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71000011
<남한산성> 역사 vs 영화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입력 : 2017.10.07 10:00:01 수정 : 2017.10.07 16:39:51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침입으로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47일 동안 일어났던 일을 다룬다. 영화를 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역사적 배경 지식을 정리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병자호란 1·2>(푸른역사)를 주로 참고했다.
■ 인조는 왜 강화도로 가지 않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을까
청군의 침입에 대비한 조선 조정의 제1 피란 후보지는 강화도였다. 수군과 전함이 없는 청군이 강화도에 쉽게 상륙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는 이미 한 차례 강화도로 피신한 바 있다. 게다가 정묘호란 직후 인조는 강화도 방비를 더욱 강화한 터였다. 그러나 정작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강화도에 들어가지 못했다.
청군은 1636년 12월9일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의 침입 소식은 12월6일 포착됐으나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는 12월13일에야 조정에 도착했다. 당일 열린 대책 회의에서 영의정 김류가 강화도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청군이 내륙 깊숙이 들어올 리 없다며 주저했다. 12월14일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인조는 그제서야 강화도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으나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인조 일행이 숭례문을 통과하고 있을 때 청군이 오늘날의 은평구 녹번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화도로 가려면 한강에서 배를 띄워야 했지만 강이 얼어붙어 배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허탈해했던 청군은 이번에는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사전에 차단했다. 이미 적이 코 앞까지 진격한 상황에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도 부족했다. 최명길이 적장 마부대와 담판을 벌여 시간을 끄는 동안 인조 일행은 겨우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 강화도로 갔더라면 최악은 피할 수 있었을까
조선 조정이 애초 강화도로 피신하려고 했던 것은 수군과 전함이 없는 청군이 강화도에 쉽게 상륙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묘호란(1627) 때만 해도 유효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다. 청은 1636년 명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귀순하면서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오기 직전인 1637년 1월22일 새벽 청은 배 100여척을 동원해 강화도를 공략했다. 방심하고 있던 조선군은 한나절 반만에 무너졌다. 세자빈 강빈과 봉림대군이 붙잡혔다. 강화성 안에 있던 이들은 도륙됐다. 김상헌의 형 김상용은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을 터뜨려 폭사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오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강화도가 무너져 강빈과 봉림대군 등이 포로가 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 최명길은 화친만 주장했을까
영화에서는 최명길(이병헌)이 줄기차게 화친을 주장하고 김상헌(김윤석)은 줄곧 항전을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최명길이 처음부터 화친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전쟁 위험이 한껏 고조되고 있던 1636년 9월5일에 올린 차자(관료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에서 최명길은 싸움을 피할 계책을 마련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공세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조정이 전쟁을 결심할 경우에는 청군이 내륙으로 들어와 큰 피해를 내기 전에 압록강변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명길이 비록 주화론의 입장에 서 있었지만 그 또한 청과의 결전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척화파들의 입장과 서로 통하는 측면이 있었다.”(<병자호란 2>, 73쪽)
■ 근왕병은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대장장이 서날쇠(고수)는 김상헌의 명을 받고 근왕병을 소집하는 밀서를 전달하기 위해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 가까스로 성 밖의 조선군을 이미 형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조선군 지휘부는 남한산성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뒷날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서날쇠를 죽이려 든다. 온다던 근왕병이 나타나지 않자 조정은 절망에 휩싸인다. 실제 역사에서는 근왕병이 출동했다. 다만 상황을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636년 12월26일 강원감사 조정호의 병력 1000여명은 남한산성 부근 검단산까지 진출했으나 다음날 청군과의 교전에서 크게 패했다. 경상감사 심연이 이끄는 병력 8000여명도 출동했으나 1637년 1월3일의 교전에서 패배했다. 충청도 근왕군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전라도 근왕병은 1637년 1월5일 교전에서 청군 5000여명의 공격을 격퇴했으나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철수한다. 평안병사 유림의 근왕병은 청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면서 남한산성으로 이동했으나 물자 고갈 등의 어려움에 처해 인조의 출성(1월30일) 이후인 1637년 2월3일에야 겨우 가평에 도달했다.
■ 김상헌은 자살했을까
실제 역사와 가장 다른 대목이다. 영화에서 김상헌은 할복해 자살한다. 실제로는 목을 매 자살하려다 관헌들이 달려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조정이 남한산성을 나온 뒤 낙향해 고향 안동으로 갔다. 1640년 김상헌은 심양으로 끌려가 구금된다. 강화 후 영의정에 올랐던 최명길도 훗날 심양으로 끌려간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고 한다. 원작자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 개정판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 세 수를 옮겨놓았다.
■ 홍이포의 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영화에서 인조가 근왕병을 기다리는 사이 홍타이지는 남한산성 내 행궁이 내려보이는 위치에서 홍이포를 발사한다. 이 공격으로 성벽이 파괴되고 임금의 처소가 부서진다. 실제로 1637년 1월24일 청군은 남한산성 망월봉 일대에 홍이포를 배치해놓고 하루 종일 포격을 가했다. 포탄이 행궁까지 날아와 천장을 뚫고 바닥에 처박혔다고 한다.
홍이포는 명이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들여온 서양식 화포다. 천계제(명나라 15대 황제)는 서양 화포를 도입해 후금을 제압해야 한다는 서광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30문의 홍이포를 구입해 베이징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다. 홍이포는 포탄의 속도가 빠르고 파괴력이 기존 화포에 비해 월등했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1626년 1월23일 13~20만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 공략의 관문인 영원성을 공격했다. 당시 영원성의 병력은 1만에 불과했으나 명나라 장수 원숭환의 지도력과 홍이포의 위력을 뚫지 못하고 패퇴했다. 이후 청은 명에서 귀순한 화포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홍이포를 자체 제작해 명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했다.
남양주 실학박물관에 전시된 홍이포 복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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