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nahf.or.kr/id/NAHF.ku.d_0001_0120_0020_0010


고구려 요동성지(高句麗 遼東城址)


요동성 위치도


출토지 : 중국 요녕성 요양시(中國 遼寧省 遼陽市)


 

조사내용


1992  요양시(遼陽市)가 중심도로를 개설할 때,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 동측에서 고구려 석실묘를 발견하였다고 함(王禹浪·王宏北, 2007)

1994  8월에 왕우랑, 송촌윤, 세곡(王禹浪, 松村潤, 細谷) 등 9명이 조사함.


* 옮긴이 주

  세과사소학(税课司小学)은 1992년 逸夫小学으로 개칭된 듯  https://baike.baidu.com/item/逸夫小学/7357235

 


구조 특징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던 곳은 현대 건축물들이 자리 잡으면서 사라짐. 또한 요동성에 모습에 대한 문헌기록도 상세하지 않음. 그런데 1953년 3월 북한 평안남도 순천군 용봉리에서 고구려 요동성이 그려진 벽화묘(요동성총)가 발견됨(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1958).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시기는 대략 4세기 말~5세기 초이고, 처음에는 ‘양평(襄平)’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요동성(遼東城)’으로 개칭됨. 따라서 요동성총의 성곽도는 5세기 전반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음. 하지만 요동성총이 4세기 후반에 처음 조영되어 5세기 전반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시신을 매장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음(여호규, 1999).


무덤에 그려진 요동성의 성곽도를 보면, 먼저 성 서쪽에는 산이 있는데, 지금의 수산으로 추정됨. 성 동쪽에는 강이 있는데, 지금의 태자하로 추정됨(魏存成, 2002). 요동성 평면은 장방형임. 그리고 내성과 외성으로 나눌 수 있음. 내성은 서남모서리에 있고, 면적은 대략 성곽의 1/2임. 성 사이에는 성문으로부터 나오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음. 성벽에는 성가퀴와 치가 설치되어 있음. 성가퀴와 치는 벽돌과 돌을 쌓아 축조한 것으로 보임. 성의 모서리에는 각루가 있는데, 각루는 모두 단층임. 문루는 외성 동문, 서문, 남문에 있는데, 외성 동문, 서문의 문루는 2층인 반면, 남문의 문루는 단층임. 외성 동문 안쪽 좌우에 단층집이 한 채씩 있는데, 오른쪽 집 밑에 해서로 “遼東城”이라고 쓴 명문이 있음. 내성은 상업구역 혹은 일반인의 거주구역으로 추정됨(李殿福, 1994). 내성에는 2층 기와집과 3층 목탑(누각)이 있음. 이로 보아 내성은 요동성 통치집단의 거주지(魏存成, 2002; 이러한 내, 외성의 배치는 후한대 내몽고 화림격이(內蒙古 和林格爾)의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고분에서 발견된 번양, 영현(繁陽, 寧縣) 등의 성시도(城市圖) 벽화에도 보인다고 하면서 후한시대 주현(州縣)의 일정한 규율로 파악하기도 함.)나 관서가 있던 곳(李殿福, 1994)으로 추정됨. 외성 동문 바깥에도 누각 같은 다층집이 한 채 있음. 한편 문루나 각루 사이에는 루각으로 보이는 건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치 위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됨(田村晃一, 1988). 성곽도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의 요동성은 내성과 외성이 결합한 구조임. 그리고 성곽은 평면이 방형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고구려 성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음(王禹浪·王文轶·王宏北, 2010).


645년 당군(唐軍)이 요동성을 공격할 때, 성벽 주위에는 해자를 둘렀고.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설치하였으며, 각 모서리에는 각루를 세웠음을 알 수 있음. 주몽 사당 외에도 성곽내부에는 많은 건물을 조영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실제 1980년대 초에 요양구성 동북부에서 두 갈래의 토루와 함께 판축기법으로 다진 건물기초부 2곳이 발견됨(여호규, 1999).


요양시 중심부와 그 부근에서 戰國時代~漢代의 유적이 많이 발견됨. 고구려시기의 유물은 요양시 구성구(遼陽市 舊城區) 북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함(여호규, 1999).


20세기 전반에 요양구성 남벽 아래와 동북모서리 부근에서 漢代 기와와 함께 고구려시기 기와가 출토됨(黑田原次, 1942).


1993년 8월 관제묘(關帝廟)를 중수할 때, 관제묘 우측 건물 기초 아래에서 석각이 출토됨. 이곳은 요양구성에서 가장 높은 지점임. 석각은 위에는 “요궁전(遼宮殿)”, 그 아래에는 “성고삼장(城高三丈), 남위삼문(南爲三門), 장이누관(壯以樓觀), 사우유각루(四隅有角樓), 상거각이리(相去各二里), 궁장북유양국황제어용전(宮墻北有襄國皇帝御容殿)”이라고 새겨져 있었음. 일부학자는 석각에 보이는 “양국황제(襄國皇帝)”는 고구려 제18대 왕인 고국양왕 이련(伊連), 어지지(於只支)로, ‘襄’자는 ‘壤’자의 오기로 보는 견해를 보이기도 함. 그러나 ‘让國皇帝’는 요태조(遼太祖) 아보기(阿保機)의 장자인 야율배(耶律倍)의 시호임. 그러므로 이 석각은 요(遼)대에 세워진 것으로, 고구려의 유물이 아님(王禹浪·王宏北, 2007).


요양시가 중심로를 개설할 때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 동측에서 고구려 석실묘를 발견함(王禹浪·王宏北, 2007).


 

역사적 의미

 

요양은 (戰國時代~晋代(전국시대-진대)에는 ‘양평(襄平)’이라고 불렀는데, 戰國(전국)시기 燕(연) 요동군의 수부(首府)였음. 秦·漢代(진한대)에도 요동군의 치소(治所)가 있었고, 왕망대에 일시적으로 창평(昌平)이라고 불렀음. 東漢(동한) 말년에는 公孫氏(공손씨)가 遼東·遼西(요동,요서)를 50여년 동안 점령하기도 함. 319년에는 모용선비가 차지하면서, 전연의 동방중진(東方重鎭)이 되었음. 이 즈음에 요하를 대요하, 태자하를 연수(衍水) 또는 대양수(大梁水)라고 불렀는데, 여름과 가을에 물이 불어나면 배로 대요하에서 대양수로 이동해서 양평성까지 바로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함(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403년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면서 양평성(襄平城)은 요동성(遼東城)으로 명칭이 바뀜. 요동성은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이후, 처음에는 종전처럼 ‘양평(襄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점차 요동성으로 칭해짐. 당은 645년 요동성을 함락시킨 다음 ‘요주(遼州)’를 설치하였고,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를 설치하여 요동일대를 지배하는 거점으로 삼았음.


수나라는 세 차례 고구려정벌을 단행함. 수양제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요동성의 방어시설이 상당히 견고하다는 것을 설명함. 614년 수양제의 세 번째 원정에서는 산동반도에서 온 수군이 먼저 요동반도의 대흑산산성 즉 비사성을 점령하고, 황해를 따라 고구려왕도인 평양성을 공격하고자 했음. 645년 당태종 이세민은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북로군(北路軍)을 이끌고 요동성을 치라고 명하고, 본인은 중로군(中路軍)을 이끌고 요동성에서 이적과 집결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요동성을 격파함. 이후 고구려의 요동성을 요주로 바꾸고, 요주도독부를 설치함.


요동성은 요동지역 육상, 수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사방으로 뻗은 교통로와 세 갈래 요하 도하로의 집결지점임. 그리고 요동성은 요동평원~압록강로의 세 루트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본계(本溪)~봉성로(鳳城路)의 출발점임. 본계~봉성로는 번양(潘陽)에서 사하(沙河)를 따라 나아가는 북쪽 진입로와 요양에서 태자하를 거슬러 나아가는 남쪽 진입로가 있음. 북쪽 진입로에는 번양 탑산(塔山)산성(개모성(蓋牟城))과 본계 변우산성(邊牛山城)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 진입로에는 요동성과 함께 백암성(白巖城)과 고수산성(姑嫂山城)이 태자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면서 길목을 봉쇄하고 있음. 이처럼 요동성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음.


요동성은 5세기~7세기경 요동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성이었는데, 군사중진의 기능 외에 지방지배의 거점이라는 이중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周書』高麗傳에는 국내성, 한성(國內城, 漢城)과 함께 요동성을 대표적인 성으로 기록됨. 645년 당군이 요동성을 함락시켰을 당시, 성 내부에 병사 만여명을 비롯하여 남녀 4만명, 양식 50만석이 있었다고 함. 또한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안시성(安市城) 등에는 안시주(安市州)라는 약미주(躍糜州)를 설치한 반면, 요동성에는 그보다 한 등급 위인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가 설치되었음. 위의 사실들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한편 요동성주 아래에는 ‘요동성 장사(長史)’ 곧 성주의 막료로서 성주 직할지를 관장하는 현령급 지방관인 가라달(可邏達)이 존재하였음. 이로 볼 때, 요동성은 욕살(褥薩)-처려근지(處閭近支)-가라달(可邏達)-누초(婁肖)라는 지방관 가운데 최소한 처려근지,도사(處閭近支,道使)이상이 파견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됨(여호규, 1999).


 

자연환경


요양시는 기원전 3세기~10세기 초까지, 중국 동북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馮季昌·孫進己·馮永謙, 1987).


고구려 요동성지는 요양시 구성구(遼陽市 舊城區) 일대로 비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三國志』卷8 魏書8 公孫道傳에는 238년 曹魏軍이 公孫氏를 공격할 때 “길이 수십장인 유성(流星)이 수산(首山)에서 동북쪽으로 홀러 양평성(襄平城) 동남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晋書』卷1 宣帝本紀 景初 2년조에는 “장성(長星)이 양평성 서남에서 동북으로 흘러 량수(梁水) 곧 태자하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음. 수산은 요양시 서남쪽 7.5㎞에 위치하였고, 양수(梁水) 곧 태자하는 요양시 동남에서 유로를 꺾어 북류(北流)함. 이로 미루어 3세기 중반의 양평성은 수산(首山)의 동북과 양수(梁水)의 서북 곧 요양시 일대로 비정됨. 요양시 일대에서 한대~진대(漢代~晋代) 고분은 요양구성(遼陽舊城)을 중심으로 서쪽의 요양역 부근, 남문 바깥, 동부 특히 동벽 남단, 그리고 북쪽 1.5~3㎞ 거리의 근교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함. 이에 비해 漢代 기와는 요양구성(遼陽舊城) 내부와 동북 모서리 외곽의 동원(東園)부근에서 많이 발견됨. 이로 볼 때, 戰國時代~晋代의 양평성(襄平城)은 요양구성(遼陽舊城) 일대로 추정됨. 다만 동북모서리 외곽에 漢代 기와가 많이 분포하고, 요양구성(遼陽舊城) 동벽 남단 아래에서 後漢代 벽화묘가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요양구성(遼陽舊城)보다 북쪽으로 치우쳤을 가능성이 높음(여호규, 1999; 孫進己·馮永謙(1989)은 요양구성(遼陽舊城)의 동부일대로 비정함).


고구려의 요동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7세기 전반의 상황을 반영하는《翰苑》소인〈高麗記〉에는 “고성의 남문에 비가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매몰되었으며 여러 척이 드러나 있다. 경기(耿夔)의 비이다.”라는 기사가 기재되어 있음. 경기(耿夔)는 2세기 전반 요동태수를 지낸 인물이므로 “고성”은 後漢代의 양평성(襄平城)을 지칭하는 것임. 이로 보아 후한대의 양평성과 고구려 요동성의 위치가 다를 것이라고 추정됨(東潮·田中俊明, 1995; 여호규, 1999).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산성을 축조하였고, 중국 군현 치소(治所)를 그대로 활용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볼 때, 후한~진대에 개축된 양평성을 고구려가 전용(轉用)하였을 가능성이 높음(東潮·田中俊明, 1995;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직후인 414년에 건립된〈광개토왕릉비〉에 ‘양평도(襄平道)’라는 명칭이 나오며, 魏晉代 봉토석실묘와 구조가 동일한 4세기 말경의 요동성총에 ‘요동성’이라는 명문과 함께 성곽도가 그려진 것은 이를 반영함. 한편 요양구성 남벽 아래와 동북모서리 부근에서 漢代의 기와와 함께 고구려시기의 기와편이 출토됨. 그 뒤 요양시 구성구 북부에서 고구려 시기 유물이 상당수 출토되었고, 요양구성 서벽 안쪽의 세과사소학교(稅課司小學校)부근에서 고구려시기 석실묘가 발견됨. 이로 보아 고구려의 요동성은 요양구성보다 동북쪽으로 약간 치우쳤을 가능성이 높음. 따라서 후한대 양평성과 고구려 요동성은 위치가 달랐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대략 일치하면서 성벽 라인이 약간 다른 정도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요양시 일대는 수산(首山) 동북쪽, 태자하 서안의 충적평지에 자리 잡고 있음. 서북쪽으로는 요동평원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구릉성 평지가 전개되다가 천산산맥의 고산준령이 나타남. 요양시 일대는 요동평원~천산산맥의 점이지대로서, 예로부터 요동평원을 따라 요동반도와 혼하(渾河) 방면뿐 아니라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나아가는 육상교통로가 발달함. 요양시 일대는 신민(新民)~반양(潘陽)의 북로, 태안(台安)~안산(鞍山)의 중로, 반산(盤山)~고평(高平)~해성(海城)의 남로 등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渡河路)가 모이는 지역임. 또한 태자하와 요하의 수로를 통해 요동만을 거쳐 서해로 나아갈 수도 있었음. 그리하여 요양시 일대는 육상과 수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국시대 이래 요동지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음(여호규, 1999).


 

유물정보

 

한대 기와편(漢代 瓦片) 1점, 고구려 기와편(高句麗 瓦片) 1점, 석각(石角) 1점


 

참고문헌

 

· 黑田原次, 「遼陽の官署址と寺觀」『遼陽』, 滿洲古蹟古物名勝天然記念物保存協會, 1942

·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평안남도 순천군 룡봉리 료동성 고분발굴」『고고학자료집』 1, 1958

· 馮季昌·孫進己·馮永謙, 「古城址」『東北歷史地理論著匯編』, 1987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續滿洲舊蹟志』 1999-3, 1999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王禹浪·王文轶·王宏北, 「遼東半島高句麗山城槪述」『黑龍江民族叢刊』 2010-2, 2010



요양시 요동성지 위치도 (30만분의 1)


요양시 요동성지 주변지형도 (10만분의 1)


요양구성의 평면도와 한,진대 고분군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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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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