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65520

백범 암살범 안두희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했을까?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한 '대침' 이야기
17.10.11 11:35 l 최종 업데이트 17.10.13 14:01 l 박도(parkdo45)


▲  경교장(현, 강북 삼성병원 본관) 앞에 선 고 권중희 선생(2003. 10. 촬영) ⓒ 박도

어느 영화감독의 전화

내 손전화에는 이따금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그 전화는 대체로 내 책이나 기사를 읽었다는 독자들이 많다. 또 어느 기관이나 단체의 기관지 편집자나 언론사 기자, 작가들도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입수해온 '한국전쟁' 사진을 쓰고 싶다는 전화도 심심찮다. 때로는 가뭄에 콩 나듯이 원고 청탁도 더러 있다. 우리 속담에 "목마른 자 우물 판다"가 있듯이 그들은 여러 경로로 용케 내 손전화번호를 알아내 발신했다.

어찌 보면 다 고마운 전화들이다. 한 친구가 말했다. 나이 70을 넘기니까 스팸 메일도, 전화도 뜸하다고. 사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낡아가는 것으로, 점차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이를 자연현상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정신 건강에 좋다. 왜냐하면 흐르는 세월은 지상의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니까.

한 달 전쯤이다. 웬 낯선 전화를 받고 보니 자기를 손아무개 영화감독이라고 정중히 소개했다. 그는 뜻밖에도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저승으로 보낸 박기서 의사를 통해 내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안심시킨 뒤 두 가지 질문을 했다. 

그 하나는 내가 쓴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토대로 영화화하고 싶은데, 어느 영화사나 영화감독과 계약 체결 여부를 문의했다. 또 다른 하나는 고 권중희 선생 사모님 전화번호를 물었다.

나는  원작 영상권은 아직 누구에게도 계약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두 번째 부탁은 본인에게 허락을 받은 뒤에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나의 서울 나들이 길에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인사로 전화는 끝났다.


▲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 경교장으로 달려온 백성들이 통곡하고 있다. 안두희가 쏜 총알로 깨어진 경교장 2층 유리창이다. ⓒ 백범기념관

펜은 칼보다 강하다

나는 곧장 낡은 전화번호 수첩에서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씨의 전화번호를 찾아 발신하자 웬 낯선 사람이 받았다. 내가 그분에게 김영자씨를 찾는다고 얘기하자 그날 밤 늦게 사모님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새 전화가 바뀌었는데 다행히 아는 이가 인수한지라 연결이 된 것이다. 내가 정 감독에게 전화받은 얘기를 자초지종 말했다. 그러자 당신은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줘도 좋다고 말했다.

이튿날 나는 손 감독에게 사모님 전화번호를 전하자 그 며칠 후 권 선생 사모님으로부터 그새 만나 차 한 잔 나누었다는 연락이 왔다. 손 감독은 여건이 마련되면 영화 제작에 들어가겠다는데 막대한 제작비 문제와 시나리오 작성 등, 최소한 2년 이상은 걸린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그래서 나도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는 만들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제작기간도 무척 오래 걸릴 거라고, 우리 세 사람(박기서 의사 포함)은 느긋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자고 말했다. 

사실 세상 일은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내가 그동안 살아보니까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 언제부터 우리 사회 대중문화는 영화가 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도 적은, 그래서 좁은 시장임에도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벌써 몇 편이나 나왔다. 영화가 크게 성공하면 자연히 출연 배우와 작품 주인공 인물에 대한 인식도, 평가도 달라진다. 아울러 원작 도서 판매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 소설이나 다큐[실록]를 쓸 때는 늘 영상화를 염두에 뒀다. 그게 이 시대에 작가도 살고, 주인공도, 출판사도 살릴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 사회는 온통 가짜들이 판을 쳤고, 아직도 우매한 백성들은 그 가짜들의 망령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마땅히 역사의 뒤꼍길로 사라졌을 인물들이 전면에 나타나 진짜를 제치고 주역으로 설쳤으니, 한 마디로 이는 반역사적 작태로 블랙코미디였다. 

작가의 한 편 소설이나 한 영화감독의 한 작품은 그런 망령의 늪을 메워낼 수 있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출판기념회를 마치고(오른쪽부터 박기서 의사,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 여사, 저자 박도, 서평을 써준 고상만 시민기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2013. 3.> ⓒ 박도

안두희, 그는 누구인가?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창기에 토지측량기사로 떼돈을 번 졸부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모든 재산은 공산당에게 몰수당했다. 게다가 반동분자로 몰려 가족은 거주지 신의주에서 쫓겨났다. 그러자 그의 가족은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에 정착한 안두희는 곧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그 무렵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의 정보요원으로, 그리고 우익 테러조직 백의사(白衣社) 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1948년 11월, 안두희는 육군사관학교 8기 특3반에 입교하여 3개월 교육을 받은 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 4월, 안두희는 동향 홍종만의 주선으로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를 통해 당원이 되었다. 이는 김구 살해사건의 원인을 한독당 당내 내분으로 조작하려는 사전의 치밀한 음모였다. 마침내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한낮 경교장에서 소지한 미제 45구경 권총으로 김구를 향해 방아쇠를 네 번이나 당겼다.


▲  안두희의 흉탄에 운명하신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범행 이후 안두희는 줄곧 단독 범행이었다고 주장하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배후 없는 단독 범행이다. 국가를 위하여 (백범) 선생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결심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1949년 8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제43조(정치관여)와 제48조(살인)를 적용받아 총살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곧 원용덕 재판장으로부터 종신형을 판결 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안두희의 배후는?


▲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김창룡. ⓒ 고 권중희

안두희는 복역 3개월만인 1949년 11월, 당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상신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은 안두희에게 종신형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조치를 내렸다. 

그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틀 뒤인 6월 27일, 육군정보국 김창룡 소령이 안두희가 수감 중인 대전 육군형무소에  찾아왔다. 

그는 육군형무소장에게 국방부장관의 잔형집행정지처분 명령서를 전했다. 그러자 안두희는 그날로 즉시 석방되었다.

안두희가 석방되자 곧  신성모 국방장관은 1950년 7월 10일 자 국방부 특명 제4호로, 안두희를 현역(육군 소위)에 복직시켰다. 

1952년 12월 25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이기붕이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이기붕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안두희를 그대로 두면 민심이 더욱 흉흉하다고 건의했다. 이 국방장관은 이 대통령의 재가 후 그 후속조치로 국방부 특명 제229호로 안두희를 1계급 특진시켜 육군 소령으로 전격 예편시켰다. 

이후 안두희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김창룡 육군 특무대장의 비호로, 김창룡 사후에는 자유당 실세인 이재학, 김진만, 이상철 등의 후원으로, 기세 등등하게 살았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다 군납공장을 차렸다. 그러자 당시 군부대장들은 알아서 기며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부유하게 살았다. 그의 재산이 늘아난 만큼 국군 병사들은 악식에 시달렸음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안두희 추적자, 권중희는 누구인가?


▲  권중희 선생(2003. 11. 서울서대문형무소 3.1 기념탑 앞에서) ⓒ 박도

권중희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1983년부터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 응징했다. 

1987년 3월 27일 대낮에 서울 마포구 성산동 마포구청 앞 버스정류장에서 그는 '정의봉' 몽둥이로 안두희의 온몸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때 안두희는 머리가 깨지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혔다. 이 일로 권중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수감 37일만에 풀려났다.

이후에도 권중희는 계속 안두희를 끈질기게 추적하다가 나중에는 그만 바둑 친구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권중희는 안두희를 구슬러 백범 암살 배후를 캐물었으나 안두희는 정색을 하며 그때마다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 가운데 박기서 의사가 안두희를 처단해 버리자 권중희는 크게 낙담하던 가운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인 나와 인터뷰를 하게 됐다.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이라는 그 기사가 온라인에 뜨자 여러 누리꾼들이 백범 암살 진상을 규명하라고 열화와 같은 성금을 보내줬다. 그 성금으로 2004년 1월 나는 권 선생을 모시고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문서를 찾고자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갔다.

그때 나는 권중희 선생과 한 숙소에서 47일간 기거(동침)했다. 그래서 권 선생으로부터 백범 암살 사건에 대한 얘기는 아주 귀에 익도록 들었다. 안두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안두희가 '권중희' 앞에서는 벌벌 떨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사연인즉, 권 선생은 10여 년간 안두희를 끈질기게 뒤좇으며 감언이설로, 때로는 갖은 협박으로 다그쳤다. 하지만 안두희는 줄곧 단독범이라고 우기며 모로쇠로 일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권중희는 1992년 9월 23일을 최종 D데이[작전개시일]로 정하고, 두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인천 안두희 집에서 그를 결박한 뒤, 승용차에 태워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에 있는 한 농장으로 데려갔다. 권중희는 그 농장에서 안두희의 결박을 푼 다음 처음에는 말로 좋게 타일렀다. 


▲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너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네 (재혼한) 처가 자꾸만 방해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이곳에서 너의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데려 온 것이다. 이제 사건 전모를 속 시원하게 모두 털어놓아라."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오늘이 내 제삿날로 각오하고 있으니 네 맘대로 하라."

안두희의 첫 마디가 권중희의 성질을 건드렸다. 하지만 권중희는 그의 진심어린 자백을 받아내고자 꾹 참고 계속 안두희를 설득했다.

"너의 가슴 한구석에 털끝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모든 것을 실토하고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해야 할 것 아니냐."
 "…."


▲  백범 묘소 앞에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안두희 ⓒ 고 권중희

안두희의 입을 열게 한 '대침'

권중희의 애소에도 안두희는 계속 입을 굳게 닫았다. 안두희는 암살 배후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모르쇠 작전으로 일관할 심산이었다. 이에 화가난 권중희는 하는 수 없이 비상수단을 썼다. 

권중희는 평소 침술을 공부했던 바,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안두희의 엉덩이에다가 준비해 간 대침을 8~9차례 꽂았다. 그러자 그렇게 고집 부리던 안두희는 마침내 그 대침에 굴복하여 곧 입을 열어 백범 암살사건 진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날  안두희는 네댓 시간에 걸쳐 백범 암살 진상을 술술 이야기했다. 그때 안두희는 중풍으로 발음이 시원찮고 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전과는 달리 아주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안두희는 권중희가 묻지도 않는 얘기까지도 술술 쏟아냈다.

마침내 안두희의 입에서 백범 암살지령 바로 윗선은 그의 직속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어 묻지도 않은 그의 저서 <시역의 고민>은 대필했다는 얘기, 그리고 사건 1주일 전쯤,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자기를 경무대(현, 청와대)로 데리고 가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높은 사람 말 잘 듣고 일 잘하라"는 치하의 말까지 들었다는 얘기까지도 털어놓았다. 


▲  안두희 수기로 출간된 <시역의 고민> ⓒ 박도

권중희는 그 말이 백범 암살 배후 진상 규명에 매우 민감한 발언이기에 안두희의 경무대 방문을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안두희는 역정을 내면서 자기는 평소 커피를 좋아하는데 그날 경무대 접견실에서는 접대용으로 자기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스를 내놔서 또렷이 기억한다는 얘기까지도 토로했다. 

하지만 이튿날(1992년 9월 24일) 안두희는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밝힌 사실을 죄다 번복하면서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신문들은 안두희를 두둔하며, 그를 불법 감금한 권중희를 공박했다. 

도하 언론들은 백범 암살 진상 규명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안두희가 증언을 번복하게 된 내막이나 자백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 확인 취재할 생각보다 안두희 말만 대서특필했다. 

암살 지령의 ABC

사실, 암살 지령은 똑 떨어지는 말이나 문서가 있을 수 없다. 그 말이나 문서는 뒷날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런 확실한 증거를 남길 어수룩한 지령자는 없다. 또한 그 지령 단계는 점조직이기 마련이고, 그 지령은 이심전심의 비법을 쓰기 마련이다. 

"나 요즘 그 친구 때문에 골치가 아파!"
"그 자는 국가 건설에 훼방자야!"
"그 자식 국내 문제를 왜 외국에 나가서 나발 불어."

그 말을 들은 부하나 하수인들은 지령으로 알고 그때부터 알아서 기게 마련이다. 그런 뒤 그들은 떡도, '떡고물도 챙기면서'(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말) 그동안 우리 사회의 주류로 살아왔다. 대부분의 암살지령은 그렇게 내려진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증거를 찾기도 매우 어렵다. 심한 경우는 암살자를 제3의 하수인으로 암살시켜 버리기도 한다. 그게 비정한 암살 세계다. 케네디 암살범 오스왈드도 또 다른 하수인의 저격으로 죽었고, 아카노를 암살한 롤란드 갈만도 또 다른 하수인의 총에 피격되었다. 

2004년 2월 어느 날 밤이었다. 그때 나와 권중희 선생은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로엘(Laurel)의 한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늦은 밤 권중희 선생은 고국의 부인과 거주하는 집 문제로 한참 통화를 한 뒤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쓰레기통에서 찾아 물었다. 그는 담배를 두어 모금 빤 후 옆 침대에 누워 있는 나에게 한 맺힌 말을 했다. 

"우리네 가정에서는 집 앞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에게도 수고비를 주는데, 대한민국은 나에게 수고비는커녕 쇠고랑과 냉대, 그리고 가난을 줍디다."
"네에?" 

아마도 현재 거처하고 있는 집의 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는 독촉 얘기를 전해 들은 때문이었나 보다.

"내 인생은 안두희 때문에 삐끗했지만 그래도 힘이 자라는 한, 백범 암살 진상을 밝혀 다음 세상을 위해서 정의와 양심이 살아있는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 네에."

2007년 11월 17일 나는 권중희 선생의 부음을 받고 곧장 가톨릭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마침 그때 입관식이라 이승에서 권중희 선생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끝내 많은 한을 풀지 못한 비원이 서린 표정이었다.  

[관련 기사: 내 평생소원은 백범 암살 배후를 밝히는 일 (1)~(8)]


▲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의사 ⓒ 박도

안두희 저승사자 박기서 의사 이야기

나는 권중희 선생의 대담에 이어 이태 후인 2005년 6월 17일, 안두희의 저승사자였던, 현재 경기도 부천시 개인택시 기사인 박기서 의사도 효창동 백범 묘역에서 만났다.

박기서 의사는 1948년 전북 정읍 태생으로, 안두희 처단 당시에는 경기도 부천에서 시내버스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항일유적답사 길에 만난 의병장이나 의사, 독립전사들은 대부분 평범한 생활인으로, 대체로 학식은 그리 많지 않은 분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역사 현장을 답사해 본 바로는 이 나라를 지켜온 이는 임금이나 사대부 출신이라기보다 그저 이름없는 들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례로 구한말 전남 보성의 안규홍 의병장은 담살이(머슴) 출신이었고, 상해 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는 채소장수였다.

박기서, 그는 의협심이 대단히 강한 운전기사로 안두희를 더 이상 살려둬도 암살 배후를 자기 입으로 자백치 않는다는 판단이 섰다. 그게 정보 요원들의 불문율이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박 의사는 그를 자연사만은 시켜서 안 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천수를 다 누린다면 이 땅에는 민족정기가 완전히 말살된다고, 당신이 그 일만은 막아야 된다고, 그를 처단하고자 나섰다. 그리고 행동에 옮겼다. 

"만일 안두희가 자연사한다면 조금이나 남아있는 민족정기조차도 먹칠하는 일로, 이는 후손들에게 볼 낯이 없는, 떳떳치 못한 조상이 될 것이 불을 보는 것처럼 명약관화한 일이지요." 


▲  정의봉을 든 박기서 의사 ⓒ 박기서

박 의사는 그런 대의명분으로 1996년 10월 23일 안두희 집에 잠입했다. 그는 안두희를 보자마자 준비해간 '정의봉'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휘둘러 그를 처단했다. 

역대 대한민국 공권력도, 그 잘난 금판사도, 국회의원들도, 언론들도 죄다 좌고우면하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한 안두희를 일개 버스기사가 아주 통쾌하게 응징했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요, 의사(義士)다. 

박 의사는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한 뒤 스스로 경찰서로 갔다.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언도를 받았고, 2심에서는 5년 구형에 3년으로 감형받았다. 

박기서는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여 복역 중, 1997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인간쓰레기를 청소하다

그는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과 부패한 극우 무리들이 활개치는 세상보다 오히려 교도소에 있을 때가 더 행복했다고 말했다.

"사람이면 다 사람입니까? 안두희 그는 사람의 탈을 쓴 악마요, 한낱 쓰레기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이 제대로 숨 쉬고, 물도 마실 테지요. 

못 배우고 무식한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쓰레기를, 그것도 가장 더러운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담담히 쏟아내는 말에 그보다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많이 배운 내가 쥐구멍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는 세링게티 초원의 독수리다. 세링게티 초원에는 사체 청소부 독수리가 있기에 싱싱한 풀들이 자라고, 뭇 생명들은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산다.

[관련 기사; 인간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입니다]


▲  백범 김구 장례 행렬이 한국은행 앞을 지나고 있다. 1949. 7. ⓒ NARA

덧붙이는 글 | 안두희를 응징한 분은 이밖에도 곽태영, 김용희 선생도 있으나 지면 관계상 두 분 이야기만 썼다. 더 자세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박도 지음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에 자세하게 나온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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