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72392
연개소문 미워 전투 안 도운 양만춘? 영화와 다른 역사 4가지
[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안시성> 속 상황, 어디까지 역사와 같을까
글 김종성(qqqkim2000) 편집 김준수(deckey) 18.09.16 13:57최종업데이트 18.09.16 14:06
▲영화 <안시성> 포스터.ⓒ 영화사 수작
고구려 멸망 23년 전에 벌어진 645년 안시성 전투는 한국 역사에서 기념비적 승리다. 유라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이 각각 별도로 작동하던 그 시절, 유라시아 동쪽의 동아시아는 오리엔트(중동+북아프리카+남동유럽) 다음의 파워를 발휘하는 지역이었다. 그런 동아시아의 최강국인 당나라에 치욕적 패배를 안겨준 일대 사건이었다. 배우 조인성 주연으로 19일 개봉되는 영화 <안시성>은 바로 이 사건을 다룬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할 욕심에 고구려 침략을 감행했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년)에 가로막혀 고구려 점령은 고사하고 정권 유지마저 어렵게 된 수나라 양제(수양제). 수양제의 실패로 인해 쌓인 중국인들의 한을 풀고자 당나라 태종(당태종) 역시 야심차게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그 역시 양만춘의 안시성 대첩에 가로막혀 뜻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도리어 자기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지만, 당태종 이세민은 그런 재앙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태종은 다른 것을 잃었다. 바로, 한쪽 눈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잃은 그는 귀국 4년 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에 따르면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기고 다른 쪽 눈마저 감았다.
영화 <안시성>은 당태종(박성웅 분)이 안시성 앞에서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보여준다. 안시성 병력을 압도하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한 점, 안시성이 뚫리지 않자 편리하게 함락할 의도로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았지만 고구려군에 빼앗겨 오히려 화근을 자초한 점, 당태종이 한쪽 눈을 잃어 더 이상의 전쟁 지휘를 할 수 없게 된 점들을 보여주었다.
웅장한 화면과 줄거리, <안시성> 내용 중 실제 역사와 다른 부분은?
▲<안시성>의 한 장면.ⓒ 수작
이런 스토리 못지않게 화면도 웅장했다. 중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드넓은 벌판과 수많은 병정들을 등장시켜, 마치 공중 위에서 전투 현장을 관람하는 것 같은 입체적 느낌을 만들어주었다. 고구려 역사는 물론이고 한국 역사 전체로도 대단히 기념비적인 안시성 전투를 매우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렇지만, 영화다. 따라서 허구가 없을 수 없다. 이 영화에도 당연히 적지 않은 허구가 담겨 있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4가지 허구에 대한 이야기만 준비했다.
우선, 당시 정세를 실제보다 긴박한 분위기로 다소 과장해 묘사했다. 안시성만 무너지면 평양성이 곧바로 위험해지는 절체절명 상황에서 안시성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안시성이 무너진다고 곧바로 평양성이 위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한국 군사사> 2권의 한 대목이다. ( ) 괄호 속 내용은 <한국 군사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고, [ ] 속 내용은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차례로 당군[당나라 군대]의 손으로 들어감으로써, 이제 요하 선[요하 연변 방어 라인]에 배치된 고구려군의 주요 거점 성[城]은 신성·건안성과 안시성만 남게 되었다. 이에 당군은 안시성으로 밀려들었다. 안시성이 무너지면 오골성(지금의 요녕성 봉성 봉황산산성)을 제외하고는 당군의 평양성 공격로를 막을 만한 방어선이 없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안시성과 평양성의 중간쯤인 오골성이 '다음 타자'로 나서게 돼 있었다. 안시성이 무너진다고 평양성이 곧바로 위험해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인들이 느꼈을 위기감은 영화 <안시성>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위기감보다는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안시성의 위치.ⓒ 김종성
실권자 연개소문과 안시성주 양만춘의 적대관계가 외세와의 투쟁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 역시 실제 역사와 다르다. 영화에서는 연개소문(유오성 분)이 당나라군을 목전에 둔 양만춘(조인성 분)을 암살하고자 학생 전사인 사물(남주현 분)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고구려 편)에도 설명됐듯이, 642년 연개소문 쿠데타 때 양만춘이 지지 선언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고구려인이고 양만춘도 고구려인이다. 둘은 평화 시에는 싸웠지만, 외세 앞에서는 단결했다. 이들의 주적은 서로가 아니라 외세, 당나라였다. 영화에서 안시성 전투에 앞서 짤막히 보여준 주필산 전투가 바로 그 증거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협력, 어디까지가 실제 역사일까
▲양만춘(조인성 분).ⓒ 수작
영화 속에서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연개소문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안시성 근처에서 벌어지는 주필산 전투를 돕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비난을 할 이유가 없었다. 주필산 전투는,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보호하고자 대규모 구원병을 파견한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의 고구려 열전은 안시성 전투 직전의 주필산 전투에 관해 이렇게 서술한다.
"태종이 안시성에 당도하자, 북부누살 고연수와 남부누살 고혜진이 고구려·말갈 병력 15만 6천 800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
외세 앞에서 고구려는 내부의 갈등을 덮고 일단은 단결했다. 15만 군대가 안시성을 구할 목적으로 출동한 것은 그 때문이다. 중앙 정권과 안시성이 그 와중에도 갈등을 빚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외에 <해상잡록>이나 <갓쉰동전> 같은 책들까지 참고해 연개소문 시대를 설명한 역사학자 겸 독립투사 신채호는, 안시성 전투 직전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다음과 같은 작전 지시를 내렸다고 말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양공께서는 출전하지 말고 성을 지키십시오. 적들이 굶주리게 될 때, 양공께서 안시성 안에서 공격을 개시하고 추공께서 밖에서 공격하면 됩니다. 나는 뒤에서 당나라 군대의 후미를 습격해 그들의 퇴로를 끊어버리고 이세민을 사로잡고자 합니다."
영화 속의 연개소문 측은 양만춘이 주필산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욕했지만,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그것은 연개소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외세 앞에서 사적 감정을 억눌렀다.
▲당태종(박성웅 분).ⓒ 수작
영화에서는 당태종이 화살에 맞아 시력을 상실하고 공들여 쌓은 토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의욕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사물의 설득을 듣고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은 뒤 구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당나라 군대가 급히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협력은 안시성 전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전투가 끝날 무렵 연개소문이 잘못을 뉘우치고 양만춘에게 협조했으며 이것이 결정적 계기가 돼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하게 된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당태종이 철군을 결심한 최대 동기는 날씨와 보급 문제였다. 토산 붕괴로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날씨가 쌀쌀해지는 데다가 군량미가 부족해진 게 결정적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의 지시대로 양만춘이 장기전을 펼친 게 주효했던 것이다.
안시성 전투 직전의 긴박함이 과장됐다는 점, 전투 당시 연개소문과 양만춘이 엇박자를 보인 것처럼 묘사했다는 점, 당태종의 철군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 이어, 4번째로 설명할 영화 속 허구는 당나라 군대의 철군 모습이다.
▲안시성 전투 상상화.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안시성> 속의 당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정신없이 도주했다. 하지만, 두 군대의 '작별'은 실제로는 아름다운 편이었다. 고구려 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주[양만춘]가 성에 올라 송별의 예를 보이자, 당 황제[이세민]는 성을 굳게 지킨 그들의 충심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그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패배한 당나라군을 상대로 양만춘은 "잘 가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이에 대한 사례로 당태종은 비단 100필을 보내면서 "당신들 정말 대단하다"는 식으로 답례했다.
이 전투의 마지막은 이렇게 형식상으로나마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아름다운 작별'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작별과 함께, 눈에 붕대 감은 당태종은 치욕과 분노를 삭이며 말머리를 서쪽으로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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