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w4fLY7 (문서파일)
* "古代 東北亞 沿岸航路와 榮山江․洛東江流域 - 姜鳳龍" 중 "2.낙랑․대방군의 해상교역 주도와 영산강․낙동강유역 - 2) 영산강유역의 ‘新彌諸國’과 낙동강유역의 ‘加耶諸國’" 내용에서 침미다례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영산강유역의 ‘신미제국(新彌諸國)
낙랑․대방군이 동북아 연안항로 교역을 주도하는 시기에 군곡리 패총이 영산강유역 동향을 반영하는 대표 유적지라 한다면, 다음 기사는 거의 유일한 문헌자료라 할 수 있다.
이에 장화(張華)를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持節 都督幽州 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전출하였다. 신구(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케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 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7)
윗 기사에 나오는 장화(張華)는 진대(晋代)의 유명한 시인(詩人)이자 명재상(名宰相)으로서 내외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으나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좌천되어 유주도독으로 전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유주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변방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듯하다. 윗 기사에 의하면 장화가 유주(幽州)의 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수행했던 변방 정책의 최대 성공 사례로서, 이제까지 내부(來附)해 오지 않던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 20여국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오게 된 사실을 특기하고, 이러한 외교적 쾌거를 성취할 수 있었던 이유로 ‘무납신구 융하회지(撫納新舊 戎夏懷之)’하는 그의 포용력있는 정치력을 들고 있다. 20여국이 조공을 바쳐온 사건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었던가는, 이들이 조공을 바쳐온 것에 대해 ‘사방 경계의 근심이 없어지고 매년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고 특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이 ‘견사조헌(遣使朝獻)’해온 사실은 '진서(晋書)' 제기(帝紀)에서도 확인된다.8) 이에 의하면 태강 3년(282) 정월에 장화를 도독제군사로 삼았고, 9월에는 동이 29국이 방물을 바쳐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의 정확한 수는 29국이었음을 알겠고, 이들이 처음 조공을 바쳐온 시기는 282년 9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 기사에 나오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우선 ‘동이마한’의 동이는 막연히 ‘동방의 세력’을 지칭하는 추상적인 개념이고, 마한은 한반도 남서부(경기․충청․전라지역)를 지칭하는 지역적 개념으로 보이므로,9) 결국 골자는 ‘신미제국’만이 남게 된다. 그런데 나) 기사에 의하면 ‘동이마한신미제국’은 ‘의산대해(依山帶海)’의 지형을 하고 있고 유주(幽州)에서 4천 여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미제국은 서남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서남해 영산강유역의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기사의 문맥으로 볼 때 ‘신미제국’은 그 뒤에 나오는 20여국(29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점에서 윗 기사는 영산강유역의 ‘신미제국’, 즉 ‘신미(新彌)의 여러 나라’ 29개국이 집단적으로 진 왕조에 처음으로 조공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침 영산강유역에는 3세기 후반부터 독특한 옹관고분을 조영하는 ‘옹관고분사회’가 대두하여 정치․문화적 연대망을 형성해가고 있었으니, ‘신미의 여러 나라’란 ‘옹관고분사회’를 구성하는 소국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산강유역 소국들의 이름은 일일이 알 수 없으나 이들을 ‘신미’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살필 수 있다. ‘신미(新彌)’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침미다례(忱彌多禮)’와 상통하고, 통일신라시대에 해남군의 현산면 일대를 지칭하는 침명현(浸溟縣)과도 통하는 명칭으로, 군곡리 패총이 조성된 지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곡리 패총은 통일신라의 침명현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후술하듯이 ‘침미다례’로 비정되기도 하는 유적지로서, 앞에서 살폈듯이 낙랑․대방군이 동북아 연안항로의 교역을 주도하는 시기에 중요한 거점포구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군곡리 일대의 지명 혹은 소국 이름이 ‘신미’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윗 기사에 나타나듯이 진왕조가 처음 조공을 바쳐온 영산강유역 20여국(29국)을 통칭하여 ‘신미제국’이라 했다는 것은,10) 군곡리의 포구세력=‘신미’가 영산강유역 세력집단을 외부세계와 소통시키는 중심적 관문지역사회(gateway community)로11) 기능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렇듯 자칭이든 타칭이든 영산강유역 세력집단을 ‘신미’라 통칭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면, ‘마한’이라는 포괄적 명칭이나 ‘옹관고분사회’라는 임시적 명칭, 그리고 ‘모한’이라는 모호한 명칭 보다는 ‘신미’라는 이름을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함이 어떨까 하며, 이를 제안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신미제국’이 왜 282년에 처음으로 진에 조공을 바쳤던 것이고, 진은 이를 크게 평가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12) 영산강유역 신미제국은,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여 낙랑․대방군에 위협적 세력으로 급성장하자, 백제의 남침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낙랑․대방군의 모국인 진 왕조에 처음 집단적으로 사신을 파견했던 것이고, 이에 진 왕조는 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배후 세력이 스스로 조공을 바쳐오자 크게 고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진이 ‘신미제국’의 조공 사실을 대서특필한 이유일 것이다.
주석
7) '晋書' 卷36 列傳6 張華條.
8) '晋書' 卷3 帝紀3 武帝 太康 3年(282)條
9) 강봉룡, 1999 「3~5세기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와 그 성격」 '역사교육' 69
10) 영산강유역 세력집단이 스스로 '신미'라는 이름으로 진에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1) 관문지역사회(gateway community)에 대해서는 이현혜, 「4세기 가야지역의 교역체계의 변천」『한국고대사연구』1, 1988 ; 『한국 고대의 생산과 교역』, 일조각, 1998, 298~301쪽 참조.
12) 강봉룡, 1997 「百濟의 馬韓 倂呑에 대한 新考察」 '한국상고사학보'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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