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old.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638&key=20061214.22020203715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1> 대조영 발해 건국지 동모산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1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2>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28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3> 160년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영욕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2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4>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3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 국제 http://tadream.tistory.com/234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3> 160년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영욕
제국의 영화 오간데 없고 초석만 뒹굴어
외·내성안 5개 궁전, 당시 동북아 최대 도시
선왕때 활발한 영토 확장… 일본과도 교류
중국, 자본 유치 통해 유적지 복원작업 착수
글·사진 = 조해훈 문화전문기자 massjo@kookje.co.kr  입력: 2006.12.13 20:41 / 수정: 2006.12.22 오후 9:29:04

중국 흑룡강성 발해진에 있는 상경용천부 궁성벽 중 가장 보존이 잘된 남문터. 160여 년 간 발해의 최고 중심부였던 궁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중국 당국이 성벽 윗 부분 등 일부를 보수했다.


▲발해진 상경성 가는 길

중국 흑룡강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목단강시에서 영안시를 거쳐 동경성진으로 가는 데는 승용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렸다. 동경성진은 상경용천부로 들어가는 관문. 영안시의 중심지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이나 거리 풍경은 어두웠다. 이 곳에는 소수민족인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들이 많이 산다. 1960년 대까지만 해도 발해진은 동경성진에 소속된 촌락이었는데 그 이후 떨어져 나와 2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독립된 진(鎭)이 됐다. 그 중에서 조선족은 30% 쯤 된다.

동경성진과의 발해진과의 거리는 5㎞가량. 발해진에 들어가면 160여 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상경용천부)의 외성이 도로 양쪽으로 보인다. 발해 시기에 상경성은 홀한성(忽汗城)으로 불렸다. 외성은 아래에 돌로 판축을 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았으며, 둘레의 길이가 16㎞296.5m로 10개의 성문이 있었다. 외성 안에는 4.5㎞규모의 내성을 둘러쌌으며, 그 안에 궁성(둘레 2㎞)이 있었다.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성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의 하나였는데, 상경성은 동북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리라.

외성에 들어서면 오른 쪽에 옥수수 술공장이 보이고 마을이 있다. 상경성은 현재 옛 터만 남아있다. 오두막 같은 관리소를 지나면 상경성에 대한 안내판과 '발해 상경궁 복원 조감도'가 있다. 현재 영안시와 상급 행정 단위인 목단강시가 지난 해 하반기부터 발해 유적지 개발을 위해 외국자본과 민간자본 유치 활동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1961년 상경용천부 유적을 제 1차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하고,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복원 준비 작업을 해 왔다. 이와 관련,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정영진 소장은 "중국 정부가 2008년 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발해국 15대 왕, 229년의 역사 속에서 해동성국은 바로 이 궁성에서 이뤄진 것이다.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상경용천부


중국 당국이 인근 경박호와 목단강 등 주변 경승지와 연계시켜 관광단지로 개발한다는 계획 아래 세워놓은 상경성 복원 조감도.

안내판을 지나면 바로 궁성의 남문인 오문(午門)터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문터를 통과하면 상경궁성 안에 들어가는 셈이다. 남문이 있는 성벽은 높이가 6m, 동서의 길이가 60m, 남북의 너비가 20m가량 되며 성벽 위에 거대한 누각이 있었다. 지금은 누각의 초석 50개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궁성 안에는 5개의 궁전터가 있다. 남문~제1 궁전터 구간 200m, 1궁전터~2궁전터 150m, 2궁전터~3궁전터 130m, 3궁전터~4궁전터 30m, 4궁전터~5궁전터는 80m 거리다. 이 중 제2궁전이 가장 컸다고 한다. 지금은 웅장하고 화려했던 전각은 간 데 없고 커다란 초석만 뒹굴고 있다. 궁전터와 궁전터 사이에는 인근 농민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다. 기자가 찾았을 땐 꽁꽁 언 밭에 잡초만 누렇게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몇번이고 돌아보고 돌아보면서 나오는 동안 눈가가 젖어오는 걸 느꼈다. 아마도 한때는 화려한 제국이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발해의 영광에 대한 무상감 때문이었으리라. 이 곳이 무려 160여년 간 거대 제국의 수도로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던 영광의 도읍이고, 비운의 도읍이었던 것이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재위)이 즉위하면서 최고 중흥기를 맞았다. 선왕은 계속되는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 정복활동을 벌여 발해 역사상 최대 영역을 소유했던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사방 5000리'의 영토 내에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 때 완비됐던 것이며, 중국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중앙에 3성 6부 1대 7사 1원 1감 1국을 설치했다.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는 '중대성첩'이 소장돼 있다. 841년, 발해 중대성이 일본의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것으로 발해와 일본 사이에 왕래한 외교문서였다. 발해는 신라와 5차례, 일본과 34차례, 당과는 100여 차례 넘게 교섭하는 등 주변 여러나라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와 세계의 여러나라들과 교류하던 길이 다섯 군데나 됐던 것이다. 일본 가나자와 가쿠인 대학 고지마 요시타카 교수는 지난 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아시아와 발해'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9세기 유적인 우메다 히나시 유적에서 발해의 꽃모양 혁띠 버클을 발굴했다며, 당시 발해와 일본의 활발했던 교류를 입증했다. 발해가 일본에 배를 타고 왕래한 기록은 '속일본기'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상경성터는 1933, 1934년 두 차례 발굴이 이뤄졌으며, 1963, 1964년에는 북한과 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상경성에 대한 발굴이 진행됐다. 궁전터에서 20m가량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길 한편에 상경성 당시 사용했다는 우물인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 있다. 이 우물의 현재 깊이는 5.6m로, 1963년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마친 다음 우물의 입구 부분을 고치고 정자를 지었다.

중경현덕부에서 756년 이 곳 상경성으로 수도를 옮긴 문왕은 관직 제도를 정비하고 주자감(胄子監, 대학)을 세워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고 진흥시켰다. 문왕은 785년에 국력 강화를 위해 상경성에서 길림성 훈춘시 동경용원부로 천도를 했다. 발해는 동경용원부(팔련성)에서 793년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겨와 여기서 거란에게 망한 것이다.

▲발해의 멸망

발해는 926년 거란의 아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멸망된다. 중국 북방에 있었던 거란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던 발해를 공격한 것이다. 거란은 925년 12월에 발해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발해는 926년 1월 홀한성에서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아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에 '동쪽의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설치했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칭했다. 아율아보기의 둘째 아들인 야율덕광(요나라 태종)은 928년에 동단국의 수도를 천복성에서 동평(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옮기면서 천복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이다. 중국 학자인 관금천, 나대지 등은 상경성을 불태운 것은 야율덕광이 아니라 1234년 쳐들어온 몽골군이라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역사의 버림을 받았던 이 곳 발해진은 청나라 당시에는 유배지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대종교 총본사가 1934년 흑룡강성 밀산현 당벽진에서 발해진으로 옮겨오기 전 백산 안희제(1885~1943)가 발해농장을 운영했던 곳이다.

발해진에서 서남으로 약 1㎞ 떨어진, 발해진 중앙대가에 이 지역 사람들이 남대묘로 부르는 흥륭사가 있다. 지금까지 상경성 안팎에서 발굴된 절터는 모두 십여 개. 흥륭사에 저 유명한 발해의 석등과 석불이 있다.

발해가 망한 후 유민들은 '후발해' '정안국' '대발해국' 등 여러 차례 발해 부흥 왕조를 세웠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 흥륭사 석등 

- 연꽃 부조는 힘찬 발해 기상
- 덮개돌 통일신라 부도 연상


'연꽃 석등탑'으로도 불리며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불교 조각미를 가진 발해의 석등탑. 발해진의 중앙도로인 주작대가 옆 흥륭사 경내에 있다.

발해진 흥륭사에 우람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발해 석등이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 있다. 이 사원은 천여 년 전 상경용천부 앞 주작대가(朱雀大街) 양 측에 대칭으로 건축됐던 절 중의 하나로, 몇 차례 폐사됐다가 1861년 지금의 흥륭사로 중창됐다. 

남에서 북으로 5개의 건물이 줄을 이어 서 있는 이 절의 마지막 건물인 삼성전 앞 뜰에 석등이 서 있다. 석등의 원래 높이는 6.4m 였지만 상륜부 일부가 훼손돼 현재 높이는 6m이다. 현무암으로 된 이 석등의 기둥돌(石住) 아래와 위에 새겨진 연꽃 무늬 부조는 강하고 힘찬 발해 사람들의 기질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선이 굵고 명확하다. 활짝 벌린 잎을 받든 연꽃의 줄기 역할을 하는 석주 위에 얹은 팔작 지붕 모양의 덮개돌(蓋石)은 마치 통일신라의 부도를 연상시킨다.

연꽃을 신성시한 불교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등은 많은 전설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문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초에 한 석공이 홀한해(경박호)에서 커다란 돌을 옮겨와 백일 동안 정으로 쪼아 석등을 만들어 불을 켜놓고는 갑자기 돌기둥 속으로 사라졌다는 내용. 돌이 갈라 터질까봐 자신의 몸으로 껴안았다는 그 석공 덕분인지 오늘 날까지도 석등이 거연히 솟아 있다. 삼성전 안에는 문왕이 상경용천부를 세우면서 만들었다는 3.3m 높이의 거대한 돌부처가 앉아 있다.

이 밖에도 1999년 이 곳 발해진에서 도로를 만들다가 돌함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 든 6개의 함 중 가장 작은 함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9개가 나왔다. 인근의 상경용천부 유지박물관에서 보관하다 돌함만 남기고, 사리는 북경박물관으로 옮겼다고 박물관 관리인 초 씨(62)는 설명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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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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