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2_0020_0190 (칠성산 고분군)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40_0030_2900 (칠성산 0211호묘)

https://bit.ly/2vPCsUq (칠성산 고분군 위치도)


칠성산 0211호묘(七星山 0211號墓)



칠성산 고분군

http://contents.nahf.or.kr/id/NAHF.cr.d_0002_0020_0190  


칠성산고분군의 고분은 집안지역의 왕릉 중에서도 국내성 전체를 직접 조망할 수 있어 위치가 최상이라 할 만하다. 배총이 딸려 있고, 주변에서 능사(陵寺) 혹은 능역(陵域)의 문지로 추정되는 건축터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고분 형태와 기와의 문양 및 제작 기법이 집안지역 초기 고구려 유적들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종류여서, 그 연대의 하한선을 2세기 말로 잡고 있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또다른 왕릉으로 추정된 칠성산 211호묘가 있다. 이 고분은 칠성산 남쪽 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칠성산고분군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그 양식은 계단식적석총이며, 북쪽에는 배총 혹은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계단의 축조 방법과 출토 유물로 보아 3세기말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보고서에서는 고분에 남아 있는 도굴 흔적과 문헌에 나타난 기록의 비교를 통해, 칠성산 211호묘의 주인공을 봉상왕 5년(296) 당시 모용외 군대에 의해 파헤쳐졌던 서천왕으로 보고 있다.


칠성산 고분군 위치도 https://bit.ly/2vPCsUq



칠성산 0211호묘(七星山 0211號墓)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040_0030_2900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교외 통구촌 6조.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9'59.93", 북위 41°6'32.86", 묘 정상 해발고도는 200.57m(吉林省 集安市 郊外 通溝村 6組. 中心地理座標 東經 126°9'59.93", 北緯 41°6'32.86", 墓 頂上海拔高度는 200.57m)


 

연대


4세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

여호규(2006) 3세기 중후반으로 추정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통구고분군에 대한 수차례의 실측조사 때, 칠성산묘구 제211호묘라고 편호하고, 간단히 JQM 0211이라고 기록.
1997 실측조사를 통해 71m×61m×10m의 특대형 적석석광묘임을 파악. 고구려왕릉임을 확정.
2003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손인걸, 손기, 동우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孫仁杰, 孫奇, 佟友波))
집안중점문물의 환경정비(보수)작업과 더불어,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가 조사·정리·실측 등을 실시. 조사는 무덤의 동남·서남·서북 모서리부분과 북측을 집중 조사. 주변은 시굴조사로 묘 바깥 양쪽 능구의 범위와 능원시설의 탐사를 진행. 정리과정 중 동기·금동기·철기 등 유물 100여점이 출토되었고, 아울러 자기·시유도기 잔편과 기와 등도 출토.
1970년대 말~1980년대 중엽집안현문물보관소
(集安縣文物保管所)
수차례 조사를 통해, 묘 위에서 많은 기와들을 수집. 왕릉으로 비정하면서, 특별히 관심을 끌게 됨.
2004~2005장복유, 손인걸, 지용
(張福有, 孫仁杰, 遲勇)
비교적 정밀한 조사 진행.


 

구조특징

 

칠성산0211호묘는 대형 계단광실적석묘임. 남변, 동변을 제외한 나머지 두 변은 묘 위에서 흘러내린 돌들이 덮어버림으로써 측량이 어려움.


칠성산묘구 중 규모가 가장 큰 고분으로, 무덤 범위가 광대함. 평면은 방형에 가까움. 무덤 남쪽을 정리하면서 측정된 원래의 지표고도를 기점으로, 묘 정상 최고지점과 차이는 서쪽 모서리는 6.39m, 동쪽 모서리는 14.53m 임. 중앙의 남아 있는 높이는 약 7m 임. 동면방향은 195° 임. 일찍이 도굴을 당하면서, 중앙부에 도굴 갱이 생겼는데, 이 도굴 갱이 무덤을 반으로 나누고 있음. 도굴 갱은 서북-동남방향으로 형성되었는데, 지표면까지 파내려감. 묘 위에서 도굴하면서 파낸 분구 돌들은 수천입방미터로, 묘의 동남쪽과 서북 양측에 어지럽게 쌓여 있음. 묘 가운데 있는 도굴 갱은 키 모양임. 갱 입구의 너비는 30~40m, 바닥 너비는 2m임. 갱 바닥은 지면을 파내려 갔음. 무덤 남쪽 측면에는 수많은 갱이 파여 있음. 이는 벽돌을 굽기 위한 취토 결과로, 취토 시 일부 지표유적이 파괴됨.


무덤은 산기슭 황색 점성토층 위에 축조. 축조시 산기슭 표면을 평평히 하는 정리를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초공사를 위하여 구덩이를 팠던 흔적은 보이지 않음. 바닥부의 제1단 계단은 지표면에 축조. 기초를 잘 하지 않아서, 현재 일부 계단석 아래 부분의 석재는 바깥으로 밀려남. 계단은 안쪽으로 경사지게 쌓았음. 무덤은 모두 강자갈로 덮었는데, 강자갈은 직경 0.2~0.4m 정도임. 주변과 무덤 아래에서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었음.


광실은 묘 상부 중앙에 구축하고, 강자갈로 다시 표면을 덮었음. 광실은 묘의 중심 윗부분에 있었을 것이나, 도굴로 인하여 지금은 보이지 않음. 정리과정 중에 묘의 윗부분 및 주변에서, 석실을 축조할 때 사용되는 돌이나 비교적 큰 천정석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묘실은 광실의 구조였다고 추정됨.


자연적 혹은 인위적인 파괴로 인해, 계단은 대부분 붕괴되어 원래 자리를 이탈. 계단석 대부분이 결실되면서 명확한 계단수를 알 수 없음. 계단은 약간 가공된 자연석으로 정연하게 쌓았고, 계단 내부는 깬돌로 채움. 보존이 가장 양호한 서남모서리에서는 3단의 계단이 남아 있음. 제1단 계단은 그 층수가 2~10층으로 같지 않음. 서북모서리가 위치한 구역은 가장 지세가 높아서, 2층으로 되어 있고, 높이는 0.8m 정도임. 서남모서리는 지세가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가장 많은 10층이 보이는데, 높이를 증가시켜 수평을 유지하고자 한 것임.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구역에서 제1단 계단의 최고 높이가 3.2m 임을 볼 수 있음. 계단석은 약간 가공한 자연석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데, 석재의 바깥표면만 비교적 평평하게 고를 뿐, 나머지 면은 불규칙적임. 바닥층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데, 일반적으로 길이는 1~1.5m, 두께는 0.4~0.6m 정도임. 그 윗면에 쌓은 석재는 형태가 불규칙적이고, 크기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0.4~0.8m, 두께는 0.3m 정도로, 바닥에 사용된 돌보다 작음. 계단석 외측을 잘 축조한 다음, 그 내부는 깬돌로 채웠는데, 깬돌은 그 크기가 0.5×0.5m 이하임. 깬돌을 채워 평평하게 한 후, 네변 윗면에 2단 계단이 안으로 들여서 축조되어 있음. 제1단 계단의 각 층을 쌓을 때, 거리가 일정하지 않은 간격으로 무덤 안쪽으로 뻗은 일부 장대석과 묘 안쪽의 채운 돌들이 일체가 되도록 하여, 서로 꽉맞물리는 작용을 하게 함으로써, 계단석이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함. 장대석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1.2~1.5m, 너비 0.3m, 두께 0.25m 정도임. 제2단 계단은 대부분 결실 혹은 원래자리를 이탈. 그나마 보존이 비교적 양호한 서남모서리를 보면, 약간 가공된 자연석으로 1단 계단 위에서 약 1.4m 정도 안으로 들여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겨우 1층만 남아 있음. 석재의 크기는 약 0.5~0.7m, 높이는 0.4m 정도임. 계단내부에 채운 돌은 제1단 계단을 채운 돌들과 같음. 제3단 계단은 보존이 온전하지 못해, 현재는 서남면에서만 볼 수 있는데, 제2단 계단 위에서 안으로 약 1.2m 들여 쌓았음. 계단은 장대석 혹은 불규칙한 형태의 돌조각으로 비교적 평평하게 쌓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석편의 두께는 0.15m, 길이는 0.4~0.6m 정도임. 제3단 계단 윗면에도 여러 단의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무덤이 일찍이 도굴로 파괴됨에 따라, 명확히 알 수 없음.


유물들은 모두 묘의 서측에서 출토되었는데, 둘레돌의 틈과 쌓여진 흙에서 출토됨. 기와는 대부분 묘 아래로 흘러내린 돌 중에서 나왔는데, 전면적인 수집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


출토된 금동기는 모두 장식품으로, 황백금색임. 보요와 보요를 다는 가지가 절대 다수를 차지. 이 외에 이마, 관장식이 있음. 4엽형 투조장식은 18점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3점이 복원됨. 모두 얇은 동편을 잘라서 만들었고, 장식판은 방형에 가까움. 4개의 잎은 대칭됨. 투조무늬는 심엽형이고, 둘레에 작은 원점으로 2줄의 화문을 새김. 시체(柿蒂) 중심과 각 화판 중심에는 융기된 반구형 장식이 있는데, 반구형 장식 중간에 동실을 꼬은 연결가지가 있고, 가지 끝부분에는 원형 보요가 달려 있음. 제작기법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움. 투조장식은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음. 큰 것은 14점이 출토되었는데, 4엽문의 대각선 길이는 12㎝ 임. 작은 것은 4점이 출토되었는데, 조합하면 2점임. 4엽문의 대각선 길이는 약 5.8㎝ 임. 보요는 29점이 출토됨. 얇은 동편을 잘라 만들었는데, 양면 모두 도금됨. 모양은 원형과 규형임. 원형 보요는 25점이 출토됨. 원형의 보요 한 측면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동실로 이루어진 연결가지를 꿰기 위한 것임. 크기에 따라 2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큰 것은 21점, 작은 것은 4점이 출토되었음. 다만 형태는 같음. 규형의 보요는 규판이 거꾸로 된 모양임. 보요 윗부분 가운데는 볼록하게 융기되어 있고, 그 원모양 끝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 구멍은 동실을 꼬아서 만든 연결가지를 그 안으로 꿰어서 달기 위한 것임. 포형장식은 2점이 출토. 원형의 얇은 판으로, 가운데 부분이 융기되어 있고, 가장자리에 점열문이 두루 돌아가고 있으며, 보요를 달기 위한 구멍이 있음. 투조장식은 12점이 출토되었으나, 모두 파손됨. 얇은 동편을 잘라 만든 것임. 양면 모두 도금됨. 6점은 “품”자형 도안을 이루고 있고, 그 나머지는 너무 파손되어 모양을 판별할 수 없으나, 같은 모양이라고 추정됨. 동기류는 장막걸이쇠와 못이 출토. 특히 못은 41매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단조품으로, 못대가리는 모두 원형이고 몸은 방형임. 몸의 길이가 9㎝인 못은 1매, 5~6㎝인 못은 14매, 3~4㎝인 못은 12매, 2~3㎝인 못은 12매, 1㎝ 미만의 못은 2매가 출토됨. 못의 대가리 중에서 도금된 것이 최소 1매 이상 출토되었는데, 원래는 상당수가 도금된 것으로 보임.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는 출토되었으나, 와당은 출토되지 않음. 기와들은 동·서·북측의 무덤 위에서 흘러내린 돌들 중에서 출토되었는데, 분포범위는 무덤 표면의 1/2을 점유. 수집된 기와를 포함하여 무덤 전체를 덮게되는, 기와의 부피는 약 4.8입방미터로 측량할 수 있고, 묘상에 펼쳐진 기와의 총면적은 9입방미터 정도로 추정됨. 빈 공간 등을 제외하면 150㎡에 달하고, 다시 기와 간의 서로 맞물림을 뺀다면 기와는 최대 약 100㎡ 정도 덮을 수 있는데, 묘 정상면적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매우 큼. 그러므로 기와가 덮은 건축은 단지 묘실부분이었다고 추정됨. 바꾸어 말하면, 원래 묘상 건축규모는 비교적 작고, 만약 그 무덤에 축조된 가옥이 있다면 단지 광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기와는 니질의 회색이 대다수를 이룸. 홍갈색의 기와는 소수인데, 소성온도가 너무 낮아 좋지 않기 때문임. 수키와는 암키와보다 적게 출토. 암키와보다 약간 두껍고, 태토와 색깔은 모두 니질의 회색임. 대부분의 수키와에는 무늬가 없고, 일부에만 승문이 있음. 와두를 보면, 입술부분이 뾰족한 것과 네모진 것이 있고, 어깨부분에는 똑바른 것과 기울어진 것이 있음. 암키와는 조각나서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그 크기는 같지 않음. 암키와의 두께는 2~3㎝ 사이임. 태토와 색깔은 모두 니질의 회색임. 내면에는 모두 포문이 있음. 대부분의 암키와에는 배면에 무늬가 없는데, 일부에서 누르거나, 두드리거나, 새기거나, 문지른 등의 무늬를 만들었음. 문양의 종류에는 격자문, (람문)籃紋, 승문, 지두문 4종류가 있음. 지두문은 와두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끝암키와의 장식으로 추정됨. 격자문 암키와는 7점이 출토되었는데, 문양은 눌러서 만든 것과 두드려서 만든 것 두 종류가 있음. 람문 암키와는 5점이 출토되었는데, 문양은 눌러서 만든 것과 새긴 것 두 종류가 있음. 승문 암키와는 9점이 출토. 지두문 암키와는 8점이 출토되었는데, 문양은 모두 손으로 눌러 만든 것임. 암키와와 수키와의 제작기술차이에서 생산지와 생산연대에 조금의 차이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암키와 중에서 격자문과 각획의 람문, 수키와 중에 입술부분이 뾰족하고 어깨부분이 높고 똑바른 유형과 입술부분은 네모지고 어깨부분은 볼록한 유형을 서로 비교하였을 때, 동시기의 공예품이 아닌 것으로 추정됨. 수키와 중에 입술부분이 뾰족하고 어깨부분이 높고 똑바른 유형의 연대가 입술부분이 네모지고 어깨부분이 볼록한 유형보다 늦은 것으로 보임. 이것은 혹 칠성산0211호묘가 후대에 수선을 거쳤기 때문일 수도 있음.


 

역사적 의미


칠성산0211호묘의 계단구조는 층층히 쌓은 계단이라고 할 수 있음. 제 1단 계단 축성 후, 계단 내에 돌들을 평평하게 채우고, 그 위로 안으로 2단 계단을 들여쌓는 방법으로 계속 묘 정상까지 쌓는 방식은 계장식 계단 구조보다 연대가 늦음. 묘 축조에 사용된 석재를 보면, 제 1단 하층의 돌이 약간 큰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계단석은 비교적 작고, 대부분의 돌은 자연석으로 약간의 가공을 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구조의 고분 가운데 시기가 비교적 이른 무덤으로 추정됨.


출토유물을 보면, 금동장식의 금동기술이 높지 않고, 대부분 벗겨지며, 도금을 이루는 색깔이 황백색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이른시기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됨. 묘상에서 수키와와 암키와가 보이고 와당은 보이지 않는데, 고구려는 4세기 초에 와당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음. 묘에서 나오고 있는 자기편, 시유도기편 등의 유물 연대는 약 4세기대로 추정됨.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칠성산0211호묘의 축조연대는 4세기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추정됨.


여호규(2006)는 계장식적석묘를 채용하고, 권운문 와당이 아직 출토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후반으로 추정.


칠성산0211호묘의 위치와 환경은 우월하고, 규모가 방대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왕릉임이 분명하다는 전제 하에, 중국에서는 서천왕, 미천왕, 봉상왕의 아우, 미천왕의 부친의 무덤으로 보기도 함.


서천왕릉설은 무덤의 연대인 3세기 말은 고구려 제13대 왕인 서천왕 시기였음. 『三國史記』 봉상왕 5년(296년)조에는 “秋八月, 慕容廆,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라고 기록됨. 칠성산0211호묘의 중간 깊이가 바닥에 이를 만큼 가능했던 도굴은 모용외 군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데, 묘상의 수천입방미터의 석재의 이동들은 대규모인력이 아니면 불가능함을 증거로 들고 있음(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2004).


임기환(2009)은 집안 통구 분지의 지형과 하천 등을 고려해 볼 때, 중천은 통구하이고, 서천은 통구하의 서쪽에 해당된다고 보아 칠성산0211호묘는 서천왕의 무덤으로 보고, 미천왕의 무덤은 서대묘로 비정하기도 함.


모모자키 유스께(2009)는 무덤의 구조와 규모로 볼 때 왕릉으로 비정할 근거는 뚜렷하지 못하므로, 봉상왕의 아우이고, 미천왕의 부친이었던 돌고의 무덤으로 비정하기도 함.



자연환경


칠성산0211호묘는 통구고분군 칠성산묘구 최남단에 위치. 통구촌 6조 서북측 산기슭 대지에 위치.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 산기슭에 위치. 높이차는 약 7m 임. 산에 기대어 있고 강과 인접해 있으며, 지세는 높고 좁음. 자리 잡은 위치의 시야는 개활.


대지의 동남면은 층적평지임. 무덤 동북쪽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에 집안성구가 위치. 무덤 동쪽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집안-단동간 도로가 동북-서남방향으로 통과하고, 도로 양측에는 사람들이 거주함. 무덤 동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지점에 압록강이 있음. 무덤 동북쪽에는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통구하가 있고, 강 건너 국내성 서벽이 보임. 무덤 서북쪽으로는 칠성산이 있는데, 산기슭 남쪽에는 많은 고구려 중․후기대의 무덤들이 분포. 무덤 북쪽으로 900m 떨어진 지점에 칠성산 871호묘가 있음.


무덤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 마선구 2378호묘가 있음. 주변에 다른 무덤이 없는 단독무덤이라는 점에서, 피장자가 탁월한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줌.


 

유물정보

 


4엽형투조장식(4葉形透彫裝飾) 18점 外 금동기류(金銅器類) 43점, 장막걸이쇠 外 동기류(銅器類) 41점, 철제갑옷편(鐵製甲片) 1점 外 철기류(鐵器類) 5점, 마노구슬 1점, 청자편(靑瓷片) 外 토기류(土器類), 기와류(瓦類)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余昊奎, 「集安地域 고구려 超大型積石墓의 전개과정과 被葬者 문제」『한국고대사연구』 41, 2006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杰·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임기환,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비정」『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 桃崎祐輔, 「高句麗王陵出土瓦·副葬品からみた編年と年代」『高句麗王陵研究』,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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