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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수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주몽이 궁실 대신에 집을 지은 곳으로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조에는 “졸본주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至卒本州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1 시조 동명성왕조에서는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으므로 다만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고 하였다.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 주몽이 도읍한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생각하는 입장에서 지금의 혼강(渾江)을 비류수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서길수, 1994) 

오녀산성의 동쪽에 부이강이 있는 것에 주목하여 부이강을 비류곡에 비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몽이 도읍했던 홀본(忽本)이 곧 졸본(卒本)이라 의식하여 오녀산성과 홀본, 졸본을 같은 곳이라 하고 부이강을 비류수로 보았다.(東潮, 田中俊明, 1995) 비슷한 관점에서 비류수가 혼강을 지칭하지만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의 경우에도 “부이(富爾)”와 “비류(沸流)”는 그 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비류수라 불렸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하였다.(노태돈, 1999) 

비류수 유역에 있는 비류국에 대해서 부이강 및 혼강의 합류처 일대에 존재한 정치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비류(沸流)”라는 표현이 물이 여울져 소리가 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란 점에 주목하여 그러한 특징이 부이강과 부합하다고 여긴 데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비류수는 부이강 및 혼강이 합류한 이후의 혼강을 포함한 강으로 비정하였다.(조법종, 2007)

참고문헌

서길수, 1994, 『고구려성』, 한국방송공사.
東潮․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노태돈, 1999,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의 역사 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조법종, 2007, 「고구려 초기도읍과 비류국성 연구」『白山學報』7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고구려)

高句麗
高句麗 卽卒本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有産子 名曰夫婁 今據此記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棄之與犬猪 皆不食 又棄之路 牛馬避之 棄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減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 將謀害之 蒙母知之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是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稟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 乃夫婁王之異稱也]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 화주 또는 성주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다. 『국사』고려본기에 이르기를 “시조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며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이미 동부여로 피한 뒤 부루가 죽은 후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인데 여러 아우들과 나와 놀고 있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였다.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강가의 집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단군기에서는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한 뒤에 주몽을 낳은 것이다. 단군기에서는 아들을 낳아 부루라 이름하였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가 다른 형제인 것이다] 부모가 중매 없이 사람을 따른 것을 꾸짖어 마침내 이곳으로 귀양가서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깊숙이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췄다. 몸을 이끌어 피하니, 해그림자가 또 쫓아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잉태하여 한 개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만 하였다. 왕이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나이 겨우 일곱 살에 매우 영리하고 보통과 달라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번 쏘면 백번을 다 맞추었다.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금와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지 않고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마를 알아보아 적게 먹여 수척하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왕의 여러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장차 해하려고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알고 말하기를 “국인이 장차 너를 해하려고 하니 너의 재략으로 어디를 간들 못하겠는가? 마땅히 속히 도모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이 오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가다가 엄수[지금은 자세하지 않음]에 이르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데 쫓는 자가 거의 미치니 어찌하랴?”고 하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너자 다리가 없어지니 뒤쫓던 기병이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주[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하였으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고 다만 초가를 비류수 가에 엮고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하고 햇빛을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성을 삼았다] 이 때 나이 12세였으니 한 효원제 건소 2년 갑신(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왕이라 칭하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에는 21만 5백 8호였다. 주림전 제21권에는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였는데 점쟁이가 점을 쳐 말하기를 ‘귀하여 왕이 된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자식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시비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로부터 와서 그 때문에 내가 임신한 것이다’고 하였다. 아이가 태어남에 미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먹이어 죽지 않더니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고 하였다.[곧 동명제가 졸본부여왕이 된 것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별도이므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는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환인의 자연환경 - 동북아역사넷  https://tadream.tistory.com/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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