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0919


충주·청주에 밀렸던 대전, 급성장하게 된 까닭
[2017 전국일주 - 대전편] '길'이 만드는 대전의 역사
17.09.23 20:21 l 최종 업데이트 17.09.23 21:02 l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지현(diediedie)


▲  대전역. ⓒ 김종성

충청권에서 가장 큰 도시는 광역시 '대전'이다. 지금은 이렇지만, 조선시대에는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충청' 하면 충주와 청주가 가장 흔하게 연상됐다. 도(道) 명칭은 가장 중요한 두 도시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강릉과 원주를 따서 강원도, 전주와 나주를 따서 전라도, 평양과 안주를 따서 평안도를 만드는 식이었다. 충청도도 이런 식으로 탄생했다. 

충청도란 지명이 안 쓰일 때는 공주나 홍성의 앞 글자를 따서 충공도·청공도·공충도·공홍도·충홍도·홍충도가 사용됐다. 지금의 대전을 관할한 공주의 앞 글자를 따서 도의 명칭이 만들어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절에는 대전이라는 행정구역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주 약하게 존재했다.  

'대전'이란 글자가 포함된 조선시대 최초의 행정구역은 대전리(大田里)다. 고종 때인 1872년 제작된 공주 지도에 이 행정구역이 최초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전에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대전'이란 행정구역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대전이란 지역의 위치 자체도 그렇게 중시되지 않았다. 백제 도읍이 공주(웅진)에 있을 때는 그 주변의 대전 지역도 함께 중요해졌겠지만, 이것은 예외였다. 

'길'이 가진 힘... 힘 없었던 대전

대전 지역의 위치가 덜 중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길' 때문이었다. 사람과 물건과 정보를 이동시키는 길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 '힘'을 만들어낸다. 길을 장악하고 있거나 길과 가까운 쪽이 사람·물건·정보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아시아 북부의 초원길이 활발히 이용된 시대에는 이 길을 장악한 중동 및 북아시아 유목민이 영광을 누렸고, 아시아 중부의 비단길이 활발히 이용된 시대에는 이 길을 장악한 중동 및 중국 농경민이 영광을 누렸다. 전 세계 바닷길이 하나로 통합된 16세기 이후의 바닷길 시대에는 대서양 연안의 서유럽이 급격히 강해졌다. 이것도 '길' 때문이다. 집 앞에 도로가 뚫리면 집의 가치가 높아지는 이치가 지역 단위나 국가 단위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지금의 대전 지역은 불리했다. 대한제국 시절에 정부가 편찬한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한양과 부산을 잇는 총연장 960리의 도로는 한성-송파-판교-충주-문경-동래를 연결했다. 대전 지역은 이 노선에서 제외됐다. 

해상의 조세 운송로인 조운로에도 대전 지역은 끼지 못했다. 조운로는 서해안과 한양을 잇거나 남한강과 한양을 이어줬다. 이 루트에 대전 지역은 없었다. 이렇게 육상과 해상 양쪽의 '길'에서 멀리 떨어진 까닭에, 대전 지역은 지금처럼 발달할 수 없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충청도 지도. ⓒ 이상기

앞서 소개한 대전리(大田里)라는 행정구역은 1872년 지도에서 최초로 사용됐다. 이보다 먼저 나온 것은 대전천(大田川)이라는 명칭이다. 1531년에 나온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명칭이 나온다. 대전천은 지금의 대전역 옆을 흐른다. 

대동여지도 제작자인 김정호가 1866년에 펴낸 <대동지지>라는 지리서에는 "대전천은 관전천(官田川)이라고도 한다"고 표기돼 있다. 김정호가 살았을 당시에는 대전천 주변의 넓은 농토가 관전, 즉 국유지였던 모양이다.

대전천이란 지명이 알려진 것은 이곳의 장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대전장(大田場) 혹은 대전시(大田市)라는 오일장이 열렸다. 옛날에는 '대전시'가 행정구역을 뜻하지 않고 '대전 장터'를 의미했다. '대전장'이나 '대전시'는 1859년에 나온 충남 공주 안내서인 <공산지>와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등에 나타난다.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는 대전을 두고 "논밭도 아주 좋고 넓다"라고 평했다. 그래서 한밭이란 명칭을 갖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외부 세계에서는 논밭보다는 장터 때문에 대전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대전 지역은 이렇게 넓은 농경지도 갖고 있고 이름난 장터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국적인 도시로 성장하지 못한 것은 위에서 설명한 이유들 때문이다. 전국적 범위의 육로나 조운로에서 멀리 떨어진 탓이었다. <택리지>에서도 "바다가 좀 멀어서 서쪽의 강경에서 이뤄지는 교역에 의존한다"라고 적혀 있다. 

대전에도 장터가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전국적인 시장 네트워크에 끼지 못했다. 그래서 서해와 연결된 금강 연변의 강경 시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국 네트워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육로든지 해로든지 간에 전국적 범위의 '길'에서 멀리 떨어진 탓이었다. 

서구화 바람과 함께 '쌩쌩' 성장한 대전


▲  증기기관차. ⓒ 위키백과 영문판

이랬던 대전을 일변시킨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불어온 서구화 바람이다. 이 바람과 함께 기차가 들어오고 철도가 깔렸다. 이와 더불어, 대전이 갑자기 승승장구하며 전국적 도시로 급성장했다. 

기차는 자연 조건의 제약을 덜 받는다. 산이 있으면 터널을 뚫고 물이 있으면 다리를 놓아서라도 기차는 달린다. 기차가 중심이 되면서 자연친화적인 기존 육로는 급격히 쇠퇴했다. 문경새재를 통해 연결되던 한양·부산 간 육로도 그래서 쇠퇴했다. 이에 따라, 이 길을 잇던 충청북도와 경북 북부도 함께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충주와 청주의 위상은 이런 이유로 약해졌다. 

충청권의 중심부인 충주와 청주가 쇠퇴하는 가운데, 변방인 대전은 기차와 더불어 '쌩쌩하게' 성장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됐다. 두 철도가 대전을 지나가면서, 이곳은 서울과 영호남을 잇는 거점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대전이 공주·충주·청주를 제치고 충청권 제일의 도시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대한제국 때와 일제강점기 때 대전이 얻은 위상은 지금만 못했다. 두 시기에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루트뿐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루트도 중요됐다. 두 시기에 대전은 서울과 서울 이남을 연결하는 곳으로서만 중요했다. 이때는 강원도 철원의 위상이 대전을 능가했다. 철원은 한반도 중심부에서 남과 북을 잇는 역할을 했다. 그에 비해 대전은 한반도 남부에서만 중심부 역할을 했다. 

대전이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은 남북 분단 이후다. 분단으로 철원의 중개자 역할이 없어지면서 대전의 위상이 더 높아진 것. 대한민국 수도 서울과 여타 지역을 연결하는 허브의 기능을 갖게됐다. 

이런 가운데 대전은 1989년 직할시로 승격되고 1995년 광역시로 개칭됐다. 대전리에서 시작한 대전이란 곳이 기차 및 철도와 더불어 급속히 몸을 불리다가 대전광역시로까지 불어난 것이다. 이렇게 대전은 대한민국 시대 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대운하' 피한 대전, 결과적으로 '다행'


▲  2006년 11월 13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반도대운하연구회 주최 심포지움 '한반도대운하 국운융성의 길'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인사말을 마친 뒤 웃으며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한민국 시대에 대전은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반면, 대전 시민들이 쉽게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큰 위기가 될 뻔한 일도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계획이 바로 그것. 대운하 계획의 핵심은 대전의 위상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이명박은 이렇게 말했다. 

"대운하 계획이란 것은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업의 핵심은 조령에서 두 수로를 연결하는 인공 수로를 만드는 것이다."

조령 즉 문경새재를 통해 전국의 물길을 잇는 게 대운하 계획의 핵심이었다. 이 구상이 실현된다면, 문경새재 주변 지역이 가장 큰 혜택을 보게 된다. 과거에 한양과 부산을 이어준 이 길이 전국 교통의 중심지로 부활하게 되면, 대전보다는 충주나 청주 그리고 경북 북부권 도시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된다.  

그래서 대운하가 활성화되면, 지난 100년간 철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들은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무래도 대전이 가장 큰 치명타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함께 이 위기는 알게 모르게 대전을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대한민국 시대 들어 대전은 수도가 될 뻔도 하고, 위기를 맞을 뻔도 하면서 대한민국 교통 허브로서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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