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xYmG5D


백제, 수·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이중외교

<82> 나당동맹의 서곡

2013. 11. 06   17:42 입력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백제 의자왕 唐의 의도 좌절시켜  김춘추 맞이한 당태종 … 

고구려 견제세력으로 신라 선택


산동성 취푸 공자를 모셔놓은 사당, 대성전(大成殿)이다. 기원전 480년 공자가 타계한 다음 해에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한 행단(杏壇)에 대성전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공자를 위한 석전대제가 처음 이곳에서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제공


649년 음력 2월 왕립대학인 국학(國學)에 들어선 김춘추는 규모에 놀랐다. 학사(學舍)가 1200칸이고, 정원은 3260명에 달했다. 학생들의 국적도 다양했다. 당나라의 전국에서는 물론이고, 신라 고구려 백제 토번 고창 등 중국을 둘러싼 대부분의 나라에서 유학을 왔다.


석전대제가 시작되기 직전 학생들이 예복을 입고 국학의 공자사당 문묘(文廟) 앞 광장에 도열했다. 사당에는 공자·증자·안자·맹자·자사 등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그 앞 제상에는 채소와 나물, 고깃국, 젓갈, 포 등이 진설돼 있었다. 그 정면에 좌측에 돼지, 우측에 소, 중앙에 양(羊) 등 희생물이 조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의례 집행자는 모두 137명이었다. 위패 앞에 잔을 올리는 5명의 헌관(獻官)과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 27명, 팔일무(八佾舞)를 추는 64명의 무용수, 문묘제례악을 연주하는 2개의 악단에 모두 41명이 있었다. 등가와 헌가 두 악단은 의례 절차에 따라 번갈아 연주를 했다. 


손을 씻은 초헌관이 공자 신위 앞에 서니 등가에서 명안지악(明安之樂)을 연주하고, 무용수들이 열문지무(烈文之舞)를 추었고, 초헌관의 헌폐가 시작됐다. 그것이 끝나고 초헌관이 대성지성문선왕 준소에 나가서니 등가에서는 성안지악(成安之樂)을 연주하고 무용수들이 열문지무를 추었다. 초헌관에게 받은 잔을 신위 앞에 올리니 음악은 그쳤다. 축문이 시작되자 모든 참가자가 사당을 향해 엎드렸고, 음악이 다시 시작됐다. 


이런 식으로 아헌례, 종헌례가 진행되고 의식의 종반에 음복이 있었다. 이어 제기와 희생물을 치우고 난 뒤,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고 땅에 묻는 망료례(望燎禮)를 끝으로 절차가 완료됐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춤이 곁들여지는 의식을 본 김춘추는 어떠한 마음이 들었을까. 소감과는 별도로 당조정 신료들과 세계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 김춘추의 석전의례 참관 


외국인 왕족이 석전의례를 참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유학적 학문의 수준과 공자에 대한 숭모의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화의 세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유학을 공개석상에서 철저히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춘추의 의식 참여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동맹체결 움직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 가운데 고구려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보다 심각하게 김춘추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전쟁 중인 당이 신라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김춘추가 중국에 도착하면서부터 고구려 첩자들은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리라. 당태종과 김춘추의 회담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다. 하지만 김춘추의 석전대제 참여 사실이 고구려 유학생들을 통해 알려지게 됐고, 향후 회담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평양의 수뇌부는 직감했으리라. 


당나라에서 일정이 끝나가려는 즈음에 태종이 김춘추를 불렀다. 황제는 김춘추에게 선물로 막대한 황금과 비단을 주었다. 그리고 대화가 오갔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 춘추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됐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해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해 수십 개의 성을 점령해,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백제의 대중국 외교 


김춘추는 고구려 정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당태종에게 백제의 위협에 대해 강력하게 제기했다. 당태종도 김춘추가 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백제는 과거부터 중국과 신라의 군사동맹결행을 철저히 방해해온 국가였다. 당태종도 645년에 직접 체험한 바 있다. 


645년 2월 12일 고구려 침공을 목전 둔 당태종이 낙양에서 신라의 선덕여왕과 백제의 의자왕에게 보낸 외교문서가 658년에 편찬된 ‘문관사림(文館詞林)’이란 책에 실려 있다. 먼저 백제에 보낸 그것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첫머리에 고구려 정벌의 정당성과 원정군 파견사실을 언급했다. 이어 신라의 주장에 따라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세력을 형성한 것을 의심했는데 의자왕이 당태종 자신에게 보낸 외교문서와 백제사신 강신(康信)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므로 백제가 고구려 남쪽국경에 군대를 파견해줄 것을 부탁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라에 파견한 당나라 사신 장원표(莊元表)와 부사 단지군(段智君)이 신라에 도달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했다. 


다음으로 신라에 보낸 내용은 이러하다.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게 된 대의명분은 연개소문의 국왕 살해와 학정에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당군 출정병력의 전체적인 조직을 설명하고 신라에서도 정병으로 편성된 병력을 고구려 남쪽국경으로 파견해 당군의 지휘 아래 군사작전에 참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645년 5월 신라가 병력 3만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한 것은 당태종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가 주력을 북쪽으로 옮긴 틈을 이용해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해 일곱 성을 함락했다. 백제 의자왕은 당태종의 요청을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당을 도운 신라를 공격해 발목을 잡아 당의 의도를 좌절시켰다. 당태종이 김춘추와 마주 앉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제는 수양제에게도 비슷하게 대응했다. 607년 동돌궐 계민가한의 천막궁정(牙帳)을 방문한 수양제가 고구려 사신과 마주쳤다. 초원에 대한 고구려의 공작이 현장에서 발각됐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해 백제가 사신 왕효린(王孝隣)을 보내와 고구려 토벌을 청했다고 한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명운을 걸었던 수양제에게 이용가치가 있는 백제의 사신 파견은 호재였다.


백제는 이러한 수나라의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608년 백제는 수양제의 국서를 받아 왜국으로 향하던 사절의 배를 세웠고, 수나라 사신의 목전에서 국서를 탈취했다. 수양제의 권위를 손상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양제는 백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고구려와 전쟁을 앞두고 있던 수양제의 입장에서 원조를 약속한 백제와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는 약속을 어겼다. 629년에서 636년 사이에 당태종이 신하 위징(魏徵)을 시켜 편찬한 ‘수서’는 이렇게 전한다. “장(璋:백제 무왕)은 고구려와 연화(連和)하면서 속임수로 중국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 7년(611) 양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자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를 보내와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석율(席律)을 백제에 보내어 서로 알게 하였다. 이듬해(612년)에 육군(六軍:황제의 군대)이 요수(遼水)를 건너니, 장도 군사를 (고구려의) 국경에 배치하고 수군(隋軍)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 양단책(兩端策)을 쓰고 있었다.” 백제는 수양제에게 수모를 주고, 611년 신라 가잠성을 함락해 수나라를 돕기 위해 고구려로 향하던 신라군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당태종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645년의 사건을 통해 다시 확인한 후 동맹파트너로 신라를 선택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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