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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2> 고구려인들의 영원한 고향 요동벌
고구려 유민 저항운동 들불처럼 번져
평양성 함락에도 안시성 등 11개 성 끝까지 대항
부산일보 | 20면 | 입력시간: 2007-01-13 [16:15:03]


요즘 사극을 보면 역사란 죽이고 죽는 전쟁뿐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어떤 네티즌은 한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받은 것은 931번 정도였다고 한다. 큰 전쟁으로는 일본과 17회,중국과 33회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통 중국왕조 가운데 우리와 직접 부딪힌 것이 한(漢)과 수·당(隋唐)이 대표적이었기에 숫자는 이보다 적다. 

상당수 사람들은 중국과 북방민족을 구별치 못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도 거란과 여진,원,청을 중국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의 전쟁터로 요동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가 있게 한 지역으로 그 중심에는 고구려인들이 있었다.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 건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부흥 의지를 살피는 것은 필수다. 한국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서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심의 신라보다 대륙 중심의 고구려를 의식한 나머지,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에 다름이 아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 땅에 세워진 발해는 이미 한민족의 왕조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당나라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항거하며 고구려 부흥을 꾀했던 안시성(사진 아래쪽이 내부). 사진 중간이 성곽 흔적이다. 양만춘 장군이 주민과 함께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랴오닝성 하이청(海城) 남동쪽의 잉청즈(英城子)로 지금은 한국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제한돼 있다. 사진 제공=서길수 서경대 교수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 많은 고구려민들은 잠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신라로 그리고 일부는 몽고 방면의 돌궐 등으로 이주하였는가 하면,소수는 일본열도로도 이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지배층 및 부호들을 비롯한 2만8천여 호는 당나라로 내지로 옮기게 되었는데,이는 당이 고구려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으로 이주된 세력 가운데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집안과 같이 영주(차오양)로 간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고선지와 같이 안서인 서역 근방으로 이주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부류도 있었다. 

당으로의 강제 이주정책은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일으켰다. 670년에 설인귀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틈을 타 검모잠(劍牟岑)이 일으킨 고구려 부흥 운동이 그것이다. 평양성에서 일어난 검모잠은 신라로 간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뒤 지금의 황해도 재령인 한성을 근거지로 항쟁하였다. 부흥 운동의 불길은 또한 요동 안시성으로 번져갔다. 강제 사민(徙民)의 여파로 불만에 차 있던 유민들은 당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앞서 668년 고구려 멸망 때 평양성의 함락과 보장왕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구려 성들은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의 성(城)이란 오늘날의 시·군과 같은 행정단위였다. 당시의 전선(戰線)은 오늘날과 같은 선이 아니라 하나의 포스트인 점(點)이었다. 때문에 보급로가 문제만 없다면 항복하지 않은 성을 젖혀두고도 얼마든지 평양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성들 가운데 당의 무력에 정복당한 성은 혈성과 은성,사성,3개 성밖에 없었다. 평양성의 함락과 함께 양암성 등 11개 성이 스스로 항복하여 전체적으로 당나라가 장악한 성은 14개였다. 

이에 반하여 당나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성은 18개였다. 그 중에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 대항한 성은 11개로 북부여성,백석성(백암성),안시성,요동성,신성 등이었으고,항복하지 않고 주민들이 일시 도망한 성은 연성 등 7개였다. 이미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양성의 함락과 고구려 멸망은 당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사실상은 신라에 의한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신당(나당)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다름 아닌 김춘추의 외교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관할하기로 하였던 밀약과 고·수(高隋),고·당(高唐)전의 뼈아픈 복수전을 위해서,신라는 당나라에 최후 승리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당시 신라의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문무왕 8년:668년)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9월 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평양성 공격은 당나라에 의해서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나라가 개선할 때에는 당나라 이적과 승전군의 일환으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그리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함께 하였다. 

당나라의 9도독부(고구려),계림도독부(신라),웅진도독부(백제) 설치를 통해 그 야욕을 깨닫게 된 신라는 당나라 축출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이때의 신라군은 통일을 위해 상쟁하던 삼국시대의 신라군이 아니라,백제와 고구려인들까지 합세한 '통일신라군'이었다. 설인귀의 잦은 공격도 이들을 통해서 막아내었다. 고구려 유민의 강력한 저항과 통일신라군의 공격으로 안동도호부는 676년 평양을 버리고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라오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으며,도호부는 이어 677년에는 신성(新城:푸순)으로,705년에는 평주(平州)·요서군(遼西郡) 등으로 옮기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관할하기로 한 당과의 밀약과 경주의 지역적 한계로 말미암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 건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인들과 대화하면 난감할 때가 있다. 중국을 갈 수 없었던 1987년 겨울 대만에 가서 자료 수집과 언어연수를 하였다. 당사(唐史)를 공부하지 왜 하필 발해사를 하느냐는 질문은 그저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이후 방문한 중국 학자들과의 대화는 좀 달랐다. 평화를 생각하며 학문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 와 화가 난 적이 있다. 그의 말에는 중국에 저항하거나 반하는 학문은 평화가 아니라는 중국중심적 시각이 짙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였다. 20개국과 인접한 중국으로서 변방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패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로 주변국을 설득하려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룩되어 온 과정을 다만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날을 기대해 본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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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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