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blog.naver.com/michigan358/220801131312
무려라 및 고구려 서북경계에 대한 최근의 견해 소개
2016. 8. 31. 11:59 지국
참고 : 이성제,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과 무려라」,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외교와 변경기구』, 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14.
논지 요약
1. 그간의 연구에서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은 요하 서안의 무려라(武厲邏)에 주목하여, 이곳이 사료상 요하 너머에 찾아지는 고구려의 유일한 거점으로 보고, 요하를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으로 보아 왔으며, 수(隋)의 거점으로는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 이서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어, 자연히 고구려와 수 사이에 공백지대를 그려왔던 것으로 이해해왔다. 구당서 및 신당서에서는 고구려의 서부 변경이 요하를 넘어 영주(營州)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간의 연구는 무려라와 그 기능에만 주목하여, 이를 요하 서안의 고구려 성곽으로 찾고자 하여, 이와 관련한 몇가지 사실들을 간과하고 있다.
2. 수·당의 고구려 침공시 요하를 도하한 경로나, 과거 요하를 도하한 군대의 사례들을 파악하였을때, 요하의 주요 도하지는 적어도 세 곳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무려라가 단순히 요하를 건너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한 소규모 군사시설에 불과하였다면, 이러한 군사거점은 무려라 한 곳에 국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려라의 역할에 대해 기술한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에서도 이러한 역할을 무려라 한 곳으로 특정하지 않고 '라(邏)'로 통칭하여 설명하는 점도 주목된다. 또한 '라'의 기능이 요하를 건너는 사람들을 살피기 위한 것에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라'를 방어하기 위한 성곽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 만큼, 무려라가 고구려 서변의 최전선 거점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3. 광개토왕이 거란의 일파인 패려(稗麗)를 친정했던 사실은 고구려가 일찍부터 요하 이서의 거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5세기 말에는 거란이 북위(北魏)의 변민(邊民)을 약취(略取)했다가 고구려에게 빼앗긴 일이 있었으며, 6세기 후반부에는 거란의 일부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요하 이서의 고구려 거점은 거란을 상대로 하는 창구이자 관리기구의 역할 또한 수행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서 동단부에 치우쳐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무려라를 고구려가 요하 이서 지역을 경영하기 위한 거점으로 삼았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무려라를 비롯한 여러 '라'는 고구려 최전선 기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4. 수서 이경전(李景傳)을 살펴보면 610~611년에 이경이 고구려 무려성(武厲城)을 공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종래에는 이를 612년 양제의 원정성과의 일부로 보아, 무려성을 무려라와 동치시켜왔다. 그러나 양제의 친정 성과로 무려라 1개성만 취했다는 기록 등은 그 성격으로 보아 양제의 무리한 고구려원정을 비난하기 위해 612년의 친정에 관한 것을 서술한 것이지, 그 전년도에 있었던 무려성 공략까지는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경은 무려성을 공략한 성과로 봉작(苑丘侯)과 재물(一千段)을 받았는데, 이는 소규모 군사시설에 불과한 '라(邏)'를 공략하였다 하여 받을 수 있는 포상이 아님은 분명하므로, 무려성과 무려라는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5. 이경이 무려성을 공략한 611년의 고구려-수간의 충돌은 전초전의 성격을 띄는 것이 아니라, 612년 양제의 친정시에 수나라의 대군이 곧바로 요하 서안에 이를 수 있도록 요하 이서에 있는 고구려의 주요 거점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제는 기존에 군수물자를 탁군(涿郡)에 집적하도록 한것을 무리하게 고구려와 근접한 회원진(懷遠鎭)과 노하진(瀘河鎭)으로 다시 집적하도록 강행했는데, 이는 113만 규모의 병력을 운용하는데 가능한 전장 가까운 곳에 보급기지를 두고자 한 것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접경지대인 회원진을 보급기지로 삼기 위해서는 이를 위협할 수 있는 사전 요소를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그를 위한 목적으로 611년에 무려성을 공략했던 것이다.
6. 한(漢)대 요동군의 관할 범위는 요하 이서의 의무려산까지 설정되었다. 요동군 18현 가운데 요하 이서에 설치된 곳은 무려(無慮)·방(房)·험독(險瀆) 3현인데, 여기서 무려(無慮)현의 명칭이 무려(武厲)성의 명칭과 음이 같다. 무려현의 명칭은 의무려산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곳은 한나라가 요동군 서부도위를 둘 정도로 요서 동부지역의 요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요하 이서로 진출한 고구려가 중시했을 법한 곳이다. 무려현 고지는 후대에도 요서 동부의 요지였을 뿐만 아니라, 주요 교통로 상의 경유지였음이 가탐(賈耽)의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郡國縣道四夷述)이나 수·당의 고구려 공격로에서 확인이 되는 만큼, 무려성은 한대의 무려현에 연원을 두었을 것이다.
7. 따라서 무려성은 한대 무려현의 고지에 위치하였으므로, 대략 현재 요령성(辽宁省) 북진시(北镇市) 남쪽의 요둔향(廖屯乡) 대량갑촌(大亮甲村)의 고성(古城) 터로 비정되며, 고구려의 국경은 의무려산과 대릉하 하류로 자연 국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서변 거점은 무려성과 요하 서안의 '라'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이러한 '라'는 요하의 도하 지점에 설치되어 적어도 3곳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에 따르면 이 구간에 해당되는 여라수착에서 요동성까지의 구간에 17역(驛)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당대의 이러한 사례를 볼 때 요하 이서지역에는 적어도 십여 곳의 크고 작은 군사거점들이 무려성과 요동성을 연결하는 구조로 방위선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 요둔향은 현재는 진(镇)으로 승격되어 있음.
※ 한줄요약 : 고구려 전성기 최대영역의 서쪽 경계선은 요하 이서의 의무려산에 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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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한대 요동군의 경계가 요하가 아니라 의무려산으로 형성되었던 점이나, 고고학 발굴성과에서도 진(秦)대 이전 요동과 요서 지방의 문화적 구분이 대체적으로 의무려산을 경계로 나눠지는 점, 광개토대왕이 숙군성을 공략했던 점과 장수왕이 북위로부터 풍홍을 구출하여 데려온 점, 무려(武厲)와 무려(無慮)의 당대 고음이 거의 유사한 점, 양제가 무려라를 공격한 후 이곳에 요동군을 설치했다는 점 등을 봤을 때, 고구려의 최대 영토범위도 대체로 의무려산으로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는데, 이와 유사한 연구논문이 나온 것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이미 한나라 당시에는 '요동'의 지역적 범위가 요하 이동이 아니라 의무려산 이동을 가리키는 것임은 꽤나 많이 알려진 사실이긴 한데, 이 논문의 논지처럼 무려성을 옛 무려현 고지로 본다고 하더라도, 굳이 이곳을 요서지방의 일부로 봐야되는 것인지는 회의가 듭니다.
북위 이후에도 고구려의 영토 범위를 대체로 요동으로 칭해왔던 것은 아무래도 고구려가 멸망할 무렵까지에도 요동지방의 지리적 범위가 요하 이동이 아니라 의무려산 이동을 가리켰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데, 대부분 지방에 대한 지리적 범위는 하천보다는 통행이 좀 더 불편한 산의 경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고, 무려라가 함락된 이후에는 수·당의 대군이 별 저항없이 요하를 시도때도없이 도하해 오는 것을 보면 요하는 애초에 자연적인 방어선의 의미로도 다소 부족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합니다. 적어도 고대사를 연구할 때에는 요동과 요서의 기준을 요하가 아닌 의무려산 이동과 이서로 봐야한다고 봅니다.
※ 블로그 계정을 바꿈으로 2015년 3월 29일 20시에 작성한 글을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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