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1017080115996


[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① 대성산성과 안학궁터-평양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0. 10. 17. 08:01 수정 2020. 10. 27. 09:53 


평양 천도 후 고구려의 첫 수도성

고구려 시대의 산성·토성·벽화무덤 등 산재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대성산 초입에서 바라다본 주작봉, 장수봉, 소문봉의 모습. 현재 주작봉 중턱에는 동북항일연군 지휘관급 인사들이 묻혀 있는 혁명열사릉이 조성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대동강을 끼고 있는 평양지역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서경(西京)으로, 조선시대에는 평안남도의 감영이 설치돼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특히 고구려는 두 차례나 평양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긴 적도 있고, 427년 장수왕은 공식적으로 평양 천도(遷都)를 단행했다. 이런 측면에서 평양의 첫 번째 답사지는 장수왕이 수도성을 건설하고, 정사를 관장한 곳으로 유력한 대성산지역과 안학궁터가 적절하다.


대성산은 현재 평양의 중심부인 김일성광장에서 동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대성산은 최고봉인 을지봉(274m)을 정점으로 국사봉, 장수봉, 소문봉, 주작봉 등이 빙 둘러 있다. 북한은 각각 을지문덕, 장수왕, 연개소문을 기려 봉우리에 이름을 붙였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이 봉우리들을 연결해 쌓은 타원형의 산성이 대성산성이고, 소문봉 남쪽에 고구려의 왕궁인 안학궁터가 남아 있다. 또한 대성산 주변에는 1000여 기의 왕릉과 귀족무덤 등 고구려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성산은 비록 해발 274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주위가 평양지대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주작봉에 오르면 현재 평양의 모습이, 소문봉에 오르면 평양건설대학, 인민경제대학 등 방문하기 어려운 평양의 동쪽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성산에 올라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서울=뉴스1) 대성산 주작봉 중턱에서 내려다 본 평양 전경. 중앙에 능라도 5.1경기장이 보이고,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양각도호텔, 주체사상탑, 고려호텔, 창전거리 고층아파트, 류경호텔 등 현재 평양을 상징하는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주 맑은 날에는 뒤쪽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용악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대성산 답사는 대성산성 남문에서 시작된다. 김일성종합대학과 금수산기념궁전을 지나면 왼쪽으로 주작봉이 보이고, 주작봉과 소문봉 사이 계곡을 조금 올라가면 남문(국보유적 제10호)이 나온다. 대성산성에는 19개의 크고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중 남문은 정문에 해당한다.


높이는 20m 정도로, 축대를 튼튼하게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축대의 중앙에는 홍예문을 내고 뒷부분에 양쪽으로 계단을 두어 오르내리게 했다. 현재의 건물은 1978년에 복원한 것이다. 남문 앞 광장에서는 매년 노동절이나 국제아동절 등을 계기로 각종 행사가 열린다.


(서울=뉴스1) 대성산성 남문 전경. 고구려가 대성산성을 쌓으면서 정문으로 건설했지만 6.25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은 1978년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에 대성산유원지가 조성돼 있고, 뒤쪽으로 장수봉과 장수봉 정상에 세워진 장수각이 보인다. 대성산성 남문은 국보유적 제10호 지정돼 있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남문을 지나 계곡을 올라가면 고구려시기에 만든 연못이 나온다. 대성산성 안에 연못이 99개 있었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1958년 발굴과정에서 170여 개가 발견됐다고 한다. 미천호, 동천호, 사슴못, 구룡못, 잉어못, 장수못 등 17개 연못에는 지금도 물이 고여 있다. 전시에 수도성 역할을 한 대성산성 안에서 식수와 용수의 원천으로 쓰였던 연못들이다. 그중 동천호와 미천호는 상당히 커서 여름에는 뱃놀이 공간으로, 겨울에는 빙상장으로 이용되기고 한다.


연못의 평면은 대부분이 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이다. 연못의 구조는 찰흙과 막돌을 섞어서 바닥에 굳게 다진 다음 그 위에 다시 조금 큰 돌을 깔아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다. 이 연못들에서는 고구려 기와, 금동불상, 불경이 들어 있던 돌함 등의 유물과 유적이 많이 발견됐다. 북한은 대성산 연못떼 전체를 국보유적 제11호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다만 개별 주요 연못 앞에는 보존유적 제11호 표식비가 세워져 있다.


(서울=뉴스1) 고구려가 5세기에 대성산성을 쌓으면서 조성한 장수못 전경(왼쪽)과 장수못 앞에 세워져 있는 표식비(오른쪽). 대성산연못떼는 국보유적 제11호 지정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연못떼를 둘러보고 오른쪽으로 능선을 오르면 대성산성(국보유적 제8호)에서 전망이 제일 좋다는 소문봉 정자에 도달한다. 이곳에 오르면 대성산성의 봉우리와 봉우리마다 세워진 정자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성산성은 남쪽의 남한산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로 총 길이 약 7㎞, 겹성의 둘레로 치면 9㎞가 넘는다.


대성산의 을지봉, 소문봉, 주작봉, 국사봉, 장수봉 등을 성벽으로 연결해 성채를 쌓은 고로봉식 산성이다. 고로봉식 산성이란 3면이 높은 산 또는 절벽으로 막혀 한쪽만이 트인 지형의 골짜기를 안에 넣고 주위의 봉우리와 능선에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형식이고, 이후 우리나라 중세시기에 축조된 산성의 기본형식이 됐다.


고구려는 졸본성과 오녀산성(五女山城), 국내성과 환도산성(丸都山城) 등 평지의 궁성과 군사방어를 위한 산성을 결합해 수도성을 건설했다. 평상시에는 왕이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인근에 축조해놓은 산성으로 옮겨 대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성체계는 장수왕이 427년 평양지역으로 도성을 옮기면서도 그대로 적용됐고, 대성산성은 이때 군사방어성으로 조성됐다. 북한은 고구려가 3세기부터 대성산성을 쌓기 시작해 5세기 초에 완공했다고 본다.


(서울=뉴스1) 1960년대 중반 평양시민들이 대성산 소문봉에 올라 대성산성 둘레를 걷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서울=뉴스1) 대성산 소문봉에 남아 있는 대성산성 성벽 안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성벽은 대성산과 그 부근의 사암과 화강석을 사각추 모양으로 다듬어 서로 어긋나게 물려 벽돌 쌓듯이 올렸다. 성벽의 바깥 부분은 큰돌(성돌)로 쌓고 안쪽 벽은 돌과 흙을 다져 넣었다. 성벽에는 요소마다 방어용 시설인 치(雉)를 세웠는데 지금까지 65개소에서 발견됐다. 성안에는 왕이 머물던 행군을 비롯해 병사들이 주둔하던 수많은 건물터와 20여 개에 달하는 문이 있었고, 서남쪽에 배치된 남문이 주 출입로였다.


(서울=뉴스1) 소문봉에 세워져 있는 대성산성 표식비. 국보유적 제8호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서울=뉴스1) 대성산 소문봉에 남아 있는 대성산성 바깥 성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소문봉 정상에 세운 정자에 올라 남쪽으로 바라보면 대동강을 끼고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 바로 앞쪽에 궁성인 안학궁터(국보유적 제2호)가 자리 잡고 있고, 남동쪽(사진의 왼쪽)에 고방산성이, 남서쪽에 청호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안학궁터 남쪽에는 궁을 만들 때 함께 판 우물이 남아 있다.


고산동우물(국보유적 제172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때의 우물로, 깊이가 9m 이상 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물 안에서는 고구려의 질그릇·기와·벽돌·마구·숫돌 등 40여 점의 유물이 발굴됐고, 이 가운데 기와와 벽돌은 부근에 있는 대성산성과 안학궁터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시기의 양식이다.


(서울=뉴스1) 안학궁 아래에 있는 고산동우물의 안쪽 모습. 안학궁을 건설할 때 판 우물로 국보유적 제172호로 지정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고산동우물에서 대동강쪽으로 내려가면 대동강을 이어주는 고구려 나무다리(국보유적 제160호)의 흔적이 남아 있다. 5세기 초에 대동강에 설치된 나무다리로, 현재 대성구역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암동을 이어주던 나무다리 유적이다. 다리 가운데 부분은 없어졌지만 본래 총길이가 약 375m이고 너비가 약 9m여서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평가된다.


이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20km 내려가면 북한에서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동명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에서는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 동명왕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본다.


(서울=뉴스1) 대성산 소문봉의 정자에서 대동강 쪽으로 내려가 본 전경. 바로 아래쪽에 안학궁터가 있고, 좌우에 고분군이 산재해 있었다. 대동강에 인접해 왼쪽에 고방산성이, 오른쪽에 청호동토성이 있었고, 안학궁의 정남향으로 대동강을 잇는 다리가 있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안학궁터의 인근, 즉 대성산의 남쪽과 동남쪽에는 약 1000여 기에 달하는 고구려시기 무덤이 산재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평양시 대성구역 고산동, 안학동과 삼석구역 장수원동에 걸쳐 있다. 북한은 이 무덤떼를 국보유적 제12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고, 개별 무덤들은 다시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놓았다. 이 무덤떼는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삼석구역 호남리 사신무덤(국보유적 제26호)은 고구려 사신무덤 중 초기의 고분으로, 5세기 말~6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주벽(主壁)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는데, 회칠을 하지 않은 벽에 직접 그렸다. 2018년에는 장수원동에서 이 사신도보다 더 앞선 시기에 조성된 벽화무덤이 발견돼 주목을 받기도 했다.


대성산 일대의 역사유적 중 가장 주목을 끈 것은 국보유적 제2호로 지정돼 있는 안학궁터였다. 확실한 고구려의 궁전 건축물은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궁지를 제외하고 한반도 내에서는 안학궁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 전기의 수도인 만주 통구 지역의 국내성은 안학궁과 같이 평지성이었지만 지금은 서벽과 북벽, 그리고 남쪽 일부의 성벽만 남아 있고, 그 안의 궁전터는 흔적이 없다.


(서울=뉴스1) 북한이 1970년대에 작성한 대성산성과 대성산 남쪽의 고구려유적 분포도.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고고학 및 민속학 강좌팀은 1960년대에 안학궁터를 발굴하여 모두 52개의 건물지를 발견했다. 궁성의 평면은 방형인데, 동·서·남·북 내성 벽의 길이는 각각 622m이고 둘레는 2,488m이며, 면적은 약 38만㎡(현재까지 복원된 경복궁의 약 4배 면적)로 조사됐다. 성벽은 아래 부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았다. 성문은 동, 서, 북쪽 성벽에는 각각 1개씩 내고 남쪽 성벽에는 3개를 냈다. 성안에는 총건평 3만 1458㎡에 달하는 궁전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뉴스1)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학생들이 대성산성, 왕건릉, 단군릉, 안학궁의 복원모형을 보며 수업을 하고 있다. 가장 아래 쪽 모형도가 안학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안학궁의 중심선상에서 남쪽으로는 남궁, 중앙에는 중궁, 북쪽에는 북궁이 있고 중심선의 동쪽에는 동궁, 서쪽에는 서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궁전터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5궁의 궁전은 모두 회랑으로 서로 연결돼 있었다. 안학궁터 안에서는 각종 건물에 덮었던 기와와 와당이 많이 출토됐다.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에 있던 당나라 때 최대 궁전 대명궁(大明宮)의 정전인 함원전(含元殿)의 궁전터 앞면 길이는 75.9m이고, 옆면 길이는 41.3m인데 고구려 안학궁의 정전 건물지는 이보다 앞면 길이가 15m나 더 큰 것으로 조사됐다. 궁전의 전체 규모로 보아도 안학궁은 당나라 최대 규모라는 대명궁과 비교할 만하다.


문제는 안학궁이 과연 장수왕 때 평양지역으로 천도했을 당시의 왕궁이었냐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동천왕 21년(247)에 고구려는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할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 사직을 옮겼다. 그러면서 『삼국사기』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거처였다"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평양성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학계는 246년 위(魏)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고구려가 고조선의 도성이 있던 청암동성을 증축하고 임시로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해석한다. 남한의 일부 학자들은 청안동성이 장수왕 때의 왕성이라고 추정한다.


(서울=뉴스1) 대성산 주작봉에서 내려다본 청암동성 자리(원형 표시지역).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의 동쪽에 있으며, 금수산기념궁전의 남쪽부터 대동강변에 걸쳐 동서 길이 약 1.2km, 남북 길이 500m 가량으로 둘레가 약 3.5km 가량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북한의 발굴보고에 따르면 청암동성은 고조선시기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됐고, 3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다시 돌로 성을 쌓았으며, 4세기 말~5세기 초까지 두 번에 걸쳐 성벽을 보축했다. 실제로 청암동성 안에서는 동서 약 50m, 남북 약 20m 정도의 고구려 시기의 건물터와 건물벽화가 발견됐고, 여기서 400미터 동쪽에 고구려 때 세워진 금강사터(국보유적 제25호)가 남아 있다.


고구려가 24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기면서 이 지역에 이미 있던 고조선시기의 수도성(왕검성)이었던 청암동토성 위에 중축하며 석성을 쌓았고, 금분으로 벽화까지 그린 화려한 왕궁도 건설했다는 것이다. 평양으로 임시 천도했던 고구려가 언제 다시 국내성으로 환도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지만, 그로부터 104년이 지난 343년에 다시 수도를 평양지역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는 "왕이 평양 동황성에 옮겨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목멱산 가운데 있다"라고 기록했다. 북한은 이 동쪽의 황성(皇城)이 청암동성의 동쪽에 있는 청호토성으로 비정한다. 청호토성과 여기서 동쪽에 있는 고방산성이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성되어 동황성이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청호동토성은 북쪽이 약간 높으며 둘레가 약 1.2km되는 네모난 성이었다. 성벽은 이미 전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는데, 북쪽에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고, 성안의 중심부분에서 고구려 시기 원형 기초자리가 여러 개 발굴됐으며, 붉은색 노끈무늬 암키와와 붉은색 수키와 막새 등 유물들이 출토됐다.


고방산성은 청호동토성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있다. 고방산성은 둘레가 약 3km 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성이지만 동·남·북쪽이 산 능선으로 막혀있고 서남쪽만이 평지와 연결된 고구려 시기 전형적인 고로봉식 산성이다.


(서울=뉴스1) 지난해 방북한 재미교포가 촬영한 안학궁터의 서쪽 성벽터 모습. 성벽 안쪽까지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이렇게 두 차례 임시로 평양지역의 청암동성과 청호토성으로 수도를 옮겼던 경험에 기초해 광개토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궁성인 안학궁을 건설하기 시작해 장수왕 때인 427년 마침내 정식으로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는 게 북한학계의 잠정적 결론이다.


2006년 남북학계는 공동으로 안학궁터를 발굴했지만 아직까지 해석이 엇갈려 확실하게 논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다. 청암동성이 고조선의 중심지였는지는 더 큰 논란거리다. 다만 학계의 논쟁은 뒤로 하고 대성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여정임은 분명하다.


<표> 대성산지역의 고구려 국보유적. 2020.10.17./뉴스1 photo@news1.kr


seojiba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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