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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10년 전후의 배일단체와 그 활동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1. 1910년대 만주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 > 4) 1910년 전후의 배일단체와 그 활동
 
 
한편 국내에서 대일전을 계속하던 각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야만적인 진압으로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소위 남한대토벌이라고 하는 의병 소탕전은 ‘교반(攪拌)적 작전’으로 악랄한 살육작전이었다. 이러한 잔학한 작전은 전라도에 국한되지 않고 북으로 전개되어 올라와 의병활동은 퇴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의병들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만주는 의병의 새로운 근거지로 등장케 되었다.註 036 유인석부대가 지안/즙안(辑安/輯安)·통화 지방으로, 이진룡부대·조맹선(趙孟善)부대·박장호(朴長浩) 부대는 창바이/장백(長白)·푸송/무송(抚松/撫松)·지안/즙안·린장/임강(临江/臨江)지방으로, 홍범도(洪範圖)부대와 차도선(車道善)부대는 혼춘·연해주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들 제부대들은 대부분이 국내의 대일전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새로운 기지를 찾아 만주로 이동했으므로 군세의 재편은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 이를 해결해야 하는 시급하고 절대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 교반(攪拌) : 휘저어 섞다
 
그리하여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얻고 군자금을 축적하며 의식문제해결을 위하여 병농일치의 둔전적 개간농업에 주력하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유인석은 지안/즙안현에서 보약사(保約社)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하여 주민을 지도하면서 의병부대의 재편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 백삼규, 전덕원(全德元), 조병준(趙秉準) 등도 향약단(鄕約團)과 농무계(農務稧)를 조직하였고 홍범도는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으며 이진룡, 조맹선, 윤세복 등도 맹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히 홍범도부대와 차도선부대는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맹위를 떨쳐 연해주, 혼춘 뿐만 아니라 장백현 등 서간도에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였다. 일제당국의 한 보고는 이들 양부대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혜산(惠山) 대안 장백부근에 홍범도·차도선이 출몰하고 있는데 병합을 당하여 이들은 거사를 하려고 준비중이다. 그 수효가 1천이나 되며 노국총, 지나총, 화승총을 합하여 천여 정이나 된다. 이들은 불리할 때는 노령 옌치우/연추(煙秋)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긴다.……註 037
* 노국 : 러시아
* 지나 : 중국
*  옌치우/연추(延秋·煙秋·烟秋) = 얀치헤 (Ianchikhe=Yanchikhe)
 
 
홍범도는 1910년 9월에 불라디보스록에서 총기를 휴대한 약 500의 의병을 이끌고 서간도 신야오슈이동/신약수동(新药水洞/新藥水洞)에 와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군자금은 안창호로부터 2차에 걸쳐 받았다고 한다.註 038 이와 같은 군사훈련은 국내진공을 위한 것으로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국내에도 39명의 밀정을 투입시켜 헌병대와 수비대의 배치를 밀사하고 있었다.註 039 이 시기에 홍범도는 차도선, 채응언(蔡應彥)부대와도 제휴하면서 활동을 하였는데 합동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연설회 등도 가졌다.註 040
 
1911년 11월에는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의병을 중심으로 친목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동지의 간친을 취지로 하였으나 매년 음 2월에 안중근의 제사를 지내는 등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동 친목회는 1910년 가을 펑톈/봉천성 안투/안도(安图/安圖)현 만간구에서 조직된 원동권업회지부(遠東勸業會支部)를 개편 개칭한 것으로 1911년 7월에는 창바이/장백지부에 청원하여 안도현지방 20방리의 개간허가를 얻어 한인의 이주를 시도하기도하였다. 동 친목회의 간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간친 : 다정하고 친밀하게 지냄
 
총회장 : 홍범도
부회장 : 차도선
심판장 : 김택룡(金澤龍)  /  심판원 : 채응언
평의장 : 홍사현(供思鉉)
부평의장 : 강일성(姜一成)
총무장 : 한승교(韓承敎)
사무장 : 서태순(徐泰淳)· 
사무원 : 박영섭(朴英燮)·한두찬(韓斗賛)·홍최세(洪崔世)·안광조(安光祚)·진영근(陳永根)·동선달(董先達)·백남준(白南俊)·탁모(卓某)註 041
 
또 장백부 샤오쓰동/소사동(小寺洞)에서는 일심계(一心契)가 조직되어 김화봉(金化鳳)이 회장이 되었는데 계원은 200명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뤼허/유하현 왕칭볜먼/왕청변문(王淸边门/王淸邊門)에서는 1912년에 야소교 목사 강모가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였다. 노동회는 상부상조를 표방하였으나 배일독립이 목적이었다.註 042 이외에도 회인·뤼허/유하·싱징/홍경(興京) 등지에는 오호파(嗚呼派)와 같은 과격단체 등이 있었다. 특히 서간도의 장백부 무송, 안도현지방에서는 일반주민도 총기를 소지할 수 있어 이주한인은 수렵과 마적 방어 때문에 엽총과 관총(管銃 ; 화승총을 뇌관으로 발화할 수 있도록 개조한 것)을 소지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무기는 의병들의 무장을 용이하게 하였다. 합니하에 살고 있는 이시영은 메이지/명치30년식 군총 약 30정을 저장하고 있었다.註 043
* 회인 = 환런/환인(桓仁)
 
차도선과 채응언은 함경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용명을 날리던 의병장 들로 서간도 일대에서 초기에 크게 활동하였다. 1911년경부터 차도선은 국내공격을 계획하여 부하를 국내에 밀파하여 일군의 경비를 조사하는 한편 혜산진, 보춘동(寶春洞) 등을 습격 일군으로부터 무기를 탈취할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북간도에서 제일 먼저 조직된 배일한인단체는 1906년에 하얼빈/하르빈에서 조직된 대한인장연회사(大韓人莊烟會社)였다. 이는 연초권업(煙草卷業), 동업자 상호간의 구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1911년에 대한인공제회(大韓人共濟會)로 변하였고 순연한 배일단체였다. 또 이와 비슷한 모임인 하르빈의 대한기독교청년회(大韓基督敎靑年會)가 있다. 동 회는 ]910년 1월에 조직되었는데 그 전신은 계연회(戒煙會)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순연한 배일청년단이었다. 후에 대한인공제회와 대한기독교청년회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만주리아지방총회(滿洲里亞地方總會)의 부속단체로 활동을 하였다.註 044
 
1910년에 북간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만주에는 많은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되었는데 그 가운데 제일 광범위한 조직을 한 단체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 만주리아지방총회였다. 만주리아지방총회는 1910년 4월에 조직되어 하르빈에 본부를 두었는데 간부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회장 : 김성백(金星伯)
부회장 : 정대호(鄭大鎬)
총무 : 김주삼(金鑄三)
서기 : 이상익(李相翼)
재무 : 최상후(崔尙後)
학무 : 장신홍(張信供)
법무 : 박명룡(朴明龍)
구제 : 김수경(金壽京)
외교 : 현경주(玄京周)
재미만주리아지방대의원 : 안창호·강영소(姜永韶)·홍언(洪焉)
극동전권위원 : 김장호(金長浩)
 
동 회의 목적은 실업을 발달시키고 교육을 보급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데 있었고 하르빈을 중심으로 스터우허즈/석두하자(石头河子/石頭河子), 헝다오허즈/횡도하자(横道河子), 무링/목림(穆林), 하이라얼/해랍이(海拉尔/海拉爾), 삼성지방회(三姓地方會)와 대한인기독교동흥학교(大韓人基督敎東興學校), 대한민회(大韓民會), 대한인공제회, 대한기독교청년회 등의 부속단체를 관할하고 있었다. 註 045 그러나 중국측에서 동 회의 해산을 명하여 표면상 해산한 것처럼 하였으나 실지로는 그대로 조직을 유지하면서 2개월에서 3개월마다 집회를 하면서 배일국권회복의 시기를 기다리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또 간도 쥐즈지에/국자가에는 대한인국민회 간도지방회가 조직되어 간민교육회내에 있었는데 중앙총회의 직할지방회였다. 회장 이봉우(李鳳雨), 총무 김약연, 학무 오상근, 외교 이동춘·박상익(朴相益), 서기 박태환(朴泰煥) 등 간도지방의 쟁쟁한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혼춘에는 둔전영(屯田營)이 조직되었는데 동 회는 한·중 합동으로 조직한 것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이 협동하여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고 일본의 만주병합의 흉계를 면하자는 데 있었고 처음에는 순치 동지회(脣齒同志會)로 출발하였다. 처음 발기인은 전 혼춘순경국장 왕지에칭/왕결청(王洁淸/王潔淸)·길림참모부원 도바오셴/두보헌(窦宝宪/竇寶憲)·혼춘영대장 모·왕모와 오병묵(吳秉默)·이종호·윤해·황병길이었고 영의 총리 백규삼(白圭三)·부총리 이춘식(李春植)·평의원장 두보헌·평의원 황병길·왕결청·도성(都成)·김립(金立 ; 익용/翼瑢)외 2명이었다.註 046
 
혼춘에는 이외에도 황병길의 지도로 혼춘상무회(琿春商務會)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보다 주목을 할 조직으로는 비밀조직인 해도호(海島號)였다. 해도호는 비밀지하조직으로 표면으로는 한인의 잡화점으로 객주를 겸하고 있었다. 주인은 황중현(黃仲鉉)으로 그는 노령의 항일민족운동가인 이종호의 부하였으며 이종호의 정보원으로 블라디보스톡과 간도방면의 중개를 담당하였다. 해도호의 자본은 혼춘 포굴대(포골대/砲矻台)에 거주하는 김와시리의 명의로 1천 600루불(1루불은 일화 1원 3전 내지 4전)을 지출하였다. 해도호는 점포명이며 1910년 12월 이종호가 노도(露都)로 출발할 때 연추 안정근(安定根)의 집에서 이(李)의 주창으로 비밀회를 조직하고 하이션웨이/해삼위(海蔘威 ; 浦潮斯德/ウラジオストク=블라디보스톡)의 해와 간도의 도자를 따서 붙인 명칭이다. 동 비밀회는 국권회복 배일주의단체로서 이종호, 김익용, 엄인섭, 안정근, 이춘식, 이명화(李明化), 오주혁(吳周爀), 백규삼 등이 회원이었다.註 047 또 무링/목릉하 유역 바이파오즈/백포자(白泡子)에는 신한국민회(新韓國民會)가 있었는데 동 회는 1910년 봄에 국민회원 김성무(金成武)가 노령에서 돌아와 조직하고 부근 청년들을 규합한 후 그 목적을 배일사상의 고취, 교육·기독교 선전, 농업장려, 동포구호 등에 두고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항일독립을 하되 신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으로 간민교육회나 일부 기독교계에서 주장하던 것과 같은 것으로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註 048
* 노도(露都) : 러시아 수도 모스코바?
 
대별남구(大别南沟/大別南溝)에는 둔전영과 같이 중국혁명당 및 노국과 협력하여 일본군을 습격 퇴각시키고 한국을 독립시키자는 창의소(倡義所)가 조직 되었는데 무력투쟁을 주장하고 준비하는 대일강경노선 단체였다. 이 단체의 주요구성원을 보면 회장 송익준(宋翼俊), 부회장 강사언(姜仕彥), 임원 양하청(梁河淸)·최병준(崔秉俊)·채준걸(蔡俊傑)·김종묵(金鍾默)·최병식(崔秉植)·김치관(金治官)·박현보(朴賢甫)·박동도(朴同道)·김인활(金仁活)·최명록(崔明祿) 등이 있었다. 
 
또 이란거우/의란구(依兰沟/依蘭溝)에도 의란구친목회(依蘭溝親睦會)가 있었는데 매월 12일 회합을 가졌으며, 총독정치를 공격하고 결사 국권회복을 표방하였으며 강제로 희원모집을 하는등 강제성을 띤 강경한 과격단체였다. 회장 황성용(黄星鎔), 부회장 노우선(盧禹先), 총무원 남기홍(南基洪), 재무원 궁사현(弓士賢), 평의원 정순지(鄭順芝)외 10 명이었고, 회원은 130여 명이었다. 이와 같이 강경노선을 지향하는 창의소나 의란구친목회와 같은 무력표방단체가 1900년대 초부터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는 것은 의병활동과 함께 독립군의 출현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간도지방에는 유명한 의병장 조상갑(趙尙甲)에 의하여 1912년 1월에 급당(急黨)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동 당은 청국의 동란을 이용 폭동을 야기시켜 조선독립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조상갑 이외에 강윤남(姜允南)·박홍세(朴洪世)·황운식(黃雲植) 등이 수령주(首領株)로 있으며 회원모집과 군자금 모집 및 총기 탄약의 조달에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급당은 덕신사(德新社)에 분회에 해당하는 민권당(民勸黨)을 두었는데 조상갑(趙尙甲)과 기맥을 통하고 있는 김태일(金泰一)이 조직한 단체이다. 수령주는 김태일·현덕승(玄德勝)·장운경(張雲景)·오만석(吳萬石)·한홍세(韓洪世)·진치호(陳致鎬)·원인권(元仁權)·김은산(金銀山)·윤인세(尹麟世)·한봉동(韓鳳童)·강명학(姜明學)·김춘세(金春世)·한일권(韓一權)·김성래(金成來)·김인순(金仁順) 등이었다.註 049
* 수령주(首領株:しゅりょうかぶ) : 수령급
* 기맥 : 연락
 
이상과 같은 배일단체의 조직활동과 아울러 북간도지방에는 국내에서 이동한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이들은 노령의 이범윤, 유인석 등과 연락하거나 활동하면서 모병과 군자금을 준비하고 부대를 재정비하였는데 홍범도·조상갑·박만흥(朴萬興)·김창규(金昌奎)·노우선 등이 있었다. 특히 혼춘하 상류지역인 스다오고우/사도구(四道沟/四道溝), 투먼즈/토문자(土门子/土門子) 부근은 사방이 산악이어서 잠복에 유리하였고 노령으로 피할 수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근거지였다.
 
홍범도부대는 노령으로부터 혼춘, 국자가를 거쳐 서간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1911년 3월에는 종성(鍾城)군 세천(細川)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바이차오고우/백초구(百草沟/百草溝)에는 이범윤의 부하인 김창규, 박만홍, 노우선이 경작에 종사하면서 의병으로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노국식 연발총을 240여 정이나 은닉하고 있었다. 조상갑은 급당을 조직, 무력을 준비하면서 황즈/황직(黃直)지방에서 국내진공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백초구에는 조상갑의 부하 황희준(黃熙俊)의 근거지였다.
* 노국식 : 러시아식
 
간도지방은 1907년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면서 한인사회의 성장과 배일운동에 지장을 주었으나 파출소가 철수한 이후는 의병의 중심지였다. 1910년 6월에 일본군 종성수비 대장이 보고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항상 청국관리를 피하면서 행동하는 자들이므로 명기할 수 없으나 화톈셔/화전사(桦田社/樺田社), 월마교사(月马敎社/月馬敎社), 이란고우셔/의란구사(依兰沟社/依蘭溝社)로부터 톈바오/천보산(天宝山/天寶山) 북방에 걸쳐 행동하는 듯하다”고 하여 지리를 이용하여 전개하는 게릴라식 의병전을 입증하여 주고 있다. 또한 의병의 규모에 대하여서는 홍범도 부대와 같이 1천여 명의 병력으로부터 작게는 수 10명이 있었고, 이들은 때때로 분산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보고는 의병에 대하여 조생갑(趙生甲 ; 조상갑의 오기인 듯함)의 500명, 황모의 200명, 방병기(方炳起)의 500명이 각 부락에 분산하고 있으며 총기는 러시아 단발식을 위주로 러시아 5연발과 관타총 및 엽총 등을 소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 명기 : 분명히 밝히어 적음
 
 
 
 
 
註 036  오세창(吳世昌),「재만한인(在滿韓人)의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1)」,『동양문화(東洋文化)』17집(輯)(1976).
 
註 037 「혜산대안에 관한 건(惠山對岸ニ關スル件)」, 다이쇼원년(大正元年) 5월(月) 31일(日), 조헌기(朝憲機) 제(第)73호(號).
 
註 038 「재외불령선인의 언동(在外不逞鮮人ノ言動)」, 메이지(明治)43년(年) 9월(月) 2일자(日字),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39 「재외불령선인의 언동(在外不逞鮮人ノ言動)」, 메이지(明治)45년(年) 4월(月) 3일자(日字),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0 주 39)와 같음.
註 041 「압록강대안재주선인의 정황(鴨綠江對岸在住鮮人ノ情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2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2 「압록강대안재주선인의 정황(鴨綠江對岸在住鮮人ノ情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2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조선인결사단체현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3 「압록강대안재주선인의 정황(鴨綠江對岸在住鮮人ノ情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2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4 「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5 「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6 주 45)와 같음. 
註 047 주 45)와 같음.
註 048 「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불령선인의 언동(在外不逞鮮人ノ言動)」,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 「노령연해주이주선인의 상황(露領沿海州移住鮮人ノ狀況)」, 메이지(明治)45년(年) 6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註 049 (비/秘)「재외조선인결사단체상황(在外朝鮮人結社團體狀況)」,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재외불령선인의 언동(在外不逞鮮人ノ言動)」, 다이쇼원년(大正元年) 11월조(月調),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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