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1&artid=20130130114454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한반도, 670년간 중국·일본의 속국이었다?
| 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

“대동강 남쪽 강변에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습니다.”

1909년 10월, 통감부 고건축 촉탁이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세키노는 당장 다른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이 군집해 있었다. 세키노 일행은 서둘러 고분 2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굴 결과는 흥미진진했다. 벽돌(塡)로 만든 무덤방에서 청동거울 2점과 각종 무기, 토기, 그리고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이 ‘석암동 전실분’이다. 발굴유물둘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1월 말, 도쿄대 교수인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와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이끄는 발굴단도 똑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다.(석암동 을분) 이곳에서는 ‘王×’명 칠기부속금구와 청동거울, 금동식기, 귀고리, 팔찌 등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 역시 일본으로 반출된 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됐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평양 대동강변 고분 2기를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와 하기노 발굴팀의 판단은 둘 다 ‘고구려 고분’이라는 것이었다. 발굴자들은 평양이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선입견’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10년 2월,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즉각 반론을 폈다. 1903년과 1905년, 자신(도리이)이 지안(集安)에서 확인한 고구려 고분들과 이 석암리 고분의 구조는 명백하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특히 벽돌로 만든 전실묘(塼室墓)가 중국 한나라의 무덤과 흡사하며, 출토유물 역시 랴오둥(遼東) 지역의 한나라 무덤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도리이는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평양 대동강변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제 허리띠. 가운데 큰 용이 꿈틀거리고 그 주위에 작은 용 6마리가 바짝 붙어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쏟아지는 낙랑유물 

그로부터 2년 뒤인 1912년, 인류학자 이마니시 류가 ‘고구려설’을 폐기하고 도리이의 학설을 좇아 ‘낙랑설’을 제시한다.

자신이 1909년 발굴한 석암동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속금구의 명문, 즉 ‘王×’ 명을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것이다. <후한서> ‘왕경전’을 보자.

“왕경은 낙랑 남한인이다. 왕경의 8세조는 왕중(王仲)이라는 인물이었다. 제북왕 흥거가 반란을 난을 일으키면서 왕중에게 병사를 맡기려 했지만, 왕중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바로 동쪽바다를 건너 낙랑 산중으로 달아났다. 이에 낙랑군에서 집안을 이루게 되었다.”

낙랑 왕씨가 바로 <후한서>에서 일컫는 왕중-왕경의 집안이라는 것이다. 도리이의 ‘낙랑설’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키노도 슬그머니 ‘낙랑설’을 개진한다.

세키노는 1913년, 이마니시와 짝을 이뤄 대동강 남안에 밀집한 고분군의 정가운데에서 낙랑토성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을 비롯한 와당과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封泥·문서류 등을 봉함할 때 쓴 점토) 등이 발견됐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됐다. 일본학계는 열광한다. 낙랑이라?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세운 한사군의 하나가 아닌가. 313년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일제는 본격적으로 나선다.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본격적인 고적조사사업을 펼친다. 일단 한사군을 으뜸가는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이 때 작성된 ‘조사개요’를 보면 “한치군(漢治郡), 즉 한나라 식민지가 된 한사군(漢四郡) 지역을 주로 조사한다”고 기록돼 있다.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


1931년 평남 대동군 남정리 박랑고분 발굴현장. 일제는 한국문화의 타율성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낙랑고분을 집중 조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正毅)의 1918년 <경성일보> 인터뷰를 보자. 일제가 왜 낙랑고분 조사에 집중하는지 그 단편을 읽을 수 있다. “우리 일본인이 저들(조선인들)에게 대화혼(大和魂)을 심어주지 않은 채 저들이 우리의 문명시설 덕분에 지능을 개발하고 널리 세계의 형세에 접하게 되는 날에 이르러 민족적 반항심이 타오르게 된다면 이는 큰 일이다. 대개 조선통치의 최대난관이 된다. 조선연구에 하루라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데라우치는 이어 “때문에 저들의 민족정신을 어디까지나 철저히 조사해야 하며 조선인의 민족심리와 정신생활까지도 두루 이해하지 않으면 헛수고”라고 강조한다.

이 때의 조사대상 고분은 황해 64기, 평남 186기, 평북 50기 등이었다. 이 가운데 조사된 낙랑 유적은 평남 대동군·용강군·순천군, 대동강면 고적군·정백리·석암리에 있는 고분 10여기였다.

특히 석암리 9호분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허리띠(교具·국보 89호)와 ‘거섭(居攝) 3년명(서기 8년)’ 칠반(칠기로 만든 쟁반) 등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야로도 눈 돌린 일제

일제가 눈을 돌린 곳이 또 있었다. 바로 가야지방이었다. 가야는 고대 일본의 식민지라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믿었던 곳이었다.

알다시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은 369~562년 사이 야마토(大和) 정권이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한반도 남부지역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세워 200여 년 간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1906년부터 일제는 이마니시와 세키노·도리이 등을 파견한다. 이들은 앞다퉈 창녕·고령·함안·김해·성주·선산 등 임나일본부의 유력후보지를 발굴했다. 1912년 4월 도쿄대는 일본으로 반출한 가야유물들을 대상으로 제4회 전람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견강부회했다. “상대(上代)의 우리 영토인 임나연방 유적의 일부가 처음으로 상세하게 학계에 소개됐다”면서….

임나일본부를 확인한 것 같은 설명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1915년 일본사 전공자인 구로이타 가쯔미(黑板勝美)도 도쿄대의 명령을 받고 김해지역을 집중 발굴한다. 그 역시 임나일본부의 물증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는 우선 “일찍부터 일본과 조선이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 고 규정했다. 한·일 합병의 합법성을 고대사에서 찾은 것이다. <매일신보> 1915년 7월24일자 보도를 보자.


‘낙랑예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수막새.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조선은 내궁가(內宮家·서기 209년 일본이 신라정벌 후 설치했다는 관청)를 둔 곳이고, 조정의 직할지가 되어 일본의 영토가 된 일이 있다. 한국병합은 임나일본부의 부활이니~동국동문화(同國同文化)라는 사상이 잇으면 화합이 될 터로다 하는 것이 요점이 되얏더라.”

■ 흔적도 찾지못한 임나일본부

구로이타는 가야고분의 조사목적을 ‘임나일본부의 확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1915년 10월19일 도쿄대 고고학회 10월 월례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의한 사항은 산성과 고분의 관계이다.고령·진주·고성·창녕·함안 지방의 경우~ 나아가 일본부가 어느 곳에 있었는 가를 철저하게 연구하게 됐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부는 최초에 김해·함안에 있었다고 한다.”(<고고학잡지> ‘제6권 제3호’)

하지만 일제는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지 못한다. 구로이타조차 발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막상 일본부라고 해도 조선풍인 것이 틀림없다. 조사결과 함안·김해는 모두 일본부 소재지라고 추정할만 하나, 그 자취는 이미 사라져서 이것을 찾을 방법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일제는 가야고분 뿐 아니라 영산강 유역의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옹관이 북규슈 지방의 옹관과 유사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또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즉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하나임을 밝히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한국 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낙랑고분에서 나온 청동거울. 칠기로 만든 상자에 보관되어 다른 화장도구들과 함께 부장됐다. | 오영찬 교수 제공

■내선일체의 관념을 표명한 문화재들

“특히 금번 지정되려는 것은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히 표명하는 것이라하야 주목을 끄을고 있다.”

1938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이다. 조선총독부는 제4회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전회 총회를 열어 모두 101종의 문화재를 보물·고적·명승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러면서 지정된 문화재들을 ‘내선일체의 상징물’이라 표현했다. 이 때 지정된 ‘고적’의 상세내역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창녕 목마산성·화왕산성, 김해 분산성, 함안 성산성, 김해 분산성·전 수로왕릉·수로왕릉비·삼산리 고분, 고령 지산리, 창녕 고분군 등 9곳을 고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면서 ‘임나관계 고적’이라는 설명을 달아놓았다. 이밖에 일본의 유적과 유사한 나주 신촌리·대안리·덕산리 고분 등 이른바 ‘반남고분’ 지역도 북규슈 지역과 유사한 유물이 나온다고 해서 ‘고적’으로 지정됐다. 일제가 어떤 마음을 품고 낙랑과 가야고분,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반남고분(3세기~5세기)까지 고고학 발굴조사에 총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660년 동안 식민지였다?

분명하다. 그것은 한반도의 북쪽은 기원 전 108년부터 기원 후 313년까지 한사군의 지배를, 남쪽은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임나일본부와 북규슈)의 지배를 받았음을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660여 년 동안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키노의 언급(1941년)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조선은 중국과 왕래가 쉬워 일찍부터 그들의 문화를 수입하였고~일면으로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문화를 일본에 수출하였고, 다소 일본의 감화도 입었다.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 문화의 은혜를 입었고 그 침략을 받아서 항상 그에 복속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때때로 일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38년 11월26일자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101종의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내선일체의 관념을 적확하게 표명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세키노는 “조선은 국가로서 영토가 협소하고 인민이 적어 일본이나 중국에 대항하여 완전히 독립국을 형성할 실력이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자연히 사대주의와 퇴영 고식주의에 빠져 국민의 원기도 차츰 닳아 없어지기에 이르렀다.”(세키노의 <조선의 건축과 예술>)

그러니까 ‘조선은 영원히 남의 나라 속국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식민사관, 즉 정체성과 타율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에 남아있는 식민사관 증빙자료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상당량의 낙랑유물이 소장돼있다. 박물관 안경숙 학예사는 “박물관 소장 낙랑유물은 1만7400여점이 이른다”고 밝힌다. 그 뿐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3만8000여 장의 유리건판사진이 있다.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 등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찍어놓은 민속·인물·고고학 자료들이다. 그 가운데는 전국 각지의 남녀 신체 측정 사진까지 포함돼 있다. 나치가 골상학을 연구, 유태인들을 ‘더러운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치부하면서 절멸을 시도한 것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한 대목이다. 각설하고 이 사진들 가운데 낙랑군 자료는 4500여 장에 이른다. 문헌이나 고고학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네 실정에서 자료가 많다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박물관에 소장된 2만점에 이르는 낙랑자료는 일제에 의해 ‘식민사관의 증빙자료’로 남아있다. 하기야 남아있는 자료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들 역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자료들인 것이다. 현재 낙랑유물 가운데 125점이 박물관 1층 ‘선사·고대관의 부여·삼한실’의 한 편에 ‘석암리 9호’의 출토유물들이 전시돼있다. 박물관의 용산시대를 맞아 아시아관, 즉 중국실과 신안실 사이에 전시됐다가 중도에 수장고로 들어가는 수난도 맞았다. 하지만 지난 11월부터 다시 부여·삼한실에 둥지를 틀었다. 낙랑을 이제 ‘우리 역사’로 취급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오영찬, <낙랑군 연구>, 사계절, 2006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 한국미술사학회, 1973
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1996
이순자, <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숙명여대 박사논문, 2007
정인성, <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연구 재검토-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의 기억1>, ‘호남고고학보’ 제24집, 호남고고학회, 2006
이성주, <제국주의 시대 고고학과 그 잔적>, ‘고문화 47’,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95 


▶필자 블로그 바로가기
<이기환|경향신문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lkh@khan.co.kr>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