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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후손 요양 고씨
대고려방진 장수왕 후손마을

고구려 20대 장수왕 후손들이 모여 사는 대고려방진(大高麗房鎭- 현지에서는 '고력방高力房'이라고 부른다. '려麗'와 '력力'이 현지 발음으로는 똑같이 '리' 인데 현지인들은 고구려를 고려高麗라고 부르고 '고리'라고 읽기 때문이다 : 옮긴이)은 인구 4만명 정도의 요령성 태안현의 한 작은 읍이다. 이곳의 요양(遼陽) 고(高)씨는 2천여명, 제일 수가 많은 성씨다.

지난 1989년, 하얼번의 고지겸(高之謙)씨는 [흑룡강신문]을 통해 요양 고씨가 장수왕 후손임을 밝혔다. 근거가 된 것은 집안에 전해오는 족보의 서문 중 "...상전위조선국왕고련지후(相傳爲朝鮮國王高璉之後)..."라는 문구다. 선조(先祖)가 조선 국왕인 [고련](장수왕의 이름)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중국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 고구려 후손임을 밝혔을 때 이익보다 불이익이 더 많을텐데도 족보에 이 문구를 명기한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장수왕의 이름이 거련巨連으로 나온다. 나는 장수왕의 성명(姓名)이 고거련高巨連 이었고 후에 고련(高璉)으로 와전되었다고 본다 - 옮긴이)

취재팀이 이 마을을 찾았을 때 처음 받은 질문은 "한국인이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것이었다. 반가움과 경계심이 함께 담긴 질문이었다. 그만큼 자신들이 고구려 후손임은 비밀 같은 것이었다.

일행은 고제점(高齊占, 84세)씨에게로 안내되었다. 족보를 볼 수 있겠느냐고 하자 노인은 먼지가 뽀얗게 앉은 조그만 나무곽을 들고 왔다. 그 안에는 낡은 족보 한권과 만주국과 중화민국 시절의 땅 문서가 들어 있었다. 마을 내력을 묻자 노인은 "내가 태어났을 때도 대고려방진이었다." 면서도 "얼마 전까지 우리는 위대한 한족漢族인 줄 알았다."고 했다.

식당을 하는 40대의 고진평(高眞平)씨는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고구려가 가장 강국이었으나 끝내 중국에 져서 이 모양이 되었다."며 "역사도 대략 안다."고 했다. "스스로를 한족漢族으로 알다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왕족, 그것도 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왕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들을 찾아온 첫 한국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자제하는 눈치였다.

요양(遼陽) 고(高)씨의 비밀을 처음 캐낸 고지겸씨는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유난히도 족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나이 들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소아과 의사로 일해온 고씨는 문화혁명(문화대혁명 : 옮긴이) 이후 뿌리찾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어머니가 족보를 불태운 뒤였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옛날 족보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그는 고구려 역사도 같이 공부했다.

고구려 역사를 들려준 그는 "실제 고구려 왕국은 전하는 기록보다 오래 갔다."고 했다.(고씨는 고구려가 700년이 아니라 900년 동안 내려온 왕조임을 알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 옮긴이) 고씨는 광개토대왕이 39세로 일찍 돌아가신 것은 "아마 영토 넓히느라 너무 고생해서일 것." 이라는 재미있는 추측도 곁들였다. "우리 고구려 왕손은 그대로 옛터에 살고 있다. 앞으로는 고구려 멸망 이후 왕손들이 줄곧 이 땅에서 끈질기게 버텨왔다는 증거까지 찾고 싶다."

고씨는 아들을 데리고 2년에 한번씩은 장군총을 찾아 제사 지낸다고 한다. 이미 장수왕의 영정도 만들었다. 집안에서 연장자 두 사람의 골상을 토대로 하얼빈 화가가 복원했다고 한다. "선조가 빛나는 고구려 문화를 창조했다."고 자긍심을 내비친 그는 앞으로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어 중국어와 한글로 출판할 것." 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중략) …취재진은 요하(遼河)에서 「대고려방진(大高麗房鎭)」으로 향했다. 고구려 유민의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20대 장수왕(長壽王)의 후손들이 모여 산다는 요양(遼陽) 고(高)씨 집성촌이다. 태안현 특구로 지정된 대고려방진은 그곳에선「고력방」(高力房)으로 표기하고 있었다.『여(麗)와 역(力)의 중국음이 같아 언젠가부터 고력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부향장을 지낸 고굉진(高宏鎭)씨의 설명이다.( : 여麗 와 역力은 북중국이나 만주에서는 똑같이 ‘리’로 읽기 때문이다 - 옮긴이)

중국인으로 살아온 그들은 우리말을 할 줄 모른다. 취재진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곳을 방문했다면서 고씨는 만사 제쳐두고 일행을 안내했다. 그들은 최근에야 자신들이 장수왕의 후손이란 사실을 알았다며 고구려의 역사도 일부 알고 있었다. 만주벌의 고구려인. 고구려는 더이상 역사책 속에서만 묻혀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중략)…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한족(漢族)으로 알았던 고씨라 우리 말은 전혀 못했지만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며 일행을 맞았다. 그의 뿌리찾기 노력은 서재에서 금방 알 수 있었다. 서가에는 고구려 관련서적만 수십권이 꽃혀 있고 장수왕 초상화는 물론 단군영정과 압록강에서 주워온 돌까지 소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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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996년 1월호 월간 「윈(WIN: 지금의 [월간중앙])」기사입니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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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한국인의 낯』이라는 골상학(骨相學 : 사람의 생물학적인 얼굴을 보고 혈통이나 유전자를 알아맞히는 학문)을 다룬 책을 지은 한국인 교수가 확인한 바로는, 요양 고씨들의 얼굴은 전북에 사는 고구려 후손들인 고(高)씨와 아주 비슷하며, 이는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얼굴과도 딱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장수왕의 59세손이라는 고지겸(高之謙)씨와 그 아들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고 하구요. 이들 부자의 얼굴이 너무도 닮아서(아버지와 아들 얼굴이 완전히 닮으려면 어머니도 아버지와 비슷한 핏줄이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물어보았더니 고지겸씨가 하는 말이 “고구려족들은 옛부터 고구려족 끼리만 통혼(通婚)했다.”면서 부인도 바로 옆집에서 맞았다고 말해 주었답니다.(고지겸씨는 요양 고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따라서 요양 고씨는 전북에 있는 고씨들과 더붙어 고구려, 그것도 왕족의 후손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일본 관동關東 - 동경東京 일대 - 에 있는 고구려 후손들이 사는 고려향高麗鄕(이곳 신사를 지키는 사람은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약광왕의 58대손이라고 합니다.)과 동몽골·내몽골의 ‘고올리·고리 (고구려) 산성(山城)들’과 더불어. 요양은 고구려의 흔적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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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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