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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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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역은 고구려 유리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수도성으로 존재했던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수많은 전란을 겪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고구려는 집안 지역에서의 성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성 시기는 그 발전이 평탄하지만은 않은 시기였다. 동천왕 때는 위나라의 위협에 시달렸고 고국원왕 시기에는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대비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림왕대 국가체제의 재정비를 거쳐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복국가로서 그 위용을 동북아시아에 떨치게 되었다.
국내성이 위치한 현 길림성 집안시 지역에는 약 1만 2천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는 장군총, 고국양왕 혹은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태왕릉,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는 서대총 등 왕릉급 묘제들이 존재한다. [주]
혼강 유역의 졸본(환인)에서 압록강 유역인 국내(집안)로의 천도는 고구려사의 발전 방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는 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여건이 좋은 압록강변의 국내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중국 한나라 군현 세력으로부터 보다 멀어짐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최소화시키는 한편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여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었다. 이는 곧 국가체제의 정비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옥저(東沃沮) 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육로와 수로망을 장악하여 고구려가 태조왕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주 001
박혁문,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 정보와사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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