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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등급 벼슬 받은 발해 대조영의 '굴욕'
[Why]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입력 : 2010.04.10 03:10
 
북한 학계에서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며 펄쩍 뛰는 통일신라의 기록 한 줄이 있다. 문제의 글은 대(大)학자 최치원(崔致遠·857~?)이 897년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등장한다.

이것은 외교 서열을 신라보다 위로 올려 달라는 발해 사신의 요구를 당나라가 거절한 것에 대해 고맙다는 뜻을 표한 글이다. 신라를 '무궁화 나라(근화향·槿花鄕)'라고 했던 저 유명한 표현이 바로 이 글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최치원은 다른 어느 사료에도 없는 발해 건국의 '비밀'을 이 자리에서 누설해 버린다.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고 이웃으로서 접하고자 왔기에 그 추장 대조영(大祚榮)에게 비로소 제5품 벼슬인 대아찬을 주었다."

고왕(高王) 대조영이 발해 건국 직후에 신라의 17관등 중 5등에 해당하는 대아찬 벼슬을 받았다고? 대아찬이라면 신라 골품제도에서 진골 귀족만이 받을 수 있는 관직 중 최하위였다.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의 창업자치고는 대단한 '굴욕'이 아닐 수 없는데, 북한의 장국종 같은 학자는 이 대목에서 자못 흥분한다.

북한 학계 "그럴리 없다" 펄쩍

"대강국을 자랑하는 발해국의 최고 주권자가 점차 찌그러져 가는 신라의 벼슬 등급, 그것도 제5위의 대아찬 벼슬 등급 따위를 받으려고 할 리 없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외교 의석 순차에서 신라를 발해보다 앞자리에 놓기 위해 이러한 역사 위조 행위까지 감행했던 것이다."

북한측의 분노는 당시의 신라·발해 '남북국'을 지금의 '남북한'에 겹쳐 보려는 듯한 사고방식을 노출시키고 있다. 또한 격분한 나머지 이것이 '외교 의전 분쟁사건'이 종결된 뒤에 작성된 글이라는 걸 잊고 있는 듯이 보인다.

북한측의 더 큰 허점은, 이 기록이 '발해 건국 직후'의 상황을 적었음을 무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과연 발해가 서기 698년 건국할 무렵부터 통일신라의 국력을 넘어서는 '대강국'이었을까?

시계를 당시로 돌려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가까스로 당나라 이해고(李楷固)의 추격군을 격퇴하긴 했으나, 발해는 근본적으로 당나라에 쫓기고 밀려나 세워진 국가였다. 대조영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과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가 한때 기반을 잡았던 요동 일대에서도 이미 후퇴한 상황이었다.

발해가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敦化)에 있는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데, 방어를 위해 산 위에 성을 쌓고 살아야 할 정도로 당나라의 재침공 위험 속에 놓여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뒤, 대조영은 사실상 빈주먹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최치원이 위의 글에서 '발해가 사마귀만한 마을에서 생겨났다'고 표현한 것이 과장만은 아니었다.

대조영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약소국' 발해의 생존이었다. 우선 돌궐(突厥) 같은 주변 세력으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대한 연합전선을 호소해야 했다. 신라로 사신을 보낸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당시 신라와 당은 나·당 전쟁 이후 상당히 서먹한 사이였다. 신라는 692년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고치라는 당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형식적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생국 생존 위해 몸 낮춘 듯

만약 신생국 발해를 둘러싸고 제2의 나·당 연합이 이뤄진다면?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서라도 통교는 필수였다. 대조영으로서는 굴욕이었지만, 신라 효소왕(孝昭王)은 5품 관등을 내리는 '거만한' 형식을 통해 발해의 실체를 인정해 줬던 것이다. 아마도 동모산으로 돌아오는 발해 사신은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음은 중국측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거란이 돌궐과 붙으므로 당나라 군대의 길이 끊겨 (대조영을) 토벌할 수 없게 됐다."(신당서) "대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술에 뛰어나 말갈과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구당서)

이후 30년 동안 발해는 영토 정복 사업에 힘을 쏟는다. 그러나 719년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2대 무왕(武王)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옛 국력을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무왕이 당나라와 내통한 흑수말갈을 공격하려 하자 왕의 동생 대문예(大門藝)는 "지금 우리 군사력은 고구려 전성기의 3분의 1에 불과하다"며 말렸던 것이다.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듣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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