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58221.html


중국인이 왜? 백제 무덤서 찾은 ‘다문화 흔적’

등록 :2018-08-19 14:05 수정 :2018-08-19 14:17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하남 감일동 굴식 돌방무덤 52기

출토품·석실 얼개 전형적 중국풍

무덤 주인, 대륙 혼란기에 건너온듯


하남 감일동 고분군의 일부인 5호 무덤 모습.


“전형적인 중국계 무덤입니다. 여기 살던 토착세력의 것들이 아닙니다.”


백제 고고학 전문가인 권오영 서울대 교수가 무덤 내부를 보고 한마디했다. 주변의 학자들은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끄덕거렸다.


지난달 18일 낮 폭염 속에 경기도 하남시 감일동 백제석실분 발굴현장에서 열린 전문가 설명회는 흥분과 의문이 뒤섞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한성(서울)에 도읍한 4~5세기 초기 백제시대의 대형고분들이 유례 없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성과를 보면서 연구자들은 설레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정작 무덤의 얼개와 출토품을 보니 무덤 주인이 중국계 이주민일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또다른 고민거리를 안게된 것이다.


유적은 고려문화재연구원이 2015년 11월부터 하남시 감일동 공공주택지구 조성터에서 구제발굴을 위해 조사를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수만평에 달하는 이 조성터에서만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의 백제시대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52기가 드러났다. 그동안 경기, 충청, 전라권 일대의 백제 권역에서 횡혈식 석실분은 70여기, 한성백제 시대의 석실분은 2000년대 이래 경기도 판교와 서울 우면동 일대의 고분군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한꺼번에 시대 편년이 가능한 백제 석실분이 나온 것은 ‘벼락같은 축복’이자 ‘횡재’라고 할 만했다. 출토품들도 획기적이었다. 호랑이 머리와 닭머리가 물을 따르는 주구에 달린 중국 동진대의 청자 호수호, 청자 계수호가 처음 나왔다. 누금기법으로 만든 금방울, 망자를 기리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만든 ‘미니어처’ 형식의 작은 명기들, 주둥이는 곧고 어깨는 넓직한 동진·남조 스타일의 직구단경호 항아리 등도 출토돼 이 시기 백제계 고분과 출토품의 연대를 가리는데 결정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문제는 무덤 석실 얼개가 전형적인 중국풍이란 점이다. 평면을 장방형으로 조성하고, 벽면에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고 윗부분을 판돌로 덮은 석실 구조는 중국 동진, 남조와 한반도 서북지방의 낙랑계 무덤에서 보이는 벽돌로 쌓은 전축분 양식과 판 박은 듯 닮았다. 인근의 한성백제기 지배층의 핵심고분으로 추정하는 방이동, 석촌동 고분이 돌무지무덤(적석총), 옹관무덤, 토광묘 형식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른바 ‘미니어처 토기’로도 불리는 작은 크기의 토제품들. 부뚜막이나 여러 항아리 모양을 축소시켜 만든 것으로 망자가 내세 생전과 같이 생활하기를 기원하며 넣는 명기에 해당한다. 이런 소형 명기를 넣는 것은 당대 중국 동진과 남북조의 장례 풍속이다.


권오영 교수나 박순발 충남대 교수 등 백제 고고학의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런 양상이 3~5세기 중국 대륙의 혼란기와 낙랑의 멸망 등 여러 계기를 통해 백제에 들어온 중국계 이주민의 생활 문화를 보여준다고 단정한다. 중국 중원 대륙이나 낙랑 정권 등의 혼란기에 다수의 전문기술과 역량을 지닌 이주민들이 넘어와 백제에서 외교, 역법, 각종 신기술 분야 등에 종사하면서 자기들만의 다문화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감일동고분군은 그런 이주민 집단의 일부가 자신들의 전통과 습속을 지키면서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온 전문가 집단, 테크노크라트가 백제 사회에 적응하면서 집단을 이뤄 공존한 사실을 드러내는 유적이란 추정도 가능하다.


문헌사고고학계 연구자들은 이런 정황이 당대 한성백제 왕조가 추구했던 활발한 국제교류와 개방적 성격에 비춰 이례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중국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 ‘백제’ 전을 보면, 백제 주민 가운데 신라인, 고구려인, 왜인, 그리고 중국인이 숱하게 섞여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일본 서기>에도 6세기 왜국에 <논어> 등 유교경전을 전해준 백제의 박사 왕인이 중국 한나라에서 건너온 왕구라는 지식인의 손자였다는 구절도 볼 수 있다. 진씨 등 중국성을 지닌 백제 전문가들이 조정에 봉사하면서 업적을 쌓은 내용들도 백제인들의 묘지명이나 중국, 일본의 각종 문헌들에 언급되어있다. 이런 사실들은 고구려, 신라 등 다른 삼국의 문헌기록에는 특별히 나오지 않는다. 백제인들이 국가체제의 기틀을 잡는 상황에서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외교, 학문, 신기술 등의 분야에 민족,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문화 다민족 포용 정책을 썼다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다. 최근 제주도의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놓고 뜨거운 논란이 일었던 현실에 견주어 고대 타자에 대한 포용성과 개방성을 증언하는 감일동 석실분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선례임에 틀림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고려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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