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중국의용군과 연합항전
우리역사넷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 2)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 (1) 한국독립군의 성립 및 중국의용군과 연합항전
 
 
1932년 1월 일본군은 만주 서북단의 치치하얼/제제합이(齊齊哈爾)과 만주의 서쪽 끝 진저우/금주(锦州/錦州)를 공략하고 또 대병력으로 하얼빈을 침공하였다. 이에 맞서 리두/이두(李杜)·딩차오/정초(丁超)·펑잔하이/풍점해(冯占海/馮占海) 등의 항일의용군 부대는 일제히 이 도시에 집결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치른 뒤 1월 28일 적을 격퇴시켰다. 이들 부대는 원래 중국 동북정권의 지방주둔군이었기 때문에, 청윈/성윤(诚允/誠允)이 영도하는 항일 길림성정부에 가담할 것을 선언하고 이달 31일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을 조직·선포하였다.696) 그리하여 이 항일세력은 약 1년 동안 괴뢰 만주국군 및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다.
 
이 해 1월 북만주의 우창(오상)·슈란(舒兰/舒蘭) 일대에서 조경한·권오진(權五鎭) 등이 모병·편성한 한국독립군 1개 대대(270여 명 내외)는 본부가 있는 팡정/방정현(方正县/縣)으로 이동하는 도중 약 2,000명 규모의 길림자위군 9사 셰푸청/사복성(谢复成/謝復成) 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하였다. 이 부대는 ‘한국독립군 유격여단’으로 명칭을 붙이고 중국군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공동투쟁하였다. 2월 초 이 합동부대는 한 지방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50여 일간 주둔하였다. 그러나 3월 말 경에는 오상현 이몐포/일면파(一面坡) 부근에서 일·만 연합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말았다.697)
 
한편 이청천이 이끌던 한국독립군 사령부는 이 해 2월 초 옌쇼/연수현(延壽縣)에서 길림자위군의 왕즈웨이/왕지유(王之维/王之維) 부대와 연합하여 투쟁했지만, 일본군의 협공을 받은 중국군이 먼저 투항하는 바람에 세불리하여 패퇴하고 말았다. 한국독립군은 소수인데다가 무기가 별로 없었던 연유가 컸다.698) 그러나 3월 하순 펑잔하이/풍점해 부대와 함께 싸우던 안종명(安鍾鳴) 부대는 아청/아성(阿城) 공격전에서 크게 활약하여 독립군의 명성을 드높였다. 총사령관 이청천은 독립군 부대가 각지에 분산되고 충분한 장비와 병력이 없어 고전하게 되자 참모장 이우정(李宇精)(본명 이규보)을 북경과 상해 등지로 밀파하여 남경에 있던 중국 국민당정부의 원조를 요청케 했지만, 실제로 실행되지는 못했다.699)
 
이후 한국독립군은 이청천 이하 400여 명의 병력으로 길림자위군의 카오펑린/고봉림(考凤林/考鳳林) 부대와 함께 9월에서 11월에 걸쳐 1·2차 쐉청바오/쌍성보(双生堡/雙城堡) 공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했다. 그러나 11월 하순 적의 대공세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고봉림 등이 투항하는 돌발사태가 일어나자 한국독립군도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700) 이에 1932년 11월 하순 한국독립당 주요 인물들은 샤허즈/사하자(沙河子)에서 당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새로운 방침을 결정하였다. 즉 북만지역에서 활동이 곤란해졌으므로 군사활동 구역을 동만(북간도:연변 4개현)과 둥닝/동녕(东宁/東寧)·닝안/영안(宁安/寧安) 등으로 전환하고 이 지역에서 봉기한 길림구국단(吉林救國軍)과 한중합작을 논의하며 장병을 증모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701)
 
1932년 2월 초 연변에서 봉기한 왕더린/왕덕림(王德林)의 길림구국군은 한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9사단의 간도파견군이 출동한 뒤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같은 해 12월 일본군의 대공세로 거의 궤멸되어 왕덕림은 시베리아로 도피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우이청/오의성(吴义成/吳義成)이 사령관 대리로서 야오전샨/요진산(姚震山)·차이스롱/시세영/채세영(柴世榮) 등의 잔존부대를 이끌고 동만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이었다.702)
* 차이스롱/시세영?/채세영?(柴世榮)
 
한국독립군은 1933년 1월 요진산 및 시세영 부대와 연합하여 4가지 방책을 수립한 뒤, ‘중한연합토일군(中韓聯合討日軍)’을 편성하고703) 이후 6월까지 징포/경박호(镜泊湖/鏡泊湖)전투, 스다오허즈/사도하자(四道河子) 및 둥징청/동경성(东京城/東京城)전투 등을 치르며 동·북만주 일대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기간에 군수물자와 군비 등은 대부분 중국군측에서 부담하였는데, 한국독립군측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숙과 김상덕(金尙德)을 관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704)
 
한국독립군은 이 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500여 명의 군세로 2,000여 명의 시세영부대와 연합하여 다뎬즈링/대전자령(大甸子岭/大甸子嶺)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부대를 매복·기습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군수물자의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이 전투는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라 할 만했다. 1932년 4월 간도에 출동했다가 이듬해 6월 말 철수하는 일본군 75연대 등 보·포·기(騎)·공병 혼성부대와 100여 대의 화물자동차, 500여 대의 우마차로 이루어진 수송부대를 타이핑/태평령(太平岭/嶺)이라는 고개에서 저격하여 적을 섬멸했던 것이다.705) 이 전투에서 빼앗은 물자는 다음과 같았다.706)
 
박격포 등 각종 포 8문, 각종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수류탄 100상자, 권총 200자루, 도검 40자루, 군용지도 2,000여 매, 각종 문서 300여 부, 피복·담요·기타 군장비 2,000여 건, 장갑차 2량, 망원경 25개 및 약품 50상자 등(조경한/趙擎韓,<한국독립과 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記實)>,≪혁명공론(革命公論)≫창간호, 뤄양/낙양/洛阳/洛陽, 1933;독립기념관 소장 사본, 71∼72쪽).
 
대전자령 전투에서 대승한 한국독립군은 구국군과 협의하여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羅子溝에 주둔하였다. 이 기간을 통해 무장을 강화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등 부대의 재편성과 전력강화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던 일제 당국은 이 전투 후 한국독립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경계를 강화하였다. 당시 일제의 간도총영사는 “민족파 불령단의 대두(화뎬/화전현桦甸县/樺甸縣) 지방에 근거하여 조선독립을 표방·행동해온 … 이청천 일파는 근래 공산파가 반만항일공작에 기울어 민족주의와 공통점이 있자 최근 다시 대두하여 … 동지 200명을 규합, 중한혁명군(中韓革命軍) 반일철혈단이란 것을 조직하여 어무/액목현 도린허/도림하(都林河) 지방에 근거하여 간도평야 진출의 기회를 엿봄”이라는 내용의 비밀보고를 올리며 한국독립군의 동향을 추적하고 있었다.707)
 
한편 이무렵 백두산 근처의 안투/안도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길림구국군 대리총사령 우이청/오의성은 다뎬즈링/대전자령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이 대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대를 이끌고 대전자 부근으로 이동해 왔다. 따라서 그 동안 독자적으로 활동해 온 시세영부대는 오의성 휘하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한국독립군과 중국군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미 전리품 분배문제로 시세영 부대와 약간의 분쟁을 치른 뒤였고, 더구나 오의성 휘하에는 중국공산당에서 파견된 조바오종/주보중(周保中) 등 상당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하여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708) 특히 이 부대에는 한인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또 주보중이 이 부대의 참모장이 되면서 구국군 각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709) 이러한 경향은 동녕현성전투 이후 더욱 심해졌다.
 
 
 
 
696) 니시무라 시게오(西村成雄),≪중국근대동북역사연구(中國近代東北地域史硏究)≫(도쿄/京都:법률문화사/法律文化社, 1984), 228∼229쪽.
궈팅이/곽정이(郭廷以) 편(編), 앞의 책, 133쪽.
 
697) 장세윤(張世胤), 앞의 글(1989), 338쪽.
698) 조경한(趙擎韓), 앞의 글(1933), 70쪽.
699) 위와 같음.
700) 조경한(趙擎韓), 위의 글(1933), 74쪽.
701) 조경한(趙擎韓), 앞의 글(1942), 55쪽.
 
702) <간도 및 접양지방공비·불령선인의 행동정황(間島及接壤地方共匪·不逞鮮人の行動情況)>(국회도서관 소장≪일본 외무성·육해군성문서≫복사제책본 329권), 8880쪽.
703) 조경한(趙擎韓),<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記實)>(≪혁명공론(革命公論)≫1-4, 1934년 4월), 66∼67쪽.
 
704) 위와 같음.
705) 장세윤(張世胤), 앞의 글(1989), 353∼355쪽.
 
706) 신익희(申益熙)가 주도하던 한국혁명당 기관지로 추정되는≪혁명공론(革命公論)≫4호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 필자 이름은 없으나, 필자는 이 글을 쓴 사람이 조경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경한이 나중에 쓴≪백강회고록≫의 내용과 줄거리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전자령전투의 전과에 과장된 부분이 없는지 우려되기도 하지만, 전투 참가 당사자의 양식을 믿고 그 전과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한다.
 
707) <쇼와(昭和) 9년 5월 17일부(日附) 재간도영정총영사발신재만대사보고적록(在間島永井總領事發信在滿大使報告摘錄)>중<쇼와(昭和) 8년중간도 및 접양지방중요치안사항월별표(年中間島及接壤地方重要治安事項月別表)>8월조(月條)(국회도서관 소장≪일본외무성문고(日本外務省文書)≫ 복사제책본 329권), 8836∼8837쪽.
 
708) 조경한(趙擎韓), 앞의 책(1979), 144∼146쪽.
709) 류웬신(刘文信/劉文信) 편(編),≪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5군(第5軍)≫(하얼빈/哈爾濱:헤이롱장인민출판사/黑龍江人民出版社, 1985), 19∼20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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