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ohmynews.com/feminif/453920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
특별기고 2012/01/17 18:51 이프
  
이근안씨, 당신은 직업을 바꾸셨더군요. 고문기술자에서 목사님으로. 그리고 지난 달 30일 고문후유증을 앓던 김근태님(인권운동가/정치인, 1947-2011)이 파킨슨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보다 몇 달 전 역시 고문후유증으로 여겨지는 루게릭병을 앓던 김태홍선배(언론운동가/정치인, 1942- 2011)가 돌아가셔서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히셨습니다.

당신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느낀 황당함이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30여년전 나는 나를 물고문한 당신에게 “아무리 간첩을 잡는 일이라도 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을 하냐?”며 “직업을 바꾸라”고 말했죠. 아마도 당시에는 듣는 당신이 더 황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정말로 직업을 바꾼 것입니다.  

▲1980년 당시 같이 해직되어 도미하게 된 선배를 배웅하러 간 공항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고승우(80년 해직기자 협의회 대표), 정남기(전 언론재단 이사장), 이문승(전 연합뉴스 논설위원), 그리고 나.

칠성판 위에서 당신에게 물고문을 당했지요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건 1980년 7월 17일. 당시 나는 합동통신에서 2년차 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제헌절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날 새벽 불시에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고 난 순간적으로 편한 차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티셔츠와 바지차림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검은 안대로 눈이 가리운 채 승용차에 태워졌습니다. 그날 어딘지도 모르고 내가 끌려간 곳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사실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5.18 계엄확대 발표 이후 지명수배로 쫓기고 있던 당시 한국기자협회 회장 김태홍선배의 피신처를 소개해 주었던 터라 그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직장에서도 매일같이 계엄사에서 나온 사람들이 김선배를 잡기 위해 선배 동료 후배 동창 할 것 없이 모두 뒤지고 있었고 또 그들이 바로 내가 소개한 그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엘 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솔직히 사람 하나 숨긴 것이 무슨 그리 큰 죄이며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느냐 뭐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담담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얼마나 나이브했는가를 훨씬 나중에야 깨닫게 됐습니다. 그들은 기를 죽이려는듯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다가, 정중하게 ‘기자’대접을 했다가, 또 다시 뒷덜미를 잡고 물이 담긴 욕조에 머리를 쑤셔박았다가 하는 등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작전을 썼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동자)이 죽어나간 방”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고 나는 정말 다른 방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방에는 30, 40대의 건장한 남자들 여러 명이 몽둥이를 들고 둥글게 모여있었고 가운데는 칠성판이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게 칠성판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그 위에 올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누군가 돌아누우라고 했고 돌아누운 내 몸 위에 버클이 주루룩 채워지며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올라탔습니다. 그가 바로 당신 이근안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얼굴위로 수건이 덮어 씌워졌고 다음 순간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얼마 당하지도 않은 내가 고문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고문 이후의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물고문 한번 당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 몸이 물에 젖어 한 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이 몸이 떨려왔고 담요를 여러장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때 방에 들어온 다른 수사관들은 내 몰골을 보고 “얘 전기했어? 왜 이래?”하고 물었고 탁자위에 놓여있던 물컵(고춧가루가 반 잠겨있던)을 보고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그 때 경험한 추위는 실내온도와 전혀 무관한 추위였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일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김근태 고문의 폭로로 실체가 드러난 이근안에 대한 당시의 신문기사

아무 말 없이 내 한쪽 손을 꼭 잡아준 의사

거기서는 모든 일이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밥먹는 일도 큰 일이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밥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밥을 못먹는 내게 강제로 영양제라며 게브랄티같이 초콜렛색 당의정을 입힌 알약 두 개를 우유와 함께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자 또 식사가 들어왔는데 이번에는 돼지순대국같은 국이었습니다. 나는 비위에 안맞는 그 국물을 억지로 떠먹다가 결국 모두 토하고 말았습니다.

방안에 있던 변기에 먹은 것도 없어 액체만 게워 올렸는데 나중에 보니 검붉은 피같은 액체가 나왔습니다. 그걸 본 그들이 놀란 듯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놀랐습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한 나는 강제로 먹은 알약을 떠올렸고 그게 위속에서 녹아서 검붉게 나온 것이라고 혼자 결론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 죽으면 우리가 큰일”이라며 의사를 수배하느라 난리를 피웠습니다. 한참을 수배한 후에 수도육군병원의 군의관이라는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그는 들어오자 바로 내가 보는 앞에서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나를 진찰했습니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진찰하고 그리고 ‘쇼크’에 ‘탈진’이라고 진단내리고 링거를 처방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어인 일인지 방안에 그와 나 단둘이만 남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그의 눈길 때문에 그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날카로운 눈으로 내 온 몸을 살펴보던 그는 아무 말없이 내 한쪽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그런 손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단발머리 티셔츠차림의 젊은(당시 나는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운동권 학생이라고 추측을 했던 것 같습니다.

때도 아닌데 생리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일이 끝났나 보다 했습니다. 이미 조서는 다 꾸며졌고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관들도 와서는 잡담이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난감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때도 아닌데 생리가 터진 것입니다. 그 때처럼 여자라는 사실이 싫었던 때가 없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던 나는 결국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은 채로 나를 고문했던 당신을 불렀습니다.

“아저씨..... 저 생리가 터졌는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내게 생리대와 팬티를 사다 주면서 “내가 생전 여자 속옷을 사봤어야지. 가게 가서 얼마나 챙피했는지 아냐?”면서 마치 무용담을 털어놓듯이 호들갑스럽게 여자 팬티 사온 얘기를 동료들 앞에서 했던 것은 기억납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직업을 바꾸라’는 얘기를 하게 된 것은. 순진한 마음에 사람을 고문하는 직업을 가진 당신이 진심으로 안쓰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또 곤란한 일을 해결해준 당신에게 인간미를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당신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앞으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그 곳에서 5일을 있었습니다. 그 5일 동안 나는 가능하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첫날을 제외한 나머지 4일 동안은 그렇게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 곳을 지키는 헌병들 사이에 내 이력서(?)가 돌았는지 어떤 친구는 대학 후배라며 내가 갇혀 있던 방에 아이스크림을 사서 넣어주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는 수사관들이 퇴근하고 없는 밤중에 와서 자작곡이라며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검사 왈, “여자가 언론자유니 그런 데 신경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고 합니다. 김수근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 벽돌로 별장처럼 멋지게 지어진 그 집은 설계될 때부터 고문을 하기 위한 집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방마다 호텔처럼 욕조와 변기, 세면대, 침대가 갖춰져 있었고 천정의 사면 벽은 방을 감시하는 모니터 화면으로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에는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머리도 나갈 수 없게 좁고 긴 3중 유리창이 쳐 있었습니다. 나는 그 다음부터 김수근이라는 건축가를 싫어하게 됐습니다.      

그 방의 좁은 창문으로 보이던 바깥 풍경은 어쩌면 그리도 낯설었는지.... 비가 오고 있었고 멀리서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 치던 사람들을 보며 나만 혼자 세상과 유리되어 언제 그 세상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그런 막막한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빠졌는데도 세상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평화롭게 잘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가족도 알지 못하는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는 5일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용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5일 있다가 다시 서대문구치소로 옮겨져 20일 만에 검사의 기소유예 결정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한달만에 풀코스로 별(?)을 달게 되었고 사표도 쓰지 못하고 해직기자가 됐습니다. 그 때 나를 담당했던 검사는 내게 “여자가 언론자유니 그런 데 신경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남자였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당신이 성직자가 됐다니요?

내가 나이브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김근태님의 글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당신을 인간적으로 보고 어줍잖게 직업을 바꾸라는 말을 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들었던 고문기술자가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당신이 많은 인생의 곡절로 기독교 신자가 됐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그냥 독실한 신자가 되어 교회에 열심히 다니십시오.

내가 이제 와서,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후인 지금에 새삼 이런 편지를 쓰는 것은 과거에 내가 이랬다고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스스로 목사직을 내놓으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에게 목사 안수를 줬던 예장합동개혁 총회도 당신의 목사 안수 철회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출처:노컷뉴스

당신이 ‘반공목사’라니요? 마치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던 중세로 돌아간 듯한 으시시한 기분이 듭니다. 이 나라의 시계가 어떻게 가고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이근안씨, 남들이 당신을 목사직에서 끌어내리기 전에 스스로 그 자리에서 내려 오십시요.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면 차라리 청소부가 되어서 묵묵하게 자신의 죄를 씻고 또 씻으십시오. 아니면 당신이 일했던 남영동 대공분실 경비원으로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사죄하십시오. 고문기술자였던 당신이 해야할 일은 ‘반공설교’가 아니라 진심어린 ‘사죄’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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