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40_0030_3270



마선구 천추묘(麻線溝 千秋墓)


지역 : 집안(集安市), 고분>계단식적석총

형태사항 : 높이: 11m 179점 석실 


천추총/천추묘 위치도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마선향 마선촌 2조.

중심지리좌표 동경 126°8'44.12", 북위 41°5'37.18", 해발고도192.09m.(吉林省 集安市 麻線鄕 麻線村 2組. 中心地理座標 東京 126°8'44.12", 北緯 41°5'37.18", 海拔高度192.09m)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13조거용장, 관야정
(烏居龍藏, 關野貞)
 
1935지내굉, 빈전경책, 매원말치, 삼상차남
(池內宏, 濱田耕策, 梅原末治, 三上次男)
기단 동면과 네 모서리는 원형에 가깝고, 네 변은 대체로 방위선과 일치(정확하게는 동쪽으로 10° 기울어짐). 네 변의 길이는 각각 190척이고, 기단의 동남단을 기준으로 할 때 높이는 10척 임. 구조와 형태는 태왕릉과 같고, 분구 보호석 2~3개가 세워져 있었다고 함. 계단은 3단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6~7단으로 추정함. 분구 정상부는 함몰되었고, 남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연도입구가 노출되었다고 함. 무덤 서북쪽으로 약 반정(半町) 떨어진 도로 좌측에 있던 민가에서 거대한 화강암 초석이 담장에 기대어 있었다고 함. 초석은 팔각형이고 꽤 정교하였다고 함. 이 민가의 남쪽 즉 무덤의 서쪽 일대의 낮은 지역에 강돌이 펼쳐져 있다고 하고, 건축유지가 있었다고 기록.
1936지내굉, 빈전경책, 매원말치, 흑전원차, 삼상차남
(池內宏, 濱田耕策, 梅原末治, 黑田源次, 三上次男)
조사기간은 9월 30일~10월 4일임.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마선구 제1000호 묘장이라고 편호하고, 간단히 JMM 1000으로 표기
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전가흔, 양건군, 고병곤, 손동문, 유설산, 왕지민)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傳佳欣, 梁建軍, 郜炳琨, 孫東文, 劉雪山, 王志敏))
통구고분군의 주요유적에 대한 환경정비보수작업을 실시. 이와 더불어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 등은 천추묘 주변에 대해 실측 및 묘 일부분에 대한 정리 작업을 진행하면서, 많은 과학적 데이터를 획득하였고, 더불어 대량의 유물들을 수습함. 작업을 통해 천추묘의 지질상황·현재상황·묘장형태·고고학적 현상·주변능역시설 등을 확인. 72일 동안 이루어진 천추묘의 조사 작업을 통해, 모두 1100여점의 유물들을 수집. 이 조사는 조사 및 실측이 주가 되었으나, 동시에 환경정비 및 보호조치 등도 실시함. 고고작업은 조사·기록·수집·묘 기초 정리·묘역 외 지역에 대한 시굴 등을 행함. 묘 정상부에 대한 조사는 계단의 층수와 형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만을 목적으로 분구적석 아래의 작은 범위에 대해서만 시굴조사하였고, 바로 원상복구를 함. 무덤의 기초조사는 서·남쪽 양면을 중심으로 진행함. 도면을 그리기 위하여 오랜 세월동안 무너져 내린 돌들과 잡물들을 묘의 한쪽에 정리하고, 업무가 끝난 후 바로 원상 복구함. 흘러내린 돌들을 정리하면서 발견된 유물 등을 최대한 수집하였고, 진흙은 모두 엄선된 것만 사용. 그리고 작업과정과 고고현상 전부 기록. 복원 등 정밀한 조사로 천추묘의 환경과 형태는 원래형태를 나타나기 시작.
1909~1910곡정제일, 율산준일
(谷井濟一, 栗山俊一)
 
1970년대 조사, 기록 보호조치.
1980년대 초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하고, 조사내용을 『集安縣文物志』에 기재.

구조 특징

 


무덤에서 “천추만세영고”라고 적힌 명문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關野貞이 “천추총”이라고 고분명을 붙였다고 함. 1966년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마선구 제1000호 묘장이라고 편호하고, 간단히 JMM1000이라고 표기.

발굴전 묘장 계단석은 마을과 가까웠기 때문에, 주민이 왕래하면서 심하게 파괴되었음. 묘 위에 있던 돌들은 구덩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있었음. 또한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운반해 가기도 함. 묘 동쪽 장대석 돌무지 또한 유실된 상태였음.


천추묘는 대형 계단적석석실묘로, 동변길이 67m, 남변길이 60.5m, 서변길이 62.6m, 북변길이 71m임.

무덤의 기초는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자연재해 및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 무덤 형태의 전모를 볼 수 없음. 동측 계단석에서는 1층 기초석과 무너진 호분석만 남아있음. 북측 계단석에서는 거의 전부가 결실, 파괴되었고, 지면은 밑으로 5m가 낮아짐. 서측은 묘 위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덮고 있어서, 서남모서리의 5층 계단만 볼 수 있음. 남측은 묘 위에서 흘러내린 돌들과 장대석이 같이 섞여서 덮혀 있는데, 이는 자연붕괴로 추정됨. 서변과 남변을 정리한 이후, 묘단 기단의 원래모습이 초보적이나마 드러났지만, 계단석의 이탈·외장 현상으로 인한 변형·붕괴·금이 간 곳 등으로, 묘장 측량이 어려웠음. 현재 남아 있는 기단석의 위치로 실측해보면, 동변 길이는 67m, 남변길이는 60.5m, 서변길이는 62.6m, 북변길이는 71m임. 그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측점은 서남모서리이고, 다음으로는 서북과 동북모서리임. 동남모서리각의 기단석은 밖으로 밀려 나간 상태임. 서북모서리각의 기단석은 비록 파괴되었으나, 지세가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자리 이탈이 그리 크지 않음. 동북 모서리돌은 결실되었으나, 붕괴된 호분석과 장대석을 통해 가정할 수 있음. 만약 묘장의 평면을 정방형으로 가정한다면, 천추묘의 한변길이는 63m로 볼 수 있음. 묘장의 남아 있는 높이를 측량할 때, 각변 중심점을 기점으로 측량해보면, 동쪽 높이는 7.9m, 남쪽 높이는 10.8m, 서쪽 높이는 10.9m, 북쪽 높이는 8.6m 임. 묘도가 향한 서변을 기점으로 할 때, 잔존 높이는 약 11m 임.


기초를 살펴 보면, 서남 모서리와 서변의 시굴갱을 통해, 무덤 축조 전에 0.4~0.5m 깊이로 땅을 팠음을 알 수 있음. 계단석 가장 아랫변 석재의 바깥쪽은 가공하였고, 제1층 계단과 수직인데 반해, 다른 층의 석재들은 안으로 들여 쌓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음. 이 층의 장대석의 두께는 0.7m 임. 서남 모서리돌은 아랫부분이 자연적으로 갈라진 0.7m 두께의 긴 장대석으로 위에 둥글게 반가공한 면이 없어서 지하에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임. 무덤의 거대한 압력으로 인해, 기초석은 대부분 황토층에 덮혀 있어서, 무덤 기초 형태는 알 수 없음.


천추묘는 현재 5단의 계단이 남아 있음. 서변의 가운데 부분이 가장 양호하게 보존됨. 이는 도굴로 인한 파손 시, 묘실의 석재가 서쪽의 가운데 부분에 쌓였기 때문임. 서측 1단 계단은 5층으로 되어 있음. 서남 모서리의 제1층 계단은 지면에 반이 보이는데, 원래 6층으로 쌓았음을 알 수 있음. 바닥층에 있는 돌은 모두 매우 큰데, 가장 큰 것은 길이 2m 정도, 일반적으로는 1.4m 이상, 두께는 대부분 0.5m 정도임. 층과 층 사이는 서로 겹치지 않게 쌓았고, 매 층은 0.07~0.15m 안으로 들여 쌓음. 석재는 정밀하게 가공하여, 모서리가 분명하고 표면은 약간 둥글림. 내면은 다듬지 않아 자연 그대로임. 재질은 황갈색의 화강암이 절대다수를 차지. 제2층에서 제4층까지 석재는 점점 작아지고 두께 또한 얇아지지만, 여전히 커다란 돌들임. 최상층인 5층 석재에서는 더욱 길어지는 현상이 보임. 서변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장대석 2개를 볼 수 있는데, 모두 3m 이상이고, 두께는 0.36m 임. 서변 1단 계단은 기초가 안정되지 않아 내려앉아서 기복이 있음. 전체높이는 약 2.8m이고, 평면에서 약 0.5m 안으로 들어감. 남변 1단 계단의 서반부는 아직도 보존이 양호하나, 중부~동쪽부분은 전부 붕괴됨. 위에 있는 돌 아래 장대석이 흐트러져 있어 측량할 수 없음. 서변을 정황을 볼 때, 5층으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 동변의 계단은 오랜 시간에 걸친 흙 채취와 여러 차례의 도굴로 인해, 여러 개의 큰 돌들이 지면으로 떨어짐. 남아 있는 장대석의 크기는 서·남면 바닥층의 석재와 비교해보면 약간 얇음. 이는 동변의 지세가 약간 높기 때문에, 얇은 돌을 채용한 것으로 추정됨. 동변에서 북쪽으로 치우진 곳에 계단석 여러 개가 남아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가 약 3m 정도이고, 두께는 0.6m 임. 동변의 제1단 계단은 2층만이 남아 있음. 북변 1단 계단은 동북 모서리에만 여러 개의 돌들만 남아 있고 모두 산실되거나 원자리를 이탈. 북변은 계단석의 파괴가 가장 심함. 1단 계단에 쌓인 돌에서는 모서리를 보수한 흔적을 흔히 볼 수 있음. 즉 계단석 규격을 정하고, 틈 사이에는 크기가 다른 석재를 끼워 넣었음. 그렇게 함으로써,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면적을 최대한 넓혔음. 변 윗부분의 계단석은 길이가 1.2m, 두께는 0.15m 임. 2단 계단은 서·남·동면에 일부 남아 있음. 서변의 2단 계단은 4층으로 쌓아 올렸는데, 1단 계단 꼭대기에서 안으로 0.9~1.3m 들여 쌓음. 석재는 일반적으로 길이 약 1m, 두께 약 0.3m 정도임. 서로 겹치지 않게 쌓았음. 층 사이의 들어간 부분은 명확하지 않음. 모서리 석재는 약간 크고, 전체 높이는 약 1m 정도임. 3단 계단은 서변의 남쪽부분과 동남 모서리에만 남아 있는데, 모두 2층이 남아 있음. 2단 계단 꼭대기에서 안으로 0.8m 들여 쌓았고, 층 사이도 약간 들여 쌓았음. 석재는 2단 계단에 사용된 석재와 거의 같고, 높이는 0.6m 정도임. 3단 계단 이상의 석재는 모두 정밀히 가공된 작은 장방형 석재로, 5개의 면은 평평하게 가공하였고, 표면은 약간 곡선임. 일반적으로 길이는 0.5~0.7m, 두께는 0.2m 정도임. 제4단 계단은 서남각과 서변에서 1층만 볼 수 있는데, 하반부는 쌓여진 돌들에 묻혀 있음. 3단과 4단 사이의 높이차는 0.6m 임. 제3단 계단에서 안으로 1m 정도 들여 쌓음. 제5단 계단은 몇 개의 계단석만 남아 있는데, 이미 원래자리를 이탈하였음. 측정할 수 있는 높이는 0.7m 임. 4단 계단에서 안으로 0.8m 정도 들여 쌓음. 2단 이상의 계단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은 원인은 축조할 때는 제일 좋은 석재를 사용하였지만, 많은 석재들이 도난을 당했기 때문에, 무덤의 외면은 매우 크게 파괴될 수 밖에 없었음. 2단 계단석 이상은 강자갈로 덮었는데, 이는 기존의 계단석재가 외부로 노출된 장군총의 상황과는 다른 모습임. 정교하게 가공된 계단석아래에 아직 기초가 남아 있음. 시굴갱을 통해, 계단의 기초는 굵은 산돌을 장대형으로 가공하였음을 알 수 있음. 간혹 큰 강자갈과 함께 사용됨. 깊이는 상세하지 않음. 계단석의 높이·들여 쌓기·묘정상과의 거리 등을 참고·분석해 볼 때, 천추묘의 계단은 최소한 10단 이상임.


태왕릉 및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돌이 묘장 주위를 기대면서 보호하고 있음. 석재는 대부분 화강암이고, 형태는 장방체임. 비스듬히 기대여 세우는 방식으로 축조하여 계단에 힘을 가하여도 밀리지 않게 함. 서남모서리의 호분석은 지금도 세워져 있음. 석재는 기타 다른 호분석과 달리 석영알갱이가 들어간 회색의 암석임. 무덤의 외장력을 막기 위해 경사져 있으며, 호분석이 바로 서있거나 약간 밖으로 기움. 거석은 높이 3.2m, 너비 1.6m, 두께 1m 정도임. 서변에서 남쪽으로 두 번째 호분석은 하반부만 남아서 묘에 기대어 있는데, 남아 있는 높이는 1.7m 정도임. 서변 중간에 있는 호분석이 가장 큰데, 2003년 진흙을 제거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냄. 호분석은 황색의 화강암으로, 표면은 빛이 나고 깨끗하며 평평함. 자세히 보면 갈았던 흔적이 있는데, 일부러 가공을 한 것인지, 아니면 운송 중 마찰로 인하여 형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음. 석재는 장방체임. 전체높이는 3.6m, 너비는 2.1m, 두께는 1.4m 임. 이 호분석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서쪽 계단에서 이 부분만 원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음. 또한 양쪽으로 뻗은 부분은 바깥쪽으로 최대 2m까지 이동함. 북쪽으로 첫번째, 두번째 호분석은 부서져 지면에 떨어지면서, 묘를 보호하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함. 남변에는 서쪽으로 2개의 호분석이 있는데, 모두 부서지거나 무너져서 지면에 떨어져 있음. 정 가운데와 동쪽에 있었던 호분석은 흘러내린 돌 중에 파묻혀 있을 것임. 동변의 호분석은 남·북으로 2개가 있는데, 묻혀 있음. 북변에는 호분석이 보이지 않음. 서변에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5개의 호분석을 볼 때, 원래는 묘 주위에 20개의 호분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묘 정상 중앙에 비교적 거칠게 가공된 석재 2개가 남북방향으로 놓여 있음. 그 가운데 큰 석재는 길이 2.3m, 너비 0.6m의 장방체임. 이 석재들은 묘도의 덮개돌 혹은 문미석으로 보임. 현재 묘장 정상부 중앙에 작은 강자갈면의 범위와 형태를 보면, 강자갈 범위는 동서 길이는 10m, 남북 길이는 7m로 추정. 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참고해볼 때, 묘실바닥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추정됨. 이러한 모습들을 볼 때, 천추묘에 묘실이 있었으나, 이미 파괴된 것으로 추정. 천추묘와 비슷한 태왕릉과 장군총에서 모두 석실이 존재했다는 점도 천추묘에 석실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함. 2003년 서변에 흘러내린 돌들을 정리했을 때, 돌들 중에서 정교하게 갈았던 회색암 석판 수십 점이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고, 일부는 짜맞추는 홈이 있음. 1991년 태왕릉에서 발견된 가옥형 석곽자료를 보면, 재질·형태·규격 등 여러 방면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임. 이를 통해 천추묘에도 이러한 종류의 석곽이 있었으며, 석곽이 안치된 석실로 추정됨. 다만 의혹스러운 것은 석실을 축조할 때 사용된 석재가 모두 사라졌고, 거대한 천정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임. 어쩌면 서변에 흘러내린 돌들 중에 천정석의 잔여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나, 참조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음. 분구 위의 석재들은 대부분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을 것으로 분석됨.


묘 서변 1단 계단석 윗면에서 2단 계단 정면에 기대어 세워진 3개의 입석판이 발견됨. 석판은 회암으로 재질은 부드러워 부서지기 쉽고, 옅은 녹색임. 장방형 석판으로 가공하였는데, 높이는 0.6~1.2m, 너비는 0.5~0.7m, 두께는 0.1m 임.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가 다른 석판이 서·남 양변의 돌무지 중에서도 여러 차례 발견되었는데, 당시 수집된 양은 약 2입방미터 임. 같은 현상과 유물이 서대묘와 태왕릉에서도 보임. 서대묘에서는 북변 1단 계단 위에 석판 20여개가 가지런히 빽빽하게 세워져 있고, 태왕릉 계단 정면에도 같은 종류의 석판이 세워져 있음. 1998년 장군총 1호배장묘 기단석 중간에서 석판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묘 측면에 있음. 장군총 서변 계단 틈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석재 잔편을 볼 수 있음. 이로 보아 당시에 무덤들을 축조할 때는, 모두 이러한 석판을 세웠던 것으로 보임. 석판은 재질·위치·묘장 구조와 관계없이,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의미를 담은 상징물로 추정됨. 혹은 제사·상징물과 관련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석판은 장천 1호묘·장천 2호묘·연화묘 등의 묘문에서 사용된 석재와 같은데, 어쩌면 입석판 현상의 계발로 해석될 수 있음.


천추묘 위에는 장대석재 1개가 남았는데, 묘 꼭대기에서 서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반쯤 묻혀 있음. 대체로 묘장의 서변과 평행. 과거에는 묘도의 덮개돌 혹은 문미석으로 추정하였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를 볼 때, 이러한 석재는 석광의 개석으로 추정됨. 2003년 7월 태왕릉의 묘도 보수작업 때, 묘도 서변에서 같은 종류의 석조가 출토되었는데, 문미가 아닌 석광의 덮개돌이었음. 석광은 태왕릉에 남아있는 묘도입구에서 동쪽으로 2m 떨어져 있었음. 내부구조 및 특성은 자세히 알 수 없고, 틈 중에 석광으로 보이는 비교적 큰 공간이 있는데, 기타 다른 흔적을 알 수 없는 한, 부장용의 석광이라고 볼 수 있음. 천추묘에 남아 있는 이러한 석재는 석광이 드러난 흔적 혹은 남아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음.


묘의 서·남변 정리과정 중에, 기호가 새겨진 계단석재 수 개가 발견됨.


기호에는 하나로 된 것과 조합된 것 두 종류가 있음. 하나로 된 것은 모두 “#”자이고, 조합된 것은 두 “#”자와 “工”자가 합쳐짐. 하나로 된 것은 서변 1단 계단 제4층석 좌측 아래 각에 남아 있는데, 모두 “#”자 기호임. 나머지는 모두 흘러내린 돌 중에서 보임. 기호가 새겨진 석재는 1단 계단에서만 볼 수 있는데, 경계선 혹은 위치를 나타내는 전용석으로 추정됨. 서측계단 중남부, 서남각에서 약 21m 떨어진 지점으로, 1단 계단 제4층석 좌측에 음각으로 새긴 용 형상 도안이 발견되었는데, 높이는 23㎝이고 너비는 30㎝ 임. 용 도안은 꼬리는 없지만, 머리·몸·앞발까지 그려져 있음. 그 풍격은 북조시기에 보이는 형태임. 용의 수염·입과 몸체가 연결되었고 머리는 북쪽을 향함. 방향은 묘도방향과 일치. 그 오른쪽에 쌓인 돌 왼쪽 윗부분에는 두줄로 음각한 마름모가 있음. 같은 묘에서 발견된 문자벽돌의 화엽도안과 유사함.


천추묘에서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음. 석기류는 마노구슬과 석곽구조물들이 출토. 석곽구조물은 수십점이 출토되었는데, 가옥형 곽실의 잔편임. 석곽구조물은 회암을 정밀하게 갈아서 만듦. 파손이 심하여 부위는 자세히 알기 어렵지만, 태왕릉에서 발견된 옥형석곽구조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함.


2003년 조사작업에서, 기와조각 중에 명문기와를 가려냈는데, 대부분 “王”, “上”, “下”, “前”, “後” 등의 글자가 한글자씩 새겨져 있었음. 그 중 “王”자 기와는 천추묘의 피장자신분이 고구려왕임을 명백하게 설명해 줌. 그 이외의 글자들은 위치를 표시한 것임. 이 외에 인물·기년·지명 등이 기재된 기와편들이 발견되고 있음. 부호기와와 모인문기와도 출토되는데, 절대다수가 수키와 정면에 새겨져 있음. 일부 부호·기호는 숫자 혹은 수량일 가능성이 있으나, 일부는 의도가 불분명함.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은 가로 3줄과 가로 4줄로 나타나는 형태이고, 일부 5줄 이상이 나타나는 것도 있음. 각획은 비교적 자유로움을 수발함. 휘어진 면에 새겨져 있고, 새겨진 깊이가 적당한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장인이 있었다고 분석됨. 천추묘 붕괴 후, 묘 위에 있던 많은 기와들이 파괴되면서, 묘 위와 묘 주변에 흩어짐. 2003년 정리하면서 나온 기와무지들은 약 9입방미터에 이르는데, 원래 수량은 이보다 두 배에 이른다고 추정됨. 기와는 약 100여점 가까이 출토됨. 천추묘에서는 암키와·수키와·당수와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암키와와 수키와가 약 95% 이상을 차지함. 암키와와 수키와의 태토 및 색깔은 대다수가 가는 모래의 회색이고, 소성온도는 비교적 높으며, 규격도 비교적 통일됨. 색깔은 대다수 짙은 회색이 대부분이고, 옅은 회색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극히 일부로는 황색과 홍갈색도 보임. 후자의 경우 큰 조각편들은 보이지 않는데, 불에 타서 변색된 것이 아닌지 의심됨. 표면은 대다수 광택이 나고 무늬가 없음. 일부에서 가는 승문이 있는 기와도 있음. 배면에는 모두 포문이 있음. 당수와의 형태는 길고 평평함. 외면은 짧고 평평하며, 내면은 원호의 사변(斜邊)으로, “당구(當溝)”라고도 부름. 대부분 암키와는 모제이고 약간 구운 것도 있음. 태토와 색깔은 모두 가는 모래의 회색으로, 내면에는 포문이 있고, 소성온도는 비교적 높으며, 일부는 아직 백회가 묻어 있음. 현재 26점이 출토되었으나, 모두 파손됨. 당수와는 환도산성 궁전지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고대건축물을 보면, 집의 주척(主脊)과 암키와의 결합부분의 빈틈에 사용. 2003년 조사 중에 약 300여점의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이 파손된 상태였음. 형태에 따라 4등분의 권운문 와당(A형), 8등분의 권운문 와당(B형), 연화문 와당(C형) 등 3가지로 나눌 수 있음. 그 가운데 4등분의 권운문 와당과 8등분의 권운문 와당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적음에도 불구하고, 각 형태의 차이는 비교적 많게 나타남. 4등분 권운문 와당 가운데 Aa형은 1점, Ab형은 3점, Ac형은 1점, Ad형은 2점, Ae형은 1점, Af형은 1점이 출토됨. 8등분 권운문와당 가운데 Ba형은 5점이 출토되었는데, 팔등분권운비금문임. Bb형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팔등분권운비금문과 부호가 뒤섞여 있음. Bc형은 2점, Bd형은 3점, Be형은 7점, Bf형·Bg·Bh형·Bi형은 각각 1점이 출토. 이러한 와당은 천추묘에서 집중적으로 보이고, 천추묘와 가까운 마선구2100호묘에서는 Ba형의 와당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어떠한 원인이 있을 것임. 연화문 와당은 2003년 조사 중 수백점이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파손되어 복원이 어려움. 하지만 육판연화문이고, 고부리고곽(高浮雕高廓)이며, 당심이 반구형이고, 화판이 반리화엽형(半雕花葉形)으로 중간에 3조의 호능선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음. 연화문 와당은 2조의 돌출선으로 구역을 나누고 있는데, 각 판의 화엽 윗부분 양 옆에는 둥그런 돌기가 있음. 둥그런 돌기는 당심에도 있음. 와당의 직경은 약 16.5㎝ 정도인데, 개별의 크기는 와신과 결합할 때 조금씩 변화를 줌. 두께와 곽의 높이는 차이가 있음. 일부 연화문와당의 표면에 주색 안료가 남아있고, 대부분 백회흔적이 있음. 연화문와당은 형태·규격 등이 매우 유사하지만, 제작흔적의 세밀한 차이에 따라 3종류로 나눌 수 있음. Ca형은 중간에 서로 합쳐지는 합범이 형성되며 합봉선이 명확함. Cb형은 측면에 합쳐지는 합범이 있고, 합범선은 호곡을 띠면서 대칭. 연판은 각각의 연잎들이 뾰족하게 분리되어 있음. Cc형은 합범흔적이 없음.


모제 명문벽돌은 2003년 묘장주변을 정리할 때, 300여점이 수집되었는데, 대부분 서변과 남변의 흘러내린 돌무지 중에서 수집되었음. 명문벽돌은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명 벽돌과 “보고건곤상필(保固乾坤相畢)”명 벽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음. 두 명문벽돌 모두 길게 네모난 판 모양이고, 긴 측면에는 문자가 있음. 양끝부분은 비스듬히 잘려져 있고, 대부분 백회 흔적이 있음. 대부분 파손되어 붙이기가 쉽지 않음. “천추만세영고”명 벽돌(A형)은 문자형태에 따라, 7종류로 나눌 수 있음. Aa형은 90점으로 수량이 가장 많음. Ab형은 40점 출토되었는데, 태토와 색깔은 가는 모래의 회색이고, 소성온도는 비교적 높음. Ac형은 32점이 출토되었는데, 형태는 약간 길고 너비는 좁음. Ad형은 26점이 출토되었는데, 태토와 색깔은 모두 가는 모래의 회색임. 양끝부분 좌측은 비스듬히 잘려짐. 자곽에 볼록한 단선이 있고, 문자 사이를 두 선으로 나누고 있음. 문자체는 Ab형에 가깝고, 필획은 고르지 않음. 그 중 ‘만’과 ‘세’ 간의 거리는 가깝고, “固”자 안에 있는 “古”자의 세로획은 갖추지 않는데, 어떠한 뜻이 담겨져 있다고 추정됨. Ae형의 태토 및 색깔은 모두 흑회색의 가는 모래이고, 소성온도는 비교적 높음. Af형은 12점이 출토. Ag형은 22점이 출토되었으나, 완전한 형태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음. 소성온도는 비교적 높음. 글자가 반대로 나타나고 있음. 대부분 성형 후 표면을 두들겼는데, 눌러서 평평한 흔적이 있음. 어떤 것은 ad형과 같이 기와 양측에 위치해있는데, 폐품으로 추정됨. Ah형은 Ag형과 매우 유사한데, 글자 또한 반대로 나타나고 있음. 매우 적게 출토되었고, 그나마 대부분 파손되어 복원할 수 없음. 글자체는 대부분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여 판별하기 어려워, Ag형과 구분하기 어려움. 길이는 다른 형태의 문자벽돌과 같다고 추정됨. 이러한 형태의 대부분은 폐품이고, 대부분 성형 후 표면을 두들겨서 평평하게 한 것이 특징임. 글자는 보일까말까 할 정도임.


“보고건곤상필”명 벽돌(B형)은 모두 35점이 출토. 형태는 장방형의 판모양으로 “천추만세영고”명 벽돌과 같으나, 크기는 “천추만세영고”명 벽돌보다 작음. 양끝부분은 비스듬히 잘려져 나감. 긴 측면에 글씨가 있음. 대부분 묘 서측의 흘러내린 돌무지에서 출토되었는데, 파손이 심하여 복원하기가 어려움. 문자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음.


A와 B형 두 명문벽돌은 대부분 묘의 서측에서 출토되었고, 그 다음으로는 남측에서 출토되고 있음. 이러한 현상은 천추묘의 묘실이 서향이라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음. 이렇게 길어가 있는 벽돌은 중국 동한~남북조시기의 장식벽돌을 모방한 것으로, 그 기능 또한 장식용이라고 할 수 있음. 많은 문자벽돌에는 백회가 들러 붙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음.


 

역사적 의미

 

천추묘는 계단적석석실묘로, 계단수는 10단정도이고, 계단과 묘실사이에는 태왕릉처럼 완만한 경사가 있음. 묘 위에는 기와를 얹고 벽돌로 장식한 구조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함. 묘실은 석실구조로, 내부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가옥형 석곽이 있고, 별도로 수장광이 있거나 아래층에 묘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 묘 계단 위에는 제사와 관련된 석판이 세워져 있고, 묘 주위에는 거대한 호분석이 있으며. 전역에 돌이 깔려져 있고, 담장이 둘러쌓았음. 1940년대 일본학자 藤田亮策은 묘 동쪽에서 3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좁고 긴 장병형의 돌무지에 대해, 크기가 서로 비슷한 배총군이라고 기록함. 이 배총군에는 붉은색의 고구려 기와가 분포되어 있었는데, 그 색깔은 묘상의 회색기와와 벽돌과는 다른 것으로, 무덤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다른 종류의 건축물로 추정됨. 이러한 형태의 유적은 태왕릉 등 기타 왕릉의 제대와 극히 유사한 것으로, 천추묘에도 제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확인되지 않음. 또한 왕릉의 건축구조물이 모두 회색이라는 것은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증명된데 반해, 적색 기와조각들은 다른 왕릉 제대의 고고학적 모습과는 부합하지 않음. 다만, 적색기와가 나중에 불에 타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으며, 혹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으나,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음. 묘 남쪽에는 담장이 1단 남아 있고, 아울러 “문지”가 남아 있음. 그 구조를 보면, 담장은 기초가 있고, 담장 안쪽으로 배수구가 있음. 담장 중간에 장방형 대가 돌출되어 있으며, 바깥면은 담장과 평행하며 작은 문이 있음. 문은 4주 3간식이고, 방형 기둥이며, 기와는 보이지 않는데, 중요건축일 가능성이 있음. 이러한 유적은 혹 광개토대왕비의 나오는 “수묘주소”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음. 묘역에 깔은 돌은 고구려 왕릉의 보편적인 특징임. 천추묘의 포석은 서변에만 남아 있는데, 범위가 명확하고 형태는 완전하여, 능역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참고가치가 있음. 포석은 산돌인데, 태왕릉에는 산돌과 강자갈이 깔려 있고, 장군총에는 강자갈이 깔려있는 것과 차이가 있음. 이는 연대상의 차이로 보임.


연대 판단의 근거로 먼저 구조를 들 수 있음. 계단석실묘가 고구려왕릉 발전의 완성된 형태라고 볼 때, 천추묘는 고구려 왕릉의 변천과정에서 계단석실묘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음. 계단석광묘인 서대묘 ·마선구2100호묘·우산하992호묘와 비교해볼 때, 천추묘는 묘실이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확연히 일보 진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음. 태왕릉 및 장군총과 비교하였을 때, 천추묘 계단석은 그 가공이 약간 조잡하고, 바깥가장자리에 이동을 막기 위한 볼록하게 솟은 돌기가 없다는 점에서 비교적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음. 또한 태왕릉과 비교하였을 때, 묘역 포석과 능원을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아서 이를 종합해 볼 때, 천추총은 태왕릉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벽돌과 와당, 기와는 천추묘와 태왕릉에서 모제의 문자벽돌이 출토되었는데, 능묘의 영원한 보존을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 또한 양 묘 모두에서 육판연화문 와당이 출토되었는데, 천추묘는 화엽이고, 태왕릉에서는 화엽과 화뢰가 함께 출토되었음. 화엽 연화문 와당은 태왕릉과 천추묘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어서 천추묘가 태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고 있음. 이외에도 천추묘에는 광개토대왕대의 연호인 “영락”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편도 있음. 田村晃一은 천추묘 출토 연화문 와당을 태왕릉 출토 와당과 장군총 출토 와당 사이에 위치짓고, 장군총을 5세기 전반의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천추묘를 4세기 말, 태왕릉을 4세기 중엽으로 연대비정한 바 있으나, 현재는 천추묘가 태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임. 천추묘에서는 명문은 없으나, 태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형태의 동령이 출토되었음.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들은 모두 광개토대왕 시기에 천추묘 축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임. 태왕릉과 천추묘의 매장 현상과 문물 제도상의 유사함은 고구려왕릉 가운데에서도 특수함.


일찍이 천추묘·태왕릉·장군총 등 3기 묘의 연대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는데, 천추묘는 고구려 제18대왕 고국양왕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제기됨. 고국양왕은 휘가 이련이고, 고구려 제19대왕인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데, 384년에 즉위하여 391년에 죽어, 재위기간은 고작 8년임. 과연 그 기간 중에 천추묘와 같은 광대한 무덤을 축조하였을런지는 의심스러움. 8년의 짧은 기간에 완공은 가능하지 않음. 고국양왕은 광개토대왕과 특수한 부자관계로, 광개토대왕은 천추묘 축조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음. 그러므로 천추묘와 태왕릉에서 보이는 유적과 유물은 모두 상응된다고 추측됨. 두 묘는 형태가 같고, 규모는 비슷하며, 능역시설이 일치하는 등 고고학적 현상은 놀랍도록 비슷함. 비록 두 묘가 일찍이 도굴을 당하였지만, 두 묘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증거는 아직 남아 있음. 이들 현상을 종합해볼 때, 천추묘가 태왕릉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고, 두 묘주인의 특수한 관계 또한 확인할 수 있음. 고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천추묘가 태왕릉보다 이름. 중국학계는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며, 이보다 이른 시기에 비정되는 천추묘는 고국양왕릉으로 비정함(魏存成). 반면 張福有는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지만 천추묘는 마선구 고분군에 해당되므로 ‘고국양’이란 장지명을 가진 고국양왕은 태왕릉 인근의 우산하0540호묘를 비정하고, 천추묘는 소수림왕릉에 비정함. 한편 한국학계에서는 집안지역의 왕릉급 초대형 적석묘에서 출토된 권운문와당의 분석을 통해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의 순서로 조영된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특히 권운문와당의 편년에 따라 각기 고국원왕릉, 고국양왕릉,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여호규) 앞서의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의 축조순서와 『三國史記』 장지명의 분석에 근거하여 왕릉을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국원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등이 국강상 장지명을 지녔으므로 광개토왕릉비가 위치한 일대 지역을 국강상으로 설정하여 태왕릉과 장군총을 고국양왕릉과 광개토왕릉에 비정하지만 천추총은 국강상이 아니라 서천(오늘날, 마선하)에 위치하므로 ‘소수림왕릉’에 비정하였고 국강상에 위치한 고국원왕릉은 태왕릉과 장군총이 자리한 지역의 초대형 무덤가운데 우산하0922호묘로 본 것이다.(임기환) 東潮는 고분의 축조 순서를 태왕릉→천추묘→장군묘로 보고, 장군묘는 광개토대왕릉, 천추묘는 고국양왕릉으로 보고 있음.


 

자연환경

 

집안시구에서 약 3.5㎞ 떨어진 마선하 동안에 위치. 압록강 우안 대지 북쪽 가장자리의 높은 언덕에 위치. 언덕은 황토퇴적층으로, 토층의 두께는 약 8m 임. 토질이 순수하여 1940년대부터 벽돌․기와 등을 굽기 위한 채굴로 인해, 동서 양면 토층은 심하게 유실되어, 원래지면보다 3~5m 낮아짐. 위치한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음. 가장 낮은 서변 산수면 해발고도는 180.83m, 남변방향은 250° 임.


동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에 마선구2378호묘가 있음. 북쪽으로 약 800m 떨어진 지점에 마선구2100호묘가 있음. 서북쪽으로 약 1.3㎞ 떨어진 지점에 마선구0626호묘가 있음.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지점에 서대묘가 있음.


 

유물정보

 

金製泡飾 1점 外 金器類 2점. 金銅製冠飾 1점, 金銅製 花瓣形 雲珠 9점 外 金銅器類 28점. 銅製鈴 3점. 刀子 1점 外 鐵器類 23점. 마노구슬 1점 外 石器類 5점. 蓋 1점 外 土器類 1점. 瓦類(瓦當類). 塼類.


 

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田村晃一, 「高句麗の積石塚の年代と被葬者をめぐっいて問題について」『靑山史學』 8, 靑山學院大學文學部史學科硏究室, 1984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余昊奎, 「集安地域 고구려 超大型積石墓의 전개과정과 被葬者 문제」『한국고대사연구』 41, 2006

· 東潮, 「高句麗王陵と巨大積石塚:国内城時代の陵園制」『朝鮮學報』 199·20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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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高句麗王陵通考』, 香港亞洲出版社, 2007

· 魏存成, 「集安高句麗大形積石墓王陵硏究」『社會科學戰線』 2007-4, 2007

· 東潮, 「高句麗王陵と陵園制-国内城~平壌城時代」『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 桃崎祐輔, 「高句麗王陵出土瓦·副葬品からみた編年と年代」『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 임기환,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비정」『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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