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활약과 조국광복회
(1) 한인들의 중국공산당 입당과 항일유격대의 성립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3) 동북항일연군내 한인들의 활약과 조국광복회
중국 동북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은 중국인보다 먼저 한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박윤서(朴允瑞)와 주청송(朱靑松) 등은 이미 1923년 9월 연길현에 있는 동흥(東興)중학교를 중심으로 ‘고려공산청년동맹’의 지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722) 이들은 코민테른(Comintern, 국제공산당) 산하조직인 코르뷰로(고려국) 내의 한인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또 1926년 5월에는 국내 조선공산당의 해외조직인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북만주 닝구타/영고탑(宁古塔/寧古塔)에 세워졌다.723)
반면 중국공산당은 1927년 10월에야 봉천(현재의 심양)에 ‘중국공산당 만주임시성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는 이 조직 아래 ‘중국공산당 동변도 특별위원회(동만특위)’를 세우고 1928년 2월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에 중국공산당 용정촌 지부를 조직했다.724)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한인들의 역량이 훨씬 우세했다. 이에 따라 중공당 만주성위원회는 성립 직후부터 한인 농민과의 연계 및 토지소유권 부여, 조선공산당 조직과의 연대강화 등을 당면 과제로 삼고 있었다.
한편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이후 조선공산당은 승인이 취소되었고, 국내 공산당재건운동도 일제의 탄압과 운동역량의 미숙 등으로 실패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이처럼 어려운 형편 가운데 코민테른과 중공당에서 ‘일국일당원칙(一國一黨原則)’을 내세우고, 또한 1929년 말부터 내부에서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혁명’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결국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국일당의 원칙이란 중국영토인 만주에는 중국공산당 조직만 인정될 수 있다는 공산당 조직상의 논리이다.
사실 한인 조선공산당원의 중공당 입당배경은 몇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만주에도 미침에 따라 많은 농민들이 파산하고 계급별·민족별 대립이 심화되었던 상황, 중국인 지주와 한인 소작농으로 상징되는 모순관계의 심화, 그리고 장쉐량/장학량으로 대표되는 중국 군벌정권체제하에서 중국공산당과 무관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드러낸 일정한 한계와 파벌대립 등을 지적할 수 있다.
1930년 4월에서 8월 사이에 조선공산당 각파 만주총국은 조직을 해체했고, 그 구성원들은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인 당원들이 중공당에 가입하기 전에 만주지역 중공당원은 100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직후에는 2,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또 지방조직도 12개에서 55개로 확대되었는데, 당원의 85%가 한인이었다.725) 특히 1930년 연변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간도 5·30 봉기’와 지둔/길둔(吉敦)봉기 및 추수투쟁 등 일련의 대중투쟁을 계기로 한인들이 대거 입당하고 중공당 만주조직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이 해 4월 경 길림지방 농민협회 회원은 2,000여 명에 달했고 대부분이 한인이었는데, 이들은 중공당 만주성위의 외곽단체 역할을 수행했다.726)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9·18사변’이 일어나자 중공당 만주성위는 그 직후 각종 선언을 발표하고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실제로 일제와 싸울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때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로 1930년 10월 성립한 동만특별위원회는 항일투쟁이 점차 고양되는 정세에 부응하여<일제의 만주점령을 반대하는 긴급결의안>과<농민운동결의안>등을 발표하여 한인들이 많은 동만지역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에 주력하였다.727) 그리하여 이들은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春荒)투쟁 등의 대중봉기를 주도하며 절박한 농민들의 생존권 쟁취요구를 반제·반봉건투쟁으로 결합시켜 중공당 만주조직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 춘황(春荒) :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아니하여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931년 10월 남만주의 이통(伊通/伊通)에서 창건된 적위대(일명 개잡이대, 打狗隊)는 만주지역에서 중공당이 이끄는 첫 무장조직이었다. 이 적위대의 대장 이홍광(李紅光)을 비롯한 청년 7명은 모두 한인이었다. 남만에서는 이 작은 적위대가 바탕이 되어 1932년 6월 ‘반석공농반일의용군(磐石工農反日義勇軍)(약칭 반석의용군, 반석유격대)’으로 발전했는데, 역시 대부분의 대원이 한인이었다. 이 유격대는 12월에 구동북군계 한족(漢族) 부대와 통합되어 ‘중국 노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약칭 남만유격대)’로 개편되었다.728) 남만유격대는 1933년 1월 말부터 5월 초까지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판스/반석의 근거지를 포위 공격하는 일본군과 만주국군, 일제에 투항한 마적 등을 상대로 60여 차례의 공방전을 치렀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무렵 이 유격대의 규모는 250여 명이었는데, 주요 간부 다수와 대원의 1/4 가량이 한인이었다.729) 때문에 남만유격대는 사실상 한·중 양민족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같은 비율은 남만지역 당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730)
한편 동만주에서도 적위대를 개편한 옌지/연길현 유격대가 1932년 결성되었다. 또 적위대와 평강유격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위랑/어랑촌 유격근거지에서 화룡유격대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왕청현에서는 18명으로 이루어진 돌격대를 바탕으로 유격대가 발족했고, 여기에 별동대·안도유격대 등이 편입되어 왕청유격대로 확대되었다. 훈춘에서는 이 해 9월 영북유격대와 영남유격대가 조직되었다가, 1933년 두 조직이 통합되어 훈춘유격대로 발전하였다. 1933년 경 동만지방 4개현 유격대의 대원은 360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90% 가량이 한인이었다.731) 이들 4개현 유격대는 중국 노농홍군 제32군 동만유격대로 편제되었다가 이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크게 발전하였다.732)
또한 북만주의 경우 1933년 4월 경 허형식(許亨植) 등이 탕웨엔/탕원(汤原/湯原)에서 유격대를 창건했으나, 일제의 탄압 등으로 한 달도 못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공당 주허/주하(珠河)중심현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동북의용군 계통의 패잔병과 이계동(李啓東) 등 13명의 한인들을 바탕으로 주하(珠河)반일유격대를 창건하였다.733) 대장은 한족 자오상즈/조상지(赵尙志/趙尙志)였는데, 이 유격대는 1934년 6월 말 다른 항일의용군과 항일마적 등을 수용하여 ‘동북반일유격대 합동(哈東)지대’로 확대되었다. 이 무장조직이 확대·발전하여 1935년 1월 말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로 개편된다.734) 동만이나 남만유격대와는 달리 북만지역의 유격대 가운데서 한인들의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창설 초기 한인 간부진의 구성이나 이들의 활약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주
722) 임경석,<20년대 중국동북지역의 조선인 만주 공청그룹>(≪이공범교수 정년기념논총≫, 지식산업사, 1993), 695쪽.
723) 김준엽·김창순,≪한국공산주의운동사≫4(청계연구소, 1986), 284·301쪽.
724) ≪조선족략사≫편찬조,≪조선족략사≫(연길:연변인민출판사, 1986;1989년 백산서당 재간본), 99쪽.
725) 김동화,≪중국조선족 독립운동사≫(느티나무, 1991), 126쪽.
726) 김양 주편(金陽 主編), 앞의 책, 84쪽.
727) 황룡국(黃龍國) 주편(主編),≪조선족혁명투쟁사≫(선양/심양/瀋陽:요녕민족출판사/遼寧民族出版社, 1988), 217쪽.
728) 순지잉/손계영(孙继英/孫繼英)·저우싱/주흥(周兴/周興)·송스장/송세장(宋世章),≪동북항일연군 제1군(東北抗日聯軍 第1軍)≫(하얼빈/哈爾濱: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20∼22쪽.
729) ≪동북항일연군사료(東北抗日聯軍史料)≫편사조 편(編寫組 編),≪동북항일연군사료(東北抗日聯軍史料)≫상(上)(베이징/北京:중공당사자료출판사/中共黨史資料出版社, 1987), 87쪽.
순지잉/손계영(孙继英/孫繼英)·저우싱/주흥(周兴/周興)·송스장/송세장(宋世章), 앞의 책, 23·40쪽.
730) 김창국,≪남만인민항일투쟁사≫(연길:연변인민출판사, 1986), 149쪽.
731) 신주백,<1930년대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한국사≫16, 한길사, 1994). 277쪽.
732) 강만길, 앞의 책, 101쪽.
733) 류펑/류풍(刘风/劉風),≪동북항일연군 제3군(東北抗日聯軍 第3軍)≫(하얼빈/哈爾濱:흑룡강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6), 15·20쪽.
734) 장세윤,<허형식 연구-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 지도자의 항일투쟁 사례검토->(≪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993), 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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