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mfree.com/doctorlsj/?p=5571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까지…

발해의 시조 대조영에 대해 삼국지에서와 같이 숫자로 능력치를 메기면 어떻게 될까? 다른 건 몰라도 개인적으로 지력만큼은 100을 주고 싶다. 절대 불가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에서 그야말로 당과 신라를 어르고 달래며 완벽하게 농락하여 발해를 건국했으니.

사실 발해의 건국에는 운도 많이 따랐다. 당시 영주에는 당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고구려인과 말갈족, 거란족이 함께 머물고 있었는데, 당의 지배에 대해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가 일시적으로 약화된다. 그때 대조영은 말갈과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동으로 돌아왔고, 이어 이들을 토벌하고자 파견된 당의 군대를 천문령에서 격파함으로써 행동의 자유를 얻어낸다. 그러고서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즉위하니 이것이 진振, 후일 발해라 불리우게 될 나라다. 

물론 당은 발해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자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698년 고구려의 옛영토를 모두 관할하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철수해 안동도독부로 축소되어 있던 상태였다. 요동 동쪽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한 상황에 이진충이 돌궐과 연결되어 통로를 차단하니 당으로서는 마음만 있을 뿐 실제 실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 대조영은 기민하게 움직여 이제 막 건국해 모든 것이 불안하고 미숙한 진振의 안전과 발전을 꾀하게 된다. 가장 먼저 한 것이 당시 당과 대립하고 있던 돌궐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으로 당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영주를 장악하고 있는 이진충의 거란을 흡수하면서 더욱 당과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된 돌궐로서는 당으로부터 고구려의 옛영토를 되찾아 독립하려 하는 대조영은 상당히 입맛 끌리는 동맹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쪽의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니, 진이 발전하는 데 있어 가장 위협이 될 수 있는 남쪽의 불안요소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으로 당과 소원해져 있던 상태였는데, 평양일대를 완충지대삼아 당과 마주하고 있는 부담스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남쪽으로부터의 안정을 꾀하는 대조영과 당의 세력이 고구려의 옛땅에서 완전히 물러나기를 바라는 신라, 양자의 입장이 맞아떨어지면서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대아찬의 벼슬을 받아 그 실체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는 돌궐과 연결되어 당을 압박하고, 남으로는 신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아 안전을 확보하게 되면서 비로소 진은 나라로서의 기틀을 닦는 데 있어 탄력을 받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만주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불과 30년,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던 상태였다. 고구려의 유민이나 고구려를 기억하고 있던 말갈을 흡수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구심점을 필요로 하던 그들에게 있어 약간의 실력만 보여주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5년 뒤, 이진충으로부터 영주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으로부터 그 실체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원래 진을 토벌하고자 했던 당이었다. 그러나 이진충이 돌궐과 연결하여 영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그러는 와중에 발해는 급속도로 세력을 키웠고, 돌궐과 거란의 공격으로 국경이 혼란스럽던 당으로서는 이 새로운 실력자를 인정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703년 당은 진에 대한 공격의도를 포기하고 사신을 보내 그 실체를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시 대조영에게 기회가 되었다. 당시 진의 동북에는 진에 복속되지 않은 불녈, 월희, 철리, 흑수 등의 유력한 말갈부족이 머물고 있었는데, 대조영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패자로서 이들 말갈들에게까지 동경의 대상이었던 당과 국교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우월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최소한 이들 말갈이 당과 통하고자 하여도 발해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니 최소한 이 지역에 있어 주도권은 발해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대조영은 그러한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과의 국교에 있어 매우 적극적이었다. 태자를 당에 숙위로 보내 적대할 뜻이 없음을 밝히는가 하면, 711년에는 대조영이 직접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기도 했다. 당의 접근을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낮춤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당이 돌궐과 화친을 하게 되면서 당과 진 사이에 길이 열리고 대조영은 당으로부터 발해왕에 봉해지게 된다. - 이후 진은 발해로 나라 이름을 바꾼다. -

그 뒤로는 당연히 탄탄대로였다. 719년 고왕 대조영이 죽고 무왕 대무예가 즉위했을 때 신라 성덕왕은 발해와의 접경에 장성을 쌓아 발해의 위협에 대비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소원하던 당에도 사신을 보내 관계를 복원하는 데 힘쓴 것도 모두 발해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당 역시 신라와 관계를 수복함으로써 발해를 남에서 압박하고, 흑수말갈과 직접 연결하여 발해를 배후에서 위협하려 시도한다. 불과 21년 사이 신라와 당 양자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왕 대조영의 당대에 발해는 이미 그 성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조영이 싸움을 잘 하기도 했을 것이다. 천문령에서 압도적인 당의 토벌군을 물리친 것은 어지간한 군사적인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후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고 말갈을 포섭하는 과정에서도 적잖이 싸움을 치러야 했을 터이니 싸움을 못 하고서야 발해와 같은 큰 나라를 이루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과 신라, 돌궐은 모두 당시 최전성기를 누리던 강대국들이었다. 대조영이 제아무리 싸움의 천재라 할지라도 인구에서, 경제력에서, 장비와 보급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이들 나라들과 경쟁하며 나라를 세워 안정시킨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더구나 최전성기에조차 발해의 인구와 생산력을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고구려의 옛영토 자체가 크게 황폐화되어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발해와 같은 큰 나라를 세워 장차 수백 년을 이어갈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강함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했다. 바로 외교력이었다.

이진충의 반란이 있자 머뭇거리지 않고 재빨리 요동으로 이동해 행동의 자유를 찾았으며, 나라를 세우고는 돌궐과 신라로 사신을 보내 외부의 위협을 미연에 방지했고, 당이 사신을 파견해 오자 도리어 태자까지 보내가며 적극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을 요청하여 만주에서의 주도권을 인정받은 것 등의 모든 과정에서 보여준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던 탁월한 외교적 안목과 능력, 그것이 있었기에 불과 2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발해라고 하는 대제국이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긴 원래 국가간의 겨룸이란 힘의 겨룸이라기보다는 외교의 겨룸이기 쉬웠다.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도 돌궐을 복속시키고, 거란을 이간질시키고, 신라와 연결하는 외교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발해가 융성하여 이를 견제할 때도 신라와 연결하고, 흑수말갈로 배후를 위협하며, 발해 내부의 권력다툼을 이용하는 등의 외교적인 수단이 먼저 동원되었다. 군사적인 행동이 필요하더라도 그렇게 이미 이겨 놓은 다음에나 한다. 그것이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법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은 장수가 하는 일이다. 그 전에 싸우기 전에 이기고, 싸우지 않아도 이기도록 하는 것이 제왕의 일이다. 일조일석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나라들과는 달리 발해가 수백 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대조영이라고 하는 제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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