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01199


김부식은 왜 계백은 살리고 백제를 죽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첫 번째 이야기

11.07.25 10:46 l 최종 업데이트 11.07.25 11:15 l 김종성(qqqkim2000)


▲ MBC 드라마 <계백>. 주연은 이서진. ⓒ MBC 


멸망 당시의 백제 지도층 가운데서, <삼국사기> 편찬자들로부터 '이례적'으로 격찬을 받은 부여계백. 그를 소재로 한 MBC 드라마 <계백>이 25일 오늘부터 방송된다.

 

'계백 장군'과 함께 연상되는 단어는 '결사대'다. 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열심히 싸우는 부대를 두고 결사대란 표현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결사대'가 풍기는 뉘앙스는 '패배 가능성이 농후한 절박한 상황'과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이다.

 

'계백 장군'과 함께 '결사대'를 연상시키는 '훈련'을 잘 받은 탓에, 우리 머릿속에서는 백제의 멸망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계백 부대가 황산벌 전투에 뛰어들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그림이 아주 멋지게 그려진다. '백제는 어차피 멸망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느낌도 동시에 각인된다.

 

하지만, '계백 장군은 결사대 대장이었다'는,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온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660년 백제 최후의 날에 벌어진 사건들을 냉정하게 관찰해 보면, 우리는 계백이 이끈 5천 군사가 과연 결사대였는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세 가지를 음미해 보자.

 

백제 총사령부는 자신감이 넘쳤다

 

백제군의 객관적 전력이 상대에게 밀리지 않았다는 점은 백제 총사령부의 전략수립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전쟁 직전 의자왕은 2개의 카드를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카드 A: 당나라 해군이 진입하는 초입인 기벌포(금강 입구)에서부터, 신라 군대가 진입하는 초입인 탄현에서부터 각각 적군을 막으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적군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이 2곳을 거점으로 장기전을 벌이다가 적의 군량미가 떨어질 때에 총공세를 가해 전쟁을 마무리하는 방안.

 

카드 B: 적군에게 기벌포와 탄현을 그냥 내주고 적군이 이 2곳을 지나 좁은 길을 통과할 때에 총공세를 벌여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는 방안. 야구로 치면, 상대 타자 2명에게 포볼을 내준 뒤에 세 번째 타자를 병살로 유도하는 작전.

 

▲ A는 기벌포, B는 탄현.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 삼화출판사 


카드 A는 안전한 반면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안이고, 카드 B는 위험한 반면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방안이다.

 

의자왕의 마음은 A로 기울었지만, 그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B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A의 제안자인 성충(당시 사망)과 흥수(유배 중)를 미워하는 주류세력이 B를 강력하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유 때문에 선택된 카드이기는 하지만, (또 결과적으로 실패한 카드이기는 하지만) B는 상당한 자신감이 없고서는 채택할 수 없는 방안이다.

 

적을 깊숙이 끌어들여 한 방에 끝내겠다는 전략을 택한 것은 백제군이 그만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당연합군의 침공 앞에서 백제 총사령부가 패배를 직감하기보다는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넘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패색이 짙어진 뒤에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한 것은 전쟁의 패인이 전략적 실수 때문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전력 열세 때문에 패배했다면, 자신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며 하늘에 핑계를 댔을 것이다.

 

계백은 패전처리투수가 아니었다

 

계백은 0-10으로 뒤지는 7회 말이나 8회 말에 투입된 패전처리투수가 아니었다. 질 것이 거의 확실하지만 어쩌다 기적이라도 생기면 구원승을 챙길 수 있는 그런 순간에 투입된 투수가 아니었다. 그의 투입 시점은 2회 말이나 3회 말쯤이었다고 봐야 한다.

 

계백의 투입은 예정된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카드 B에 입각한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군이 탄현을 지났다는 보고가 들어온 직후에 의자왕은 계백을 '마운드'에 내보냈다. 이것은 적에게 탄현을 그냥 내주고 적을 안쪽으로 끌어들인 뒤에 한 번에 소탕한다는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백을 따라나선 5천 병사들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떼로 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왜 5천의 병력으로 5만의 신라군에 맞선 것일까? <손자병법> 모공(謨攻) 편에서는 "(아군이 적군보다) 10배일 때는 포위하고, 5배일 때는 (정면으로) 공격하고, 비슷할 때는 싸울 만하고, 좀 적을 때는 도망해도 되고, 아주 적을 때는 피해도 된다"고 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처럼 병법의 기본이다.

 

이런 점을 보면 50만도 아니고 5천의 병력을 갖고 5만의 적군을 맞이하러 나간 계백의 행동이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투 상황을 세밀히 관찰해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계백 장군의 자택(상상의 복원품).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백제문화단지 안에 있다. ⓒ 김종성 


황산벌 전투에서 '5천 병력'은 '5만 병력'을 상대로 5전 4승 1패를 거두었다. 막판의 1패로 완전히 뒤집히기 직전까지 5천 병력은 연속 4승을 거두었다. 막판 직전까지 5천 병력이 5만 병력을 갖고 놀았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5천 병력이 5만 병력을 갖고 놀았다는 것은 5천 병력의 객관적 전력이 월등하게 우세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신라군 5만 명 속에 비전투 요원들이 상당수 끼어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신라군은 자국 군대뿐만 아니라 당나라 군대(당군)의 군량미까지 책임져야 했으므로, 신라군 속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보급부대가 끼어 있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총사령부가 계백에게 5천 병력을 내주면서 5만 병력을 상대하라고 한 것은 신라군의 객관적 전력이 그처럼 낮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의자왕의 눈에는 신라군의 전력이 형편없이 낮았던 것이다.  

 

그럼, 결국 신라군이 전세를 뒤집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신라군의 전력이 객관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 아니다. 소년 화랑들인 반굴·관창이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하자 이를 보고 분노와 용기가 치솟은 신라군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고, 이 같은 뜻밖의 상황 앞에서 백제군이 당황하여 의외의 일격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 살기로 덤벼든 쪽은 백제군이 아니라 신라군이었다. 백제군이 아니라 신라군이 결사대였던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계백을 영웅시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태도가 상당히 과장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계백이 열심히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총사령부의 주문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 장수였다. 총사령부는 신라군에게 탄현을 내준 뒤에 안쪽으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하려 했지만, 계백은 이 작전을 소화해내지 못했다.

 

당군에게 기벌포를 내준 뒤에 안쪽으로 끌어들여 일망타진한다는 작전 역시 함께 실패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백제 총사령부는 지휘관들이 소화해내기 힘든 전략을 수립한 셈이 되고 말았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자왕의 탄식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대세가 결정된 것은 황산벌 전투 이후였다

 

▲ 계백 장군 자택 등 백제시대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백제문화단지의 큰 마당. ⓒ 김종성 


패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계백이 죽기 살기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황산벌 전투 직전만 해도 전쟁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전세가 나당연합군 쪽으로 기운 것은 황산벌 전투 이후의 일이었다. 

 

기벌포를 지나 금강을 거슬러 사비성에 30리 가까이 접근한 당군은 그곳에서 백제군의 주력과 만났다. 이 전투가 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였다. 승리의 여신은 여기서 이기는 쪽에게 미소를 지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백제 정예병 1만 명을 격파했다. 이로써 백제군의 주력은 파괴되었다. 그제야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패배를 인정했다. 이는 그 이전인 황산벌 전투 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전쟁의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를 볼 때, 계백 장군은 패배가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불 속에 뛰어든 결사대 대장이 아니었다. 황산벌 전투 직전의 백제군은 신라군을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 과도한 자만심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백제군을 지배한 분위기는 '비장함'이라기보다는 '자신감'이나 '자만심'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서 계백의 부대를 결사대라고 표현한 것은 역사적 실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이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참고한 원래의 사료에 과연 '결사대'란 표현이 있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결사대란 표현은, 백제의 멸망이 사전에 예정되어 있었으며 그런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처사는 정당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희망사항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부여 계백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싸운 것은 사실이다. 출정 직전에 그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투에 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군인의 대명사가 될 만하다. 결사대 대장이란 타이틀은 계백 자신에게는 결코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백은 결사대 대장'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됨과 동시에 '백제의 멸망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이미지도 함께 부각되어 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망국 당시의 백제 지도층 가운데서 계백을 유독 부각시킨 데는 그런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편찬들은 계백을 살리는 방법으로 백제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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