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n=5535840

 
천문령 전투

고대를 살펴보면 신생국가는 언제나 전쟁을 수반하거나 전쟁의 결과로 탄생했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들과 벌인 전쟁의 결과로 탄생했었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제국은 수세기에 걸친 춘추전국 시대의 전쟁 끝에 생겨난 국가였다. 서한을 계승한 광무제 유수는 곤양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건국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구려는 부여와의 전쟁 속에서 탄생했고, 고려도 일리천의 전장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건국되었다.고구려를 계승하여 만주대륙을 지배했던 발해(渤海)도 마찬가지였다.

발해건국의 신호탄

서기 668년, 천년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는 수와 당을 상대로 한 70여년의 전쟁 끝에 국력이 소모되어 멸망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엘리트 계층 20만명을 강제로 끌고갔으며, 이들은 망국 백성으로서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끌려가지 않은 고구려 백성들도 점령군의 감시 하에 자유를 박탈당하거나 가까운 지역의 수용소에 갇혔는데, 이들은 고구려 속민이었던 말갈, 거란의 부족과 함께 당의 수용소에서 무수한 고초를 당했다.

물론 고구려는 침략자의 무시와 학대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당에 저항하고 고구려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보장왕은 은밀히 복국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안승과 검모잠이 이끄는 부흥군과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중심으로한 부흥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나 결집력이 없었고, 당의 대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혹한 제국의 기억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영향력 아래 있었던 제부족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부요인에 의해서 국가를 이루지 못하거나 국가를 이룰만큼 사회가 정치화되지 않아서 제국의 영향 아래 그 명맥을 유시할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주요 속민이었던 거란의 일부는 부흥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고, 일부는 새로운 동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당의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말갈도 마찬가지여서 종주국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에게 접근했다. 문무왕 15년(675년) 신라를 침공한 당나라의 이근행의 20만 대군은 상당수가 거란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제국질서의 개편 속에서 자신들의 소속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애썼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제국에 편입된 속민들은 동족과의 싸움이 불가피해졌다. 실제로 고구려 말기의 당의 용병으로 있었던 거란족들은 고구려의 용병으로 근무하고 있던 동족들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러한 속민의 비극은 전쟁사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1260년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인 잘루트에서 격돌한 맘루크군과 몽고군의 구성원은 모두가 카스피 해 근방의 투르크(돌궐)족이었고, 1453년 동방 기독교의 최후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재니서리(오스만 투르크의 최정예 정규병)들은 발칸지방의 기독교 가정에서 강제로 징집된 인원들이었다.

대게 거친 환경에서 단련된 이들은 군사적 효용가치가 높았기 때문에 제국의 체계를 가지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는 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거란과 말갈은 고구려의 군대에 편입되어 중국의 왕조와 싸웠고, 왜는 고급 문화를 제공받는 대가로 한반도 남부의 전쟁에서 백제와 가야의 편이 되어 싸웠다. 중국 역대 왕조도 흉노,거란, 돌궐 등의 기마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티베트 계열의 강족이나 회홀(위구르)족등 수많은 종족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이슬람 제국들도 중앙아시아의 기마족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유럽도 마찮가지였다.

용병에서 군대로

변방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제국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서서히 변화의 과정을 겪었으며, 군사적인 변화도 불가피해졌다. 원래 이들의 전투 방식은 전사를 내세워 습격하고 약탈하는 것이었지만, 이들 전사집단은 서서히 체계적인 군대로 바뀌어갔다. 다양한 전술,전략도 습득하여 원거리 사격에만 의존하던 방식에서 밀집전투 방식을 익히고, 유리할 때 공격하고 불리하면 흩어지던 단순한 방식에서 벗어나 조직적으로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대를 하나로 묶기 위한 이념도 공유했다.

문명세계에 엄청난 공포를 안겨주었던 변방민의 군대가 단순히 야만적인 전투집단이 아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국을 점령했던 거란과 여진, 몽골이나 이슬람권 전체를 석권했던 투르크족 등은 이미 전사의 집단이 아닌 하나의 체계화된 군대였다.

처음에 당에게 반기를 든 것은 거란인 들이었다. 696년 당의 영주도독 조문홰의 학정을 견디다 못한 거란인들과 고구려 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조문홰를 처단하고 당군과 맞붙었다. 이때 이진충(李盡忠)은 처남 손만영과 함께 거란인들을 규합하여 당군과 결전을 벌였는데, 지금의 하북성 북부 계지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당군을 섬멸했다. 그러자 해족을 비롯한 인근 유목민들이 거란족의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이진충이 병사하여 전력에 공백이 생겼지만, 손만영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의 북경 근처인 영평에서 당장 왕효걸이 이끄는 17만 대군을 무찔렀다.  

거란족의 대반란으로 당의 요동지방 지배력이 약화되자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과 말갈인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진(振)건국을 선포하고 고구려 부흥을 천명했다.

여기에서 거란인과 말갈인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거란인들은 당군을 연이어 격파하면서도 군사적인 승리에만 주력할 뿐,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연이은 승리의 결과로 주변 유목민들이 몰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국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로써 거란의 움직임은 단순한 반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당의 학정에 대한 복수심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그 복수심의 해소는 장안 으로 쳐들어가 당을 멸망시키기 전까지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고구려계 말갈인들은 이들보다 세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건국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일어났다. 국가의 건립에는 항상 행정체계의 수립과 군사들의 동원, 편제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처음부터 자신이 지도자라는 것을 분명히 한 걸걸중상에게는 대조영이라는 후계자가 있었다.

이에 비하여 고구려계 거란족을 이끈 이진충은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당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들은 고구려 제국과 당제국 주변에 있으면서도 '국가적 군사의 길'을 터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은 7세기 말 비록 막강한 세력을 떨치긴 하였으나 군사지평선의 한계를 넘지 못한 전사집단에 불과했다.

순망치한, 대조영의 위기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진충이 이끈 거란족과 대조영과 걸사비우가 이끈 고구려,말갈족은 일종의 순망치한(脣亡齒寒)관계에 있었다. 이진충이 하북지역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동의 반당 세력은 착실히 그 세력을 다질 수 있었다. 

거란의 기세에 눌려 애써 점령한 요동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당은 적대관계에 있던 돌궐의 묵철가한에게 사신을 보내어 용병을 요청했다. 당이 동궐을 끌어들이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돌궐의 출현에 거란의 휘하로 몰려들었던 해족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족은 결국 혼자 맞서는 거란보다 힘이 센 당과 돌궐을 택하였다.

이리하여 거란은 당군과 돌궐족, 해족으로부터 삼면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 싸움에서 거란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손만영의 심복이었던 하아소가 사로잡혔다. 손만영은 수십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가 그의 종복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치를 외면하고 복수심에만 불탔던 거란 군대는 이렇게 최후를 맞았다.

거란군을 전멸시킨 당은 그 기세를 몰아 요동에 있던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거란군의 전멸로 이들 세력도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당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회유하고자 두 사람에게 작위를 주어 각각 허국공과 진국공에 봉하려고 했다. 이에 걸사비우는 작위를 거절하고 저항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나 당에 귀화한 거란족 출신의 이해고를 앞세운 공격을 받고 걸사비우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대조영은 거란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지고, 당 세력이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동지였던 걸사비우마저 전사하자 요동지방을 떠났다. 이때 걸사비우의 휘하에 있던 말갈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천문령 전투의 서막     

천문령(天門嶺)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천문령 전투는 거대한 당의 연합군에 맞서 보잘 것 없는 유민으로 구성된 고구려, 말갈족이 대승을 거두어 발해 건국의 바탕을 마련한 사건이다. 천문령은 혼하와 휘발하 사이에 있는 장령자(합달령)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길림성(吉林城)남부를 가로지르는 용강산의 오도구 근처로, 용강산은 두 강을 사이에 끼고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그 동쪽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매복작전에 알맞은 지형이지만 매복작전에는 치밀한 사전준비와 함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요구된다. 당시 대조영이 이끈 무리는 전투원이 극소수에 불과했고, 군사훈련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험악한 산지에서 명령 체계를 유지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대조영은 첩첩산중에서 당군을 공격하기보다는 그들이 협곡을 빠져나오는 순간을 기다려 공격하는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천문령 같은 산지에서는 대규모 부대를 운용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구당서>>에 이해고가 '고개를 넘어 대조영을 추격하였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 대규모 전투가 당군이 천문령을 빠져 나온 다음에 벌어졌던 것임을 추측케 한다.

유민집단인 대조영군의 결정적인 약점은 기마전력의 부재였다. 적의 위협을 피해 이동하면서 많은 관리가 필요한 말까지 동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과 거란의 연합군은 막강한 기마전력을 자랑하는군대였기에 대조영은 당의 기마전력을 무력화 하면서 아군의 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전을 짜야 했다. 

대조영은 적의 기마전력과 보병부대를 분리한 다음, 보병부대를 각개격파하고, 고립된 기마부대를 습격하는 작전을 짰다. 이러한 작전에 알맞은 장소는 천문령을 빠져나와 오도구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지대로, 보병이 이동하기에는 편리했지만 빠른속도로 달리는 기병에게는 불리한 곳이었다.

공격은 산중의 협곡에서 시작되었다. 협곡에서는 기마가 원할히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군은 보병을 앞장세웠다. 이때 대조영의 명령을 받은 기습군들은 협곡 곳곳에 숨어서 당 기마병들을 저격하였고, 이들은 소규모로 습격을 한다음 사라져버렸다. 이해고는 습격을 당할때마다 암습자들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보병들을 닥달했고, 그 결과 보병들은 제대로 싸우기 전에 지쳐버리고 말았다.

길림의 벌판

전투는 이해고군이 천문령 계곡을 빠져나올 때쯤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해고군이 협곡의 출구에 다다르자 대조영군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마의 돌진을 막기위해 장애물을 세워놓았고, 대조영 자신이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직접 전투에 나섰다. 이에 이해고군은 주력군인 경기병을 뒤로 하고 중기병을 내세워 돌진했다.

중기병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대조영군은 후퇴하였고, 말갈 궁기병들이 화살공격을 하며 퇴로를 열었다. 이들의 화살은 중기병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였으나 견제하기에는 충분했다. 중기병이 퇴각하는 대조영군을 따라잡지 못하자 화가 난 이해고는 곧장 경기병을 앞세워 추격전을 벌였다. 이들을 모두 격멸하기 위하여 중기병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이해고는 눈앞의 적을 잡는 데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나머지 기마대와 뒤따라오던 보병부대가 분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기마대는 보병과 같이 움직여야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현대에도 보전합동의 원칙이 있듯이이른바 기보합동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중기병으로 구성된 기마대는 적진을 뚫는 데는 적합하지만, 그 충격력이 약해진 다음의 혼전에서는 의외로 약했다. 중기병이 적의 진영을 흐트려뜨린 다음에는 후속부대가 돌격하여 적을 섬멸해야 하는 것이다.

당의 경기병들이 말갈병들을 쫓아  구릉지역을 떠도는 동안 대조영은 예비로 남겨두었던 기마대와 보병을 총동원하여 뒤따라오고 있던 당의 보병들을 공격했다. 당의 보병들은 협곡에서의 추격전으로 이미 지친 상태였다. 고구려군의 보병은 이들을 앞에서 총공격하고, 말갈의 기병은 측면을 기습했다.

여기에 궁기병들의 사격까지 가해지자 창과 방패만 든 당의 보병들은 견디지도 못하고 모두 궤멸당했다. 
한편 당의 기병은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유인부대를 쫓아다니다가 소규모로 분산된 상태였다. 적의 보병을 궤멸한 대조영군은 유리한 지점으로 가서 당의 기병을 기다렸다. 이들은 결국 대조영군의 보,기,궁 합동부대에 의하여 모두 각개격파 당했다. 이해고는 불과 몇명의 병사만을 데리고 요동성 방면으로 달아났다.

정착군대의 힘

동아시아에는 동방과 중원, 그리고 북방이라는 세 개의 축이 있었다. 고구려는 동방을 이끌면서 중원과 각축전을 벌였고, 북방 유목민 세계는 중원과 고구려의 향배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와 당은 연이은 돌궐 정복으로 북방을 무력화한 다음,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개시했지만, 고구려는수와 당의 공격을 번번이 막아냈다. 그러나 절대적인 국력의 열세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고, 이로써 동아시아는 중원세력의 독무대가 되었다.

중원세력인 당은 돌궐,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주인이 되고자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당은 뜻밖에도 매초성(買肖城:현재 의정부인근. 675년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의 연합군이 당의 이근행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물리쳤다.)에서 신라에게 패하고, 갑자기 흥기한 토번(티베트)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이에 당은 동방 전체는 포기하더라도 요서, 요동과만주지역 만큼은 자신의 세력권으로 굳히기에 나섰다.

여기에 거란족과 고구려 유민, 말갈족은 강력히 항거하였다. 당은 이 지역을 지배하는데 마지막 장애물이 되는 이들 세력들을 없애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진충과 거란족은 한때 크게 위세를 떨치며 당을 위협하였으나 돌궐세력과 당의 연합군에 의해 지리멸렬되었다. 거란의 저항을 종식시킨 당은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을 공격해 또다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중원의 힘을 견제할 수 없었다.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은 반기를 들다 실패하여 중국의 벽지에 유배 중이었고, 백제는 이미 멸망하여 그 흔적조차 없는 상태였다. 고구려 왕실의 후예인 고안승과 그를 따르던 검모잠이 이끌던 고구려 부흥군도 패한지 오래였고, 이제 남은 것은 대조영뿐이었다.

대조영이 이끈 군대는 고구려와 말갈의 유민집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뛰어난 전술로 천문령에서 당군을 크게 물리쳤고, 전투의 결과로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만주지역을 점령하려던 당의 계획은 대조영으로 인해 좌절되었고, 실질적인 고구려의 부활이 이루어졌다.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p139~150 , 도서출판 수막새 : 서울 2005 

<출처:디시인사이드 대조영 갤러리>




천문령 전투 관련글
천문령 전투 - 김성남  http://tadream.tistory.com/252
천문령 전투 - 위키  http://tadream.tistory.com/253
발해의 운명을 건 천문령 전투 - 히스토리어  http://tadream.tistory.com/256
대조영·이해고의 숙명 '천문령 전투' - 부산일보  http://tadream.tistory.com/254
고구려 후신(後身) 발해는 천문령전투 결과였다 - 유석재  http://tadream.tistory.com/467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