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0092209005
[창간 기획-용산의 미래](2)750년 전 몽골 침입서 청·일 군대 주둔까지…외침 온몸으로 받아낸 ‘수난의 땅’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입력 : 2017.10.09 22:09:00 수정 : 2017.10.09 22: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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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지정학적 특성 탓에 고대부터 숱한 외세 침략을 받아왔다. 그중에서도 서울 용산은 외침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낸 수난의 땅이다.
용산의 명칭은 한양도성 서쪽 무악산(서대문구 안산)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한강변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의 몸통과 비슷하다는 데서 따왔다. 지금은 미군기지와 삼각지, 이태원 등 남산과 한강 사이 지역만 용산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조선시대 ‘둔지산’이 있던 자리다. 옛 한양도성 속 용산은 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의 구릉지를 일컬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용산은 진짜 용산이 아닌 셈이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용산은 평지가 많고 한강 물길이 닿는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 후암동과 서빙고동 사이 약 3.3㎞ 길이의 길은 도성을 빠져나온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향해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용산은 조선시대 국가 군수창고 기능을 수행했던 군자감 등이 자리한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해왔다. 예로부터 외국 군대가 이곳을 탐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는 약 75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기였던 13세기 말, 원나라를 세운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한반도를 침략했다. 당시 몽골군은 일본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를 용산에 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이,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이곳에 진을 쳤다. 구한말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현 용산기지 캠프 코이너에 있던 청군 지휘소에서 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을미사변을 도모하고 대륙 침략 전초기지로 삼은 곳 또한 바로 이곳이다.
용산의 본격적인 ‘군기지화’는 일제의 침탈과 맞물린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은 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수용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등을 지었다. 이듬해 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났고 1907년 사격장을 시작으로 1908년부터 병원·창고·형무소 등이 들어섰다.
지난 7월에는 일제의 군용지 강제수용 과정을 상세히 담은 문건이 111년 만에 처음 공개되기도 했다. 용산문화원 향토사학자인 김천수씨가 발견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 등 문건에 따르면,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채 1년이 안되는 기간에 약 1000만㎡(300만평) 규모의 용산 땅 중 약 118만평이 일제 군용지로 수용됐다. 그나마도 마을 사람들이 수용에 격렬하게 저항해 당초보다 수용 규모가 준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 신촌·정자동·대촌·단내촌에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천수씨는 “당시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을 합해 총 1만4111가구의 가옥과 10만7428평의 전답이 있었고, 기지 조성을 위해 파헤쳐진 무덤만 12만8970기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이후 일제는 1914년 용산 일본군 기지를 조선군사령부로 이름을 바꿨고, 20사단 외 추가로 1개 사단을 더 주둔시키기도 했다. 이곳에는 총독 관저를 비롯해 사단 사령부, 사단장 관저 등 일제 무력통치의 핵심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중국 침략과 전시물자 동원을 위한 기지로 그 역할이 더욱 확대됐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용산은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가 떠난 자리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의 차지가 됐다. 미 24군단 예하 제7사단 병력이 용산으로 들어오면서 이곳은 주한미군기지로 탈바꿈했다. 그해 9월9일 용산기지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걸렸다. 미군은 용산기지에 남은 일본군 시설물 대부분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70년 넘게 사용해왔다. 기지 곳곳에 일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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