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EQZwiX
백제부흥군 생존 위한 항쟁에 唐軍 전멸 불보듯
<95> 백제 부흥운동
2014.02.19 17:09 입력 | 2014. 02. 19 17:17 수정
고구려 공격 위해 이동하면서 나당연합군 힘의 공백 발생
백제 왕족ㆍ귀족 당으로 압송내분 야기 사회체제 해체 시도
660년 8월 2일 가을 아침 사비도성에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나당연합군의 전승 대연회가 개최됐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가운데 신라왕 김춘추와 소정방 그리고 그 휘하의 장군들이 당상(堂上)에 앉아 술을 대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마루 아래 앉아 있는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륭을 불러 술을 따르게 했다. 기가 막히는 광경을 본 백제 귀족들이 목메어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마루 위의 승자들에게 쾌감을 더욱 북돋을 뿐이었다.
파진산 아래 강안 석성로에서 바라본 부여, 정면으로 멀리 필서봉이 보인다. 660년 9월 말 백제부흥군이 당군이 주둔한 사비성을 압박하기 위해 만든 목책 두 곳 가운에 하나가 위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제공
소정방 백제사회체제 붕괴작업
직후 사비도성을 둘러싼 여러 지역에서 잇달아 백제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점령군 수뇌부가 백제왕을 모욕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다. 궐기는 18만 주둔군의 규모에서 배태됐던 것 같다. 대군이 사비도성 주변에 상주하다 보니 식량과 생필품이 모자랐다. 약탈이 자행됐다. 반항하는 자들이 속출했고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졌다. 그러자 백제인들은 생존을 위해 궐기했다. 청양의 두시원악(豆尸原嶽)에서 좌평 정무(正武)가, 공주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서 달솔 여자진(餘自進)이, 예산 임존성에서는 복신·도침·흑치상지가 봉기했다. 그 기세는 맹렬했다. 8월 26일 소정방이 임존성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많은 국가를 멸망시킨 당제국은 노련했다. 소정방은 백제인들을 분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660년 9월 3일 그는 당군 1만을 현지에 남기고 백제의 왕·왕족·귀족·백성 1만2000명을 당으로 잡아갔다. 당군 13만 가운데 12만을 철수시키고 배의 남은 좌석을 백제인들로 채웠다. 이로써 국가 시스템 운영자들이 백제에서 완전히 유리됐다. 당은 점령지의 왕족과 귀족들을 압송함으로써 그 사회체제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근본 조치였다. 백제부흥운동 지도부에 백제의 일부 왕족이나 귀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핵심의 부재는 결국 그들 사이의 내분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의 평양성 진군
무엇보다 소정방의 철수는 당의 세계전략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대백제전의 최종 목적은 고구려 공략을 향한 징검다리 작전이었다. 660년 11월 16일 당고종은 고구려 침공을 목적으로 계필하력을 패강도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요동도행군총관으로,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행군총관으로 임명했다. 이듬해 1월 19일에 하남과 하북 그리고 회남의 67개 주의 군사 4만4000을 모아 평양도와 누방도의 병영으로 했고,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해 돌궐계 회흘족 유목민 기병들을 소집, 평양으로 향하게 했다. 4월 16일 당의 35개 군단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평양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661년 7월 초 소정방의 함대가 대동강 입구에 상륙을 시작했다. 그것을 저지하던 고구려 군대와 싸움이 벌어졌다. 소정방의 군대는 결국 상륙에 성공했고, 그달 11일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작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만주방면에서 진군해 오고 있는 계필하력과 소사업 휘하의 돌궐계 유목민 기병단이 고구려의 주력을 묶어놨기 때문이다.
그해 7월 17일, 신라는 평양성 공략을 위한 군대를 조직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김유신을 대장군, 인문·진주·흠돌을 대당 장군, 천존·죽지·천품을 귀당 총관, 품일·충상·의복을 상주 총관, 진흠·중신·자간을 하주 총관, 군관·수세·고순을 남천주 총관, 술실·달관·문영을 수약주 총관, 문훈·진순을 하서주 총관, 진복을 서당 총관, 의광을 낭당 총관, 위지를 계금 대감으로 삼았다.”
몽골리아에서 유목민 기병이, 중국본토에서는 보병이 고구려를 향하고 있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경험이 있는 수군이 대동강 상륙에 성공해 평양성을 포위했으며, 신라군도 남쪽에서 북상하려 하고 있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웅진도독부에서 신라에 사람을 보내 백제 현지의 사정이 전해지면서 계획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나라에 항거하는 백제부흥군을 묘사한 국내 TV 사극의 한 장면.
백제부흥군 신라군 발목 잡다
‘삼국사기’ 답설인귀서를 보자. “이때 웅진에서 사람을 보내 와 부성이 고립돼 위태롭다는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유총관이 나(문무왕)와 함께 일을 처리하면서 스스로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길이 차단될 것이오, 웅진길이 차단된다면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당나라 군사가 바로 적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유총관은 드디어 나와 동행해 우선 옹산성을 공격했다.”
소정방이 주력을 이끌고 떠나자 백제 부흥운동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신라가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었다. 660년 9월 23일 백제인들은 사비도성을 공격했고, 나당연합군은 힘겨운 방어전을 치렀다. 그들은 물러갔지만 사비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쌓고 위협했다. 10월 9일 김춘추가 직접 군대를 독려해 18일 논산 연산에 위치한 이례성을 점령했고, 30일에 사비 남쪽 산의 목책을 공격해 접수하고, 사비성의 포위를 풀었다. 김춘추는 11월 22일 왕경으로 개선할 때까지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661년 2월 사비성에 대한 백제인들의 공격이 본격화됐다. 신라는 이를 구원하기 위해 주력사단인 대당·상주·하주·서당·낭당 등의 군대를 파견했다. 3월 5일 대당을 이끌던 신라장군 품일이 두량윤성 남쪽을 정찰하다 백제군의 급습을 받고 패주했다. 3월 12일부터 신라가 36일 동안 두량윤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달 당군은 사비성을 포기하고 본영을 신라와 좀 더 가까운 웅진으로 옮겼다. 4월 19일 대당·서당·하주가 퇴각을 시작했고, 빈골양에서 패배해 상당수의 병기와 군수품을 잃었다. 당시 백제에서 나당연합군은 웅진부성만 장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661년 6월 김춘추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아들과 신라의 미래를 염려하며 세상을 하직했다. 당고종이 신라의 군대를 평양으로 보내라는 전갈이 도착한 것이 그때였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문무왕)원년 6월, 당 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과 유돈 등이 돌아왔다. 그들은 왕에게 “황제가 이미 소정방으로 하여금 35도의 수륙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면서, 마침내 왕께도 군사를 파견해 응원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상중(喪中)일지라도 황제의 칙명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661년에 들어와 당군 1000명이 백제인들과의 전투에서 전멸했고, 신라원군이 와서 백제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周留城)를 포위했지만 참패를 당하고 철수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백제 남쪽지방의 여러 성들이 백제부흥운동의 지도자 복신에게 복속했고, 그는 승세를 타고 6월께 웅진부성을 포위한 상태였다.
7월 당시 신라군 주력이 평양으로 떠나면 백제 웅진부성의 당나라 군대가 전멸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더구나 백제인들은 왜국의 원조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함자도총관 유덕민(劉德敏)과 문무왕은 신라에서 웅진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개통하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백제부흥군은 평양으로 가야 할 신라의 보급품과 병력을 소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남쪽에서 신라군의 발목을 잡아 평양에서 당군과의 적절한 연결시점을 놓치게 했다. 과거 김춘추가 당에 제의한 ‘전쟁 시나리오’는 초반에 적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둠으로 떠밀려가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1~2개월 후 몽골리아에서 돌궐계 철륵 제부족이 당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폐기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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