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180728080023670
'친미'에서 '친일'로, 이완용이 나라를 판 대가는
권경률 칼럼니스트 입력 2018.07.28. 08:00 수정 2018.07.29. 14:59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8 - 이완용 : 부귀영화에 눈 먼 매국노 대명사
을사오적(乙巳五賊)! 1905년 을사늑약에 서명해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도록 한 다섯 명의 대신. 정미칠적(丁未七賊)! 1907년 나라의 법령제정권과 관리임명권 등을 일본에 바치는 한일신협약에 찬성한 일곱 명의 대신. 경술국적(庚戌國賊)! 최종적으로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 조약에 협조한 여덟 명의 대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은 구한말 나라를 망치고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치욕스러운 명단에 모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물이 있다. 이완용! 그가 매국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이유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악역으로 등장하는 이완익은 바로 그 이완용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캐릭터다.
그런데 이완용의 행적을 뜯어보면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그가 원래부터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드라마에서 이완익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미국을 위해 역관으로 일하다가 전향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이와 달리 역사 속 이완용은 뼈대 있는 양반가 출신인데 그 족적은 드라마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이완용은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 시교와 홍문관 수찬을 지내며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로 떠올랐다. 덕분에 그는 나라에서 설립한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고 1887년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박정양이 종주권을 주장한 청나라와의 외교 갈등으로 귀국하자 임시대리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890년 귀국한 이완용은 친미파의 선두주자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우부승지, 공조참판 등을 거쳐 1895년에는 박정양 내각에서 학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곧이어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는 친러파와 공모하여 고종의 아관파천에 관여했다. 물 만난 이완용은 외부대신, 군부대신 등 요직을 맡아 일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이 독립하면 미국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되겠지만, 합심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면 구라파의 폴란드처럼 갈가리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은 미국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에서 독립협회 창립위원장 이완용이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그는 독립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나라의 자주독립을 외쳤다. 하지만 독립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것인데 그는 외세에 기대는 이율배반으로 일관했다. 미국, 러시아 등 열강에게 이권을 넘기는 등 매국의 조짐이 진즉 싹트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이완용은 태세전환에 들어갔다. 오매불망 떠받든 미국은 여전히 대한제국에 곁을 내줄 조짐이 없었다. 그는 미국도, 러시아도 다 버리고 조국을 병탄하러 온 이토 히로부미에게 추파를 던졌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을 기꺼이 자임하며 나라를 판 것이다.
오늘날에는 ‘매국노’라는 표현이 널리 통용되지만 당시에는 이런 자를 ‘매국적(賣國賊)’이라고 불렀다. 적은 공격이나 응징의 대상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의열단은 ‘칠가살(七可殺)’,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부류 가운데 하나로 매국적을 명시했다.
실제로 이완용은 대표적인 암살표적이었다. 1905년 이래 을사오적암살단이 호시탐탐 그를 노렸다.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자 이를 건의한 이완용의 집이 백성들에 의해 불타기도 했다. 1909년에는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이재명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으나 운 좋게 살아났다.
그렇다면 신변의 위협이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완용의 사례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판다는 것은 대가를 구하는 행위다. 나라를 파는 ‘매국(賣國)’이라면 어떨까? 위험부담이 큰 만큼 엄청난 대가가 책정된다.
이완용은 1910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일제의 강제병탄 조약에 서명하고 ‘은사금(恩賜金)’ 15만 원을 하사받았다. 1907년 고종을 억지로 퇴위시키며 한일신협약을 맺을 때도 10만 원을 수령한 바 있다.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 가치를 환산해보면 어림잡아 수십억 원이다.
뒤로 받은 돈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구한말의 문인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매수공작금 수백만 원을 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학부대신으로 늑약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이완용의 몫이 적었을 리 없다.
거금을 손에 넣은 그는 지방의 비옥한 논밭을 대거 사들였다. 일제강점기 초에 이완용이 가진 땅은 여의도 면적의 2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시세에 따라 토지를 잘 팔아서 1920년대에는 경성 최대의 현금부자가 되었다. 세간에서는 현금 보유액만 300만 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는데 요즘으로 치면 수백억 원에 해당한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대가로 이완용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일본은 강제병탄 직후 한국인 고관대작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었다. 그는 백작이 되었다가 후작으로 승작하여 막대한 특혜를 누렸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부의장을 지내며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떵떵거리고 살았다. 어찌 보면 분하고 약 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의 지탄에 남들보다 더 출세하고 더 잘 살려고 한 게 무슨 죄냐고 항변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조선은 쓰러지고 있었고 자신은 외세를 끌어와 부축케 했을 뿐이라며…. 악(惡)은 어떤 의미에서 평범하다. 그것은 뿔 달린 악마처럼 괴이한 존재가 저지르는 게 아니다. 주변에 가득한, 누구나 탐하는 욕망에서 악은 출발한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도 출세지상주의와 물질만능 풍조가 길러낸 괴물이 아니었을까. 남들도 다 그러는데 나 하나쯤, 하는 생각이 ‘삐딱선’을 타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부른다. 살아생전 거머쥔 부와 명예가 컸던 만큼 역사에 새겨진 이완용의 주홍글씨는 더욱 뼈아프다. 역사의 대가는 죽음보다 지독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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