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46566.html?_fr=mt1
장사꾼식 거래의 기술…트럼프가 얻은 것과 잃은 것
등록 :2018-05-28 16:16 수정 :2018-05-29 00:37
‘회담 취소’ 성동격서로 거래 기술 뽐내
북한 태도 바꾸고, 중국 밀어냈지만…
북핵 난제 풀 기초될 ‘신뢰’는 흔들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 연합뉴스
“누구나 거래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각) 북-미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묻는 기자들한테 한 말이다. 전날 ‘6월12일 싱가포르 정상회담’ 취소를 ‘편지 통보’한 것도, 그 2시간 뒤 “기존의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고 한 것도 다 ‘거래의 기술’이라는 얘기다. 이런 태도엔 자칭 ‘거래의 달인’으로서 자부심이 묻어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각)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을 옆에 앉혀두고 기자들한테 한참 ‘설교’를 했다. “당신들은 거래(deal)를 모른다. 100% 확실해 보이던 거래가 깨지고,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거래가 성사되기도 한다. 나는 숱한 거래를 성사시켰다. 나는 그 누구보다 거래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의 ‘1인쇼’ 덕분에, ‘1박4일’ 일정으로 태평양을 건넌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배석자 없는 단독회담은 21분 만에 끝났다.
트럼프 대통령한테 ‘예의’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만이다. 세상만사가 ‘거래’다. 그가 즐겨 쓰는 거래의 기술은 상대방이 나의 ‘패’와 ‘수’를 예측하지 못하게 흔들기다. 동아시아인한테 익숙한 사자성어에 빚대면, 성동격서(聲東擊西)다. 동쪽을 시끄럽게 해 시선을 붙잡은 뒤 서쪽을 친다. 사람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외교 행태를 일러 ‘부동산 장사꾼식 거래’라고 한다. 한참 협상하다 안 산다고 돌아서며 생각이 바뀌면 전화하라고 명함을 건네는 부동산 장사꾼식 밀당.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다루는 방식이 전형적이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겉으로만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원하는 것’을 얻었다. 우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8~9일 방북했을 때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싱가포르에서 실무회담을 열기로 합의하고도 2주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협상을 거부했다는 북한이 태도를 싹 바꿨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를 풀어갈 용의가 있다”고 확약한 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는지, 문 대통령과 29일 만의 남북정상회담(26일 판문점)을 통해 북-미 정상회담과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했다.
둘째, 트럼프 대통령이 대놓고 ‘눈엣가시’ 취급을 해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얘기가 쏙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문 대통령과 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두 번째 방중 뒤 태도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나는 별로 느낌이 좋지 않다”고 노골적으로 시 주석을 겨냥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이 사라졌다.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 결과 발표 때 “남북이 합의한 종전선언을 북·미 정상회담 이후 3국이 함께 선언하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했고, 문 대통령은 27일 남북정상회담 결과 발표 기자회견 때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할 경우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통해서 종전선언이 추진되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항구적·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했다”던 남북 정상의 ‘4·27 판문점 선언’과 확연히 다른 태도다. 트럼프 대통령의 ‘깽판’을 막아 어떻게든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는 남북 정상의 고육책이다.
그래픽 정희영 디자이너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꽉 움켜쥔 주먹으로는 새 것을 쥘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유의 부동산 장사꾼식 성동격서로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득의양양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적인 정치적 자산을 잃었다. 신뢰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려는 게 아니다.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북부핵시험장 폐기 의식’을 마치고 원산으로 돌아오는 특별전용열차 안에서 ‘북-미 정상회담 취소 편지 통보’ 소식을 접한 북쪽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단다. “트럼프 대통령한테 기대가 많았는데, 너무 변덕스럽다.” 전직 고위 관계자는 이런 한탄을 했다. “트럼프가 걱정스러워서 이제는 정세를 예측할 수가 없어.” 예측불가능성, 외교와 협상의 기초를 허문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의 70년 적대사에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겠다고 나섰다. 난제 중의 난제가 앞에 놓여 있다. 쉽다면 왜 지금껏 아무도 풀지 못했겠나. 트럼프 대통령은 ‘완전하며 검증할 수 있고 불가역적인 핵폐기’(CVID)를 원한다. 김 위원장은 ‘체제안전보장’(대북 적대정책과 군사적 위협 해소)을 간절히 바란다. 실무자들의 기술적 접근으로는 단기간에 절대로 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래서 세계가 ‘김정은-트럼프 담판’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다. 두 정상의 높은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한 정치적 결단에 의한 ‘톱다운’ 방식의 해법을. 그렇더라도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안전보장’의 맞교환이 단박에 이뤄질 수 없다. 실천엔 불가피하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온갖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러자면 ‘비대칭 상호주의’, 비록 오늘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길게 보면 ‘이익의 균형’을 맞출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믿음은 부동산 거래의 규칙이 아니다. 친구들 사이의 규칙이다. 특히 ‘원수’ 사이였다가 친구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믿지 않으면, 김정은 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을 믿으려 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면 트럼프 대통령이 좋아하는 ‘거래’는 성사되기 어렵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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