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76366
백제인들은 왜 '흠결녀' 소서노를 숭배했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근초고왕>, 두 번째 이야기
10.11.12 10:25 l 최종 업데이트 10.11.12 10:25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근초고왕>의 소서노(정애리 분). ⓒ KBS
지난 6일 KBS1 <근초고왕> 제1부에서는 '전통 여성상'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 하나 등장했다. 한때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부인이었던 소서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드라마 속의 소서노(정애리 분)는 주몽(이덕화 분)이 애초의 약속을 깨고 전처소생인 유리를 후계자로 내세우자, 이에 불만을 품고 주몽과의 이혼을 선포한 뒤에 두 아들인 비류·온조를 데리고 남하하여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우는 데에 기여했다.
사실, 소서노는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 2개국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 공로를 세웠다. 도합 '2승'을 거둔 셈이다. 건국이나 혁명은 일생에 한 번도 성취하기 어려운 대업이다. '1승'도 어려운데, 소서노는 '2승씩'이나 거둔 것이다.
혁명의 열매를 따먹는 데에 치중하지 않고 혁명 그 자체에 순결을 바친 체 게바라(1928~1967년)는 쿠바혁명에서 '1승'을 거둔 뒤에 콩고와 볼리비아에서 '승점 추가'에 나섰지만,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만큼 한 개인이 일생 동안 건국이나 혁명을 2회 이상 이룩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소서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혁명 여전사 소서노, 결혼 경력도 화려하네
▲ 드라마 <근초고왕>의 주몽(이덕화 분). ⓒ KBS
소서노의 프로필을 확인해보면, 그가 단순히 위대할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꽤 독특한 유형에 속하는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미우나 고우나 죽을 때까지 한 남편만 섬겨야 했던 일부종사(一夫從事) 스타일의 조선시대 여성들과 비교하면, 소서노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 여성상'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여인이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서 김부식은 소서노의 프로필과 관련하여 2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나는 주몽과 결혼하여 비류·온조를 낳은 뒤에 주몽과 헤어졌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부여 사람 우태와 결혼하여 비류·온조를 낳은 뒤에 우태가 죽고 나서 두 아들을 데리고 주몽과 재혼했다가 헤어졌다는 것이다.
둘 중에서 가능성이 더 큰 쪽은 두 번째 것이다. 주몽이 소서노의 첫 남편이 아닐 가능성,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했다가 이혼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백제 왕들이 대대로 부여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을 세우고 거기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아닌 부여 시조 동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명왕' 하면 흔히 주몽을 연상한다. 그래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명왕 사당을 주몽 사당으로 오해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동명왕과 주몽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이 점은, 1922년 중국 낙양(뤄양)에서 발견되어 북경대학(베이징대학)에 보관 중인 천남산묘지명(泉男産墓誌銘)이란 비석 자료에서 확인된다.
'천남산묘지명'이란 것은 당나라 장안(長安, 당시 연호) 원년에 낙양에서 사망하여 이듬해인 장안 2년 4월 23일(702.5.24) 무덤에 매장된,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천남산(泉男産)의 묘비에 기록된 글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동명왕은 부여의 시조로서 주몽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었다.
참고로, 연개소문의 아들이 왜 천씨인가 하고 의문을 가질지 모르지만,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로 끌려간 뒤에는 연남산이 더 이상 연(淵)이란 글자를 사용할 수 없어서 '천'이란 성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 고조인 이연(李淵)의 연(淵)자를 자기 이름이나 문서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경하므로 이를 피해야 한다는 피휘(避諱) 관념 때문에 성을 바꾼 것이다.
'천남산묘지명'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동명왕과 주몽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고 백제인들이 고구려 시조 주몽이 아닌 부여 시조 동명왕을 숭배했다는 사실은, 주몽의 혈통과 비류·온조의 혈통이 서로 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소서노가 주몽을 만나기 전에 우태와의 관계에서 비류·온조를 낳았다는 두 번째 가능성이 훨씬 더 신빙성이 높은 것이다. 신채호도 <조선상고사>에서, 소서노가 우태와의 관계에서 비류·온조를 낳은 뒤에 37세의 나이로 22세의 주몽과 재혼을 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재혼녀나 이혼녀에 관대했던 백제인
▲ 백제인들이 세운 풍납토성. 서울시 송파구 소재. ⓒ 김종성
이런 점을 보면, 소서노가 남자애 둘을 데리고 재가한 재혼녀였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는 주몽과도 헤어졌으니, 그는 결혼 2회, 사별 1회, 이혼 1회의 기록을 남긴 셈이다. 재혼·이혼 경력에다가 2차례의 건국 경력까지 갖고 있으니, 한국사에서는 꽤 독특한 유형의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 같았으면 "이 여자, 팔자 한 번 셌구나"라며 "에이!" 하면서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자신은 조강지처를 내쫓고 젊은 후처를 들였을 뿐만 아니라 첩을 여럿이나 두고 있으면서도, 소서노 같은 여인들의 재혼 경력만큼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게 조선시대 선비들이었다.
과거시험에 번번이 낙방하여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힘들어 하면서,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한 소서노 같은 여인들을 단지 '재혼녀'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해버릴 수 있었던 게 조선시대 선비들이었다.
사실, 그런 태도는 그들이 배운 경전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하나이자 고대 예법의 백과사전인 <예기> '곡례' 편에서는 "고모나 자매나 딸이 시집갔다가 돌아오면, 형제들은 (그와 함께) 같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같은 그릇으로 먹지도 않는다"라고 했다. 하늘처럼 떠받드는 경전에서 이렇게 가르쳤으니,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혼녀나 재혼녀에 대해 '두드러기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재혼녀 소서노에 대한 백제인들의 태도에 대해 흥미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사람들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정서나 인식이 백제인들에게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 따르면, 소서노가 죽은 지 4년 뒤인 온조왕 17년에 백제인들은 소서노를 추모하는 사당을 세우고 그를 위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사당을 세웠으므로, 그 후에도 정기적으로 소서노를 위한 추모제를 지냈을 것이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하다.
이러한 백제인들의 태도는 단순히 소서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재혼녀 혹은 이혼녀에 대한 백제 사회의 정서나 인식을 표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적어도 그들이 색안경을 끼고 재혼녀나 이혼녀를 바라보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 조선시대 사람들 같았으면,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혼녀이거나 재혼녀라면 그의 능력과 인격을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였더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백제인들의 태도는 비교적 공평했다고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처럼 백제에서 국가적으로 숭배되는 인물 중 하나가 재혼녀였으니, 사회적으로도 재혼녀나 이혼녀가 부당한 차별을 받는 일이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더 적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 재혼녀 소서노를 숭배하는 상황 속에서 재혼녀나 이혼녀에 대한 차별의 논리가 힘을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상이 전부는 아니다
소서노의 사례에서 얻어야 할 본질적 메시지는, 백제인들이 재혼녀를 어떻게 인식했느냐가 아니다. 이 사례에서 배워야 할 더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여성상'이라는 것이 실은 '조선시대 여성상'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상'에 기초해서 '전통 여성상'이라는 것을 확립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한국적 여성상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소 5000년이 넘는 한국사에서, 조선시대 500년은 1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여성상이란 것은 문자 그대로 조선시대의 여성상에 불과할 뿐이지, 결코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 여성상을 구축하려면,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 모든 시대의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평균적인 여성상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비단 여성문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문에서, 10%도 안 되는 조선시대를 갖고 한국사 100%를 '함부로' 규정해온 우리의 기존 태도. 한국 문화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려면,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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