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김근태형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
[하니Only] 권오성 기자  등록 : 20120103 15:50 | 수정 : 20120103 16:01
   
문용식 민주당 인터넷소통위원장, 물고문 당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찾아
칠성판에 온몸 묶고 사흘간 온갖 고통 가하다 한마디 질문 “김근태 알지?”

» 민주화투쟁에 바친 삶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삶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나선 그는 이후 제적과 강제징집, 구속과 투옥이 반복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낙관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사진은 1990년 7월20일,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차 공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서고 있는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용식 민주당 인터넷소통위원장의 얼굴이 엷게 떨렸다. 끔찍한 고문의 기억도 담담하게 털어놓던 그도 “근태형의 비명소리”를 듣던 순간에 대한 질문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난 2일 늦은 오후, 박경서 경찰청 초대 인권위원장을 비롯한 1기 경찰청 인원위 위원들과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문 위원장 등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을 찾아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추도식을 열었다. 당시 김 고문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던 515호실 앞에는 경찰청 인권센터가 그를 기려 갖다놓은 흰 국화꽃 바구니가 작은 탁자위에 놓여 있다.

515호실은 다른 고문실들과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손을 봐서 당시 흔적을 찾기 어렵다. 5층의 15개 고문실 가운데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당했던 509호만 당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왼켠의 취조용 철제 책상과 의자, 오른켠의 낡은 1인용 나무침대가 모포로 덮인 채 방을 꽉 채우고 있다.

» 고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509호. ‘하니TV’ 영상 캡쳐

맞은편 끝에는 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박종철의 목숨을 앗아간 물고문용 욕조가 추악한 인권유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환하게 불을 밝혀놓았지만 손바닥 한뼘 크기의 창은 방을 밝히기보다는 음침하게 만드는 구실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515호는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기 위해서인지 모든 집기를 치우고 세면대도 말끔하게 공사한 뒤 칸막이로 가려놓았다. 오직 바닥에 고정했던 책상과 의자의 못 자국과 천장 한편에 씨씨티브이(CCTV)가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검은 거울만이 당시 모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문 위원장은 당시 받았던 고문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1985년 8월29일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인 ‘민추위(민주화추진위원회)’의 투쟁문건 ‘깃발’ 사건으로 여기 끌려왔죠. 김근태 형에 앞서 제가 여기(515호)에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10여명의 고문수사관들이 다짜고짜 문 위원장을 때린 뒤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발가벗겨졌다고 한다.

그 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흘을 밤낮없이 이어지던 물고문이었다. “칠성판이 들어오더군요. 그 위에 눕히곤 가슴, 허리, 무릎, 발목 등을 혁대로 묶어 손가락, 발가락 빼고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건을 얼굴에 덮더니 그들 표현대로라면 ‘이제 공사 좀 해보자’고 하더군요.” 물주전자에서 수건이 덮인 코 위로 쏟아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코로 들어오는 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물고문은 탈진하면 멈췄다가 지속적으로 반복됐다.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고통입니다. ‘관절뽑기’, ‘볼펜심문’도 비할 바가 못 되지요.”



고문은 아무 이유가 없었다. “죽을수도 있겠구나라는 공포를 주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되지도 않은 질문을 해요. ‘북한 언제 다녀왔어?’, ‘노동당 가입했지?’ 따위죠. 차라리 아는 질문을 하면 답이라도 하고 헤어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본 질문을 하더군요. ‘김근태 알지?’ 얼굴 몇 번 본 것 뿐이지만 알긴 아니까 안다고 했죠. 저에게 그 대답을 얻어내자 바로 잡아들인 겁니다.” 수사관들은 “브이아이피(VIP) 온다”며 515호를 비우고 문 위원장을 맞은 편인 514호로 옮겼다. 고문실 가운데 가장 컸던 515호는 그들에게 브이아이피룸이었다.

김 고문은 9월4일 대공분실로 끌려왔다. 당시 고문받고 있을 김 고문에 대해 들었던 생각을 묻자 문 위원장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끔찍하죠”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로 말미암아 들어오셨을 형님을 생각하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길가의 자동차 소리, 남영역 기차 소리가 멎는 새벽이면 (김 고문의) 신음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다가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김 고문은 문 위원장이 받은 고통에 더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잔악한 고문까지 견뎌야 했다.

» 문용식 민주통합당 인터넷소통위원장이 자신과 고 김근태 상임고문이 고문을 당했던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15호에서 당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니TV’ 영상 캡쳐

문 대표가 비로소 김 고문을 만난 것은 10월 중순께 검찰 조사로 넘어간 뒤였다. “당시에는 구치소에서 덕수궁 인근의 예전 검찰청사로 이어지는 지하통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고 오면서 서로 교차했죠. 저는 그 때 겨우 ‘문용식입니다’ 한 마디를 건넬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근태 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초췌, 피폐라는 표현만으로는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1988년 비로소 밖으로 나와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형님은 오히려 ‘고생했다’며 저를 위로하셨죠.”

이날 추도식에 참여한 인권위원들은 고인의 뜻을 기리는 추모 기념관 설치를 제안했다. 박순희 전 경찰청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은 “김근태 의장은 엄청난 고문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깨끗한 사람이었다”며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는 509호를 보존했듯이 기념관을 만들어 그의 뜻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추도식에는 70년대 중반 출판돼 노동운동가들의 필독서처럼 읽혔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쓴 노동자 유동우씨도 함께 했다. 유씨 역시 19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 남영동에 끌려와 한달 가량 고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는 “근태 형님이 한번 저희 집에 찾아와 서로 고문의 경험을 이야기 나눈 것이 생각난다”며 눈물을 흘렸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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