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2183


'쇠사슬' 찬 노예 계백, 이건 아니잖아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계백>, 네 번째 이야기

11.09.05 12:09 l 최종 업데이트 11.09.05 12:09 l 김종성(qqqkim2000)


▲  한때 노예로 전락한 계백(이서진 분). ⓒ MBC 


황산벌 전투에서 맹렬히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계백 장군. 그는 MBC 드라마 <계백>에서 노예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정치범인 아버지와 연루된 어린 계백(이서진 분)이 죄인 신분으로 호송되던 중에 신라군에 붙들려 신라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계백이 한때 노예로 전락했다는 것은 드라마 속의 허구에 불과하다. 비범한 인물이 고난의 과정을 거쳐 큰 업적을 이룬다는 것은 영웅 이야기의 필수 요소다. '노예로의 전락'이라는 설정은 계백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윤색하기 위한 것일 뿐,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이런 설정은 최근 사극들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MBC <김수로>에서도 김수로(지성 분)가 청년 시절에 한때 노예 생활을 했다고 했고, KBS <광개토태왕>에서도 광개토태왕(이태곤 분)이 왕자 시절에 그런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김수로·광개토태왕·계백이 실제로 노예수용소에 끌려갔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시청자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 믿기에는 너무 황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들이 노예 생활에 준하는 고난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라는 느낌은 가졌을 것이다. '노예로의 전락' 설정은 시청자들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김수로·광개토태왕·계백이 살던 시대에는 노예란 것이 상당히 일반적인 '직업'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노예의 처지가 그렇게까지 처참하지는 않았다. 고대 왕국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전쟁을 했는가를 살펴보면 그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따르면, 의자왕 2년 7월(642.8.1~8.30)에 백제는 총사령관인 의자왕의 직접 지휘 하에 신라의 40개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 대야성을 함락했다. 의자왕 3년 11월(643.12.17~644.1.15)에는 백제가 신라 당항성(경기 화성 일부)을 공격하려다가 철수했다. 의자왕 4년 9월(644.10.6~11.4)에는 신라 김유신이 백제의 7개 성을 빼앗았다.  


이런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고대 세계에는 몇 년이 멀다 하고 전쟁이 빈발했다. 어떤 때는 연례행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쟁이 수시로 발발했다. 이렇게 자주 전쟁을 벌인 것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본질적 목적은 농경지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농경지와 노동력 중에서 후자에 초점이 맞추어진 전쟁도 꽤 많았다. 


예컨대, 백제 윤충은 신라 대야성을 함락한 뒤 주민 1천여 명을 사비(충남 부여) 서쪽으로 옮겨놓았다. 또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미천왕 3년 9월(302.10.8~11.6)에 "(미천)왕이 군대 3만을 이끌고 현도군을 침공하여 8천 명을 포획하고 평양에 옮겨 두었다"고 했다. 


노동력 부족사태 해소 위해 '전쟁했다'


▲  드라마 속의 노예들. 군사들의 포위 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 MBC 


전쟁포로가 된 점령지 주민들을 사비 서쪽과 평양으로 옮긴 것은 해당 지역의 농경지를 경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비 인근 및 평양의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소하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동기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농경지 확보를 목표로 벌인 전쟁이었다면 점령지 주민들의 주거지를 그대로 인정했겠지만, 위의 사례에서는 노동력 확보라는 목표가 더 중요했기에 주민들의 주거지를 옮긴 것이다.


전쟁의 목표가 농경지 확보냐 노동력 확보냐는, 그때그때의 경제사정에 따라 바뀌었다. 농경지가 부족한 경우에는, 적국 영토를 점령한 뒤 그곳 주민들에게 경작권을 인정했다. 노동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적지를 빼앗은 뒤 그곳 주민들만 빼내 오기도 했다. 인구 밀도가 낮았던 고대에는 영토를 빼앗는 것보다는 노동력을 빼앗아 자국 농토에 배치하는 게 훨씬 더 유리했다. 


오늘날에는 국가마다 공업기술 수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외국 노동자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할 수 없다. 하지만 농업이 지배적이었던 고대에는 일국의 농민이 외국의 농토를 경작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왕국들은 외국 노동력을 빼앗아 자국 농토에 배치하기 위해 전쟁을 자주 벌였던 것이다. 


점령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전쟁 포로들은 일종의 노예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노예와 노비가 같은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인격권이 인정되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또 노예에게는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노비에게는 그것이 '원칙상'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유사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내 한국학의 대표주자인 제임스 팔레(2006년 작고)가 '노비'를 노예(slave)로 번역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노예'하면 쇠사슬에 묶인 존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은 상태에서 이들을 오랫동안 노동력으로 활용하기란 쉽지 않다. 


노예 착취를 보장한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국가권력이었다. 노예(노비) 제도를 인정해 주고 주인과 노예의 차별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며 노예의 도망이나 항거를 경찰력 혹은 군사력으로 제어해 주는 국가권력이야말로 노예제도를 유지한 진정한 의미의 '쇠사슬'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반에 포르투갈·스페인·영국·프랑스·독일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를 둔다는 것이 상당한 자랑거리였다. 이 시기에는 아프리카 노예가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특히 포르투갈에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 중에는 주인의 배려 하에 대학에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노예를 구속한 '쇠사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지 않고는 이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노예 출신들의 항거. ⓒ MBC 


의자왕 초기의 전쟁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노예 노동력의 확보를 목표로 한 전쟁이 빈발하다 보니, 여기서 양산된 노예들이 전체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중대 범죄나 채무불이행 등으로 노예 혹은 노비로 전락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전체 노동력의 상당 부분이 이들 노예나 노비로 채워졌다. 자영농보다는 이들이 GNP(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높았으므로, 고대 한국은 '노예제 생산사회' 혹은 '노비제 생산사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고 그 숫자도 적어진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이들이 전체 국민 중에서 차지한 비중은 최소 30% 이상이었다. 고대에는 이 비중이 훨씬 더 높았으리라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지금의 비정규직 만큼이나 노예가 많았다


언론에 보도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 3월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577만 1천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33.8%를 차지한다. 이 정도면 한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GNP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은 '비정규직 생산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정규직이 33.8%를 차지한다는 사실. 노예 혹은 노비가 최소 30% 이상은 되었다는 사실. 이 점은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를 흔히 볼 수 있듯이, 고대에는 노예 혹은 노비를 흔히 볼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본다면,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노비가 꽤 일반적인 '직업'이었다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사극에서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극도의 멸시와 천대를 받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은 실제 역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들이 열악한 조건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과도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띠었다고는 볼 수 없다. 


드라마 <계백>에서는 계백의 영웅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계백이 한때 노예였다는 식의 설정을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노예란 것이 꽤 일반적인 직업이었으므로 단순히 노예 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점만 갖고는 주인공이 극단적인 고난을 겪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처지가 '노예 계백'의 처지보다 낫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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