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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 - lyuen  http://tadream.tistory.com/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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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고구려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

- 정복당한 자의 운명 

전근대 세계에서 정복 당한 자의 운명은 뻔한 법이다. 남자들은 죽거나 노예가 되고, 여자들은 성적 폭행의 대상이 되는 것. 668년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겪었던 운명도 크게 보면 그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신당서나 구당서, 삼국사기처럼.... 엄청난 대사건도 단 몇줄로 마무리하는 무미건조한 정사류 역사책에서 멸망한 국가의 개인이 직면했음직한 참혹한 경험을 더듬어 보긴 쉽지 않다. 그렇다고해서 고선지나 이정기 등 당에서 한때나마 성공의 길을 걸었던 인물을 통해서 고구려 유민들의 서글픔을 읽어 내기도 어렵다. 

고구려 유민들의 이야기를 할때 학계에서 가장 논쟁이 치열한 부분은 유민들이 중국에 많이 남았는지 아니면 발해 혹은 신라에 많이 남았는지를 계산하는 숫자 싸움이다. 고구려 유민의 양적 귀속을 통해 고구려를 계승한 자가 누구인지를 따져보자는 것이 그 논쟁의 출발점이다. 물론 이러한 계산도 의미가 있고 과거에 나도 몇차례 계산을 한 적이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이런 계산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유민의 인구 숫자로는 결코 읽어낼 수 없는 정복당한 자의 슬픔이다.

정사 외에 야사로까지 범위를 넓혀 몇 건의 사료를 살펴본다면 고구려 유민이 겪었던 운명의 편린을 더듬어 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중국 당나라대에 편찬된 야사 중에 조야첨재라는 책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책이 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중국 당나라 장작(658-730)이 지었던 조야첨재다.

현존하는 조야첨재의 잔본에는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시대의 야사나 일화성 이야기가 다수 실려 있는데 그 중에는 고구려 유민에 관한 가슴 아픈 이야기도 있다. (주어 목적어가 생략된 부분을 보강하고 일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생략하는등 의역함)


京兆人高麗家貧,於御史臺替勳官遞送文牒。其時令史作偽帖,付高麗追人,擬嚇錢。事敗,令史逃走 追討不獲。御史張孝嵩捉高麗拷,膝骨落地,兩脚俱攣,抑遣代令史承偽。準法斷死訖,大理卿狀上 故事,準名例律,篤疾不合加刑。孝嵩勃然作色曰,脚攣何廢造偽,命兩人舁上市,斬之。<조야첨재 권2>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사는 한 고구려인의 집이 가난해서 어사대 훈관을 대신해 문서를 수발하는 일을 했다. 그때 한 하급관리(영사)가 가짜로 문서를 만들어 고구려인으로 하여금 사람을 쫏아 돈을 받아오게 시켰다. 일이 실패하자 그 하급관리는 도망을 가서 추적을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당나라 어사 장효숭이 고구려인을 잡아 고문을 해서 무릎뼈가 땅에 떨어져 두 다리를 모두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하급 관리의 위조한 죄를 대신해 고구려인을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대리경이 장계를 올려 말하길 옛 고사에 따르면 병이 심한 자에게 형을 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했다. 어사 장효숭이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길 "못쓰게 된 다리로 어찌 죄를 없앨 수 있겠는가"라며 명을 내려 끌고가 고구려인의 머리를 자르게 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한 고구려인이 살았는데 집이 매우 가난해서 관청 심부름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문서 위조의 죄를 뒤집어 쓰게 됐다는 것이 위 일화의 줄거리다. 이 이름 없는 고구려인은 무릎뼈가 부러질 정도로 혹심한 고문을 받고도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길지 않은 일화지만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포로 혹은 강제이주로 중국 내지로 끌려갔던 고구려인들이 겪었을 피곤한 삶을 읽어 내기에 어려움이 없다. 


中書舍人郭正一破平壤,得一高麗婢,名玉素,極姝豔,令專知財物庫。
正一夜須漿水粥,非玉素煮之不可。玉素乃毒之而進,正一急曰 此婢藥我, 索土漿、甘草服解之,良久乃止。覓婢不得,并失金銀器物十餘事。錄奏,勅令長安、萬年捉不良脊爛求賊,鼎沸三日不獲。不良主帥魏昶有策略,取舍人家奴,選年少端正者三人,布衫籠頭至衛。縛衛士四人,問十日內已來,何人覓舍人家。衛士云:有投化高麗留書,遣付舍人捉馬奴,書見在。檢云 金城坊中有一空宅,更無語。不良往金城坊空宅,並搜之。至一宅,封鎖正密,打鎖破開之,婢及高麗並在其中。拷問,乃是投化高麗共捉馬奴藏之,奉敕斬於東市。<조야첨재 권5> 

당나라 중서사인 곽정일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함락시킬 때 한 고구려 여자 종을 얻었다. 이름이 옥소인데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가졌다. 곽정일이 옥소로 하여금 집안의 재물고를 관리하게 맡겼다. 곽정일이 어느 날 밤에 죽을 찾으니 고구려인 계집종 옥소가 끓여야 한다고 대답했다. 옥소가 독을 타서 죽을 주니 곽정일이 이를 알고 급하게 말하길 "계집종이 내게 약을 먹였다"고 말하고는 토장과 감초를 찾아 먹고 치료를 했다. 고구려인 계집종 옥소를 찾을 수 없었는데 집안의 금은 기물 10여점도 아울러 없어졌다. 

황제에게 보고하니 칙령을 내려 장안의 치안관리 불랑으로 하여금 매우 급히 수색하게했으나 3일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이때 불랑의 밑에 위창이란 인물이 책략이 있어 곽정일의 집안에서 어리고 단정한 용모를 가진 노비 3명을 잡아 왔다. 위사 4명을 묶어 묻기를 열흘 내에 누가 곽정일의 집을 기웃거린 일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위사가 말하길 항복한 고구려 사람이 촉마노에게 편지를 남겼다고 답했다. 

편지를 살펴보니 "장안 금성방 가운데 빈집이 한 채 있다"고 적혀 있을뿐 다른 말은 없었다. 불랑이 금성의 빈집을 찾아 수색을 하다보니 한 집에 정밀하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니 고구려 계집종 옥소와 항복한 고구려인이 그 안에 있었다. 고문을 하니 항복한 고구려인과 촉마노가 공모를 해서 숨긴 것이었다. 명을 내려 동시에서 목을 잘랐다.


이것은 더 슬픈 이야기다. "極艶'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엄청난 미모를 자랑했던 고구려 여인 옥소는 평양성이 함락될 당시 포로로 잡혔던 인물인 것 같다. 고구려에서도 노비 신분이었는지 아니면 포로가 되면서 예쁜 얼굴 때문에 끌려 와서 노비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던 옥소가 꿈꿨던 것은 자유로운 삶이었다. 

옥소가 벌였던 탈출극에는 또다른 항복한 고구려인이 등장한다. 두 사람이 한 집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고구려인은 옥소와 연인 사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쩌면 이 사람은 연인 옥소가 당나라 관리의 계집종이 되어 밤 시중까지 들어야하는 처지가 되자 함께 탈출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연인 옥소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당나라 내지로까지 찾아갔던 것일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이 감행했던 사랑의 탈출은 죽음으로 끝났다. 조국으로부터 수만리 떨어진 적국 땅에 끌려갔던 고구려인 남여의 비참한 최후는 21세기의 한국인이 읽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구석이 있다. 우리를 까오리 뻥즈로 부르는 그들이 과연 우리가 느끼는 이 씁쓸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고구려 유민 이야기를 할때 타밀고원을 누볐던 고선지 장군을 이야기하거나 산동반도에 웅거했던 이정기를 떠올리며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이 꼭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인지도 의문이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기억해야할 인물들은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무릎뼈가 부서질 정도로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렸던 무명의 고구려인이나 처연한 사랑의 아픔을 남긴체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고구려 아가씨 옥소가 아닐까.

* 참고자료-조야첨재, 중국 소재 고구려 유민의 동향(김현숙,한국고대사연구23), History of the China Vol.7
* 의역을 할때 상기 논문의 번역을 참조했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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