에게만 손을 내밀면서 눈은 다음에 악수할 사람을 바라보는 건성이 아니라 의장님은 나와 손잡고 있는 그 사람과 눈을 맞추며 한마디씩 안부를 묻었습니다. 바로 의장님이 사람을 대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을 대하는 따스한 관점은 어쩌면 의장님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고문한 이근안이 사과했는데 자신은 그것이 가식처럼 느껴져 솔직히 용서할 수 없었다며 "이런 내가 옹졸한 것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근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문이 아니라 심문이며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고, 당시 시대상황에선 애국"이라는 괴변을 늘어놓고 더 나아가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는 말을 내뱉었습니다. 의장님의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증거입니다. 참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요.
웃을 자신이 없어 '조지지도 못하는' 정치인, 김근태
"2002년 (대통령) 경선 때 (후보) 9명이 한 줄로 앉아 있으면 한 명씩 나가 연설을 하고 들어왔다. 차례로 나가 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신나게 조지고, 뒤돌아서선 웃으면서 악수하고 자리에 앉더라. 나는 신나게 조지지도, 웃으면서 악수하지도 못하겠더라."
의장님 타계 후 트위터에 오른 의장님의 말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누구보다 무섭게, 그리고 단호하게 맞서 싸워온 그였지만 단상 위에서 누군가를 향해 소위 '조지고' 바로 웃으며 악수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김근태는 이런 분이었습니다.
다시 2008년 가을 어느 날입니다. 제가 의장님과 관련해서 꼭 남기고 싶은 그날의 기억입니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의장님은 '아시는 것처럼' 낙선했습니다. 지역구의 모든 곳에서 다 이기고 마지막으로 개표한 '뉴타운 개발 예정'지역구의 투표함에서 쏟아진 당시 신지호 한나라당 후보를 향한 몰표가 결국 1200표 차의 낙선 이유가 되었습니다.
의장님의 낙선은 안타까움과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민주주의 대표 주자'인 김근태와 '뉴라이트 대표 주자'인 한나라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점은 국회의원 의석 하나를 잃었다는 산술적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행한 단어가 '지못미'였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말의 약어인 '지못미'가 세상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당시 의장님의 낙선은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김근태가 버스를 타며 생각한 '함께 살자'
▲ 2008년 총선 당시 서울 도봉구 쌍문역 인근의 김근태 의원 선거사무소 모습 ⓒ 선대식
그때 즈음, 의장님이 대표로 있었던 정치 조직인 '한반도재단'에서 회합이 있었습니다. 사무실 이전과 관련한 회의가 끝난 후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겸한 회식을 하기로 했는데 의장님도 참석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낙선 후 처음 뵙는 자리였기에 어떻게 지내시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애초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어지기에 보좌관으로 있던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배는 버스를 타고 오시는데 길이 밀리시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의장님에게 차가 없어요?"
비록 선거에서 낙선했다고는 하나 차 한 대 쓰지 못할 정도로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아놓은 돈도 없고 숨겨놓은 돈도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는 그 선배의 담담한 말이었습니다. 정직한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일인데도 저로서는 괜히 화도 나고 민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을 함께 들은 참석자들 역시 새삼 놀라며 약간은 우울하게, 또는 즐겁지만 어색하게 이후 도착한 의장님과 술잔을 나눴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1차 자리가 끝난 후 의장님은 집으로 돌아간다며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배웅을 위해 일행들이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가던중 누군가가 "이건 아닌 것 같다. 차를 마련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고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의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네들 말은 고마운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예전에는 자가용을 탔을 때 차에 타서 늘 혼자 나라만 생각하고 정치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요 근래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부터는 그게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게 되더라구. '내 옆에 앉아서 가는 저 사람은 어떻게 먹고사나? 저 사람하고 내가 같이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솔직히 난 지금이 더 좋은 것 같아. 너무 큰 것만 생각하고 내 주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는데 반성도 많이 하고. 그러니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자네들과 내가, 또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구."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마음이, 그 진정성이 그대로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후 내내 저는 의장님의 그 날 말씀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선배' 김근태 의장님, 사랑합니다
그날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손을 흔들던 의장님의 미소는 저에게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따스한 기억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의장님의 그 말씀을 꼭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살자'는 그 마음이 바로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자신의 몸과 영혼을 바쳐 남기고 싶었던 이 세상의 메시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글이 추모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의장님의 위중 소식을 접한 한 달 전부터 불안한 마음이었는데 끝내 그것이 부고 소식이 된 것입니다.
"2012년을 점령하라."
사실상의 유언이 된 이 말씀을 되새기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각자의 조건과 상황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단순한 권력의 변화가 아닌 '함께 먹고살자'는 의장님의 그 말씀처럼, 우리의 이웃과 내가 '다 같이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일하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던 김근태 선배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답게 잘 사셨습니다.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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