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EPgXQN


唐 수군 상륙 단 열흘 만에… ‘700년사 백제’ 붕괴

<94>사비성 함락 

2014.02.12 17:22 입력


당나라 군대는 수륙으로 진군해 논산 강경을 향해 나아갔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조를 보면 나당군은 ‘진구(津口)’에서 병력을 합치기로 돼 있다. 논산천이 금강과 합류하는 충남 논산시 강경읍 일대로 여겨진다. 읍 중앙리 일대인 그곳은 금강 본류와 논산천, 강경천과 이어진 염천에 둘러싸여 있어 대군이 주둔하고 함대도 정안시켜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옥녀봉과 중앙리 그 주변은 부여의 사비성 공략을 앞둔 당나라군이 지휘본부를 설치할 수 있는 전략적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소정방의 18만 나당연합군 4개의 길로 나눠 사비성 공격 

갑작스러운 외부 침략에 왕실 상층부 전쟁 의지 상실 


옥녀봉에서 바라본 금강. 1300여 년 전 당나라 배들로 가득 찼던 곳이다.


660년 7월 11일 김유신의 군대가 그곳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소정방은 화가 나 있었다. 신라군 5만이 하루 일찍 도착해 강변의 백제군을 소탕해 줬다면 당군의 희생은 현저히 줄일 수 있었으리라. 그는 군기위반을 명분으로 신라 수뇌부의 기를 꺾으려 작정했다. 당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神丘道) 행군총관에,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嵎夷道) 행군총관에 임했다. 김유신은 무열왕의 아래에 배속된 장군이며 소정방은 신라왕과 동등한 직급이었다. ‘대당평제비’에 의하면 소정방은 신구·우이·마한·웅진 등 14도의 대총관이었다. 무열왕과 그의 신하인 김유신은 소정방 휘하에서 명령을 받아야 할 위치였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소정방은 신라군의 선봉장 김문영(金文穎)을 포박했다. 나당연합군 사이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소정방은 당군의 진영 입구 군문(軍門)에서 공개처형하려 했다. 형식적으로 신라군은 소정방의 휘하에 있다. 신라 장수에 대한 형벌권을 소정방이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신라군 통수권은 완전히 그에게 넘어갈 것이다. 


김유신이 당의 군영에 왔다. 그의 뒤에는 완전 무장시킨 자신의 정예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김유신이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대장군(소정방)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갖고 죄를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는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 전쟁은 당나라 황제의 세계질서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신라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김유신은 당에 대한 신라의 독립적인 주권을 분명히 밝혀 병사들에게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라고 하는 의문을 품지 않게 했다.


김유신은 자신과 신라군에 모욕을 주려고 작정한 소정방을 절벽으로 끌고 가 선택을 강요했다. 언제 두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신라본기는 그때 김유신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에 (김유신이) 큰 도끼를 잡고 (당나라 군영의)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김유신과 소정방의 치킨게임에 돌입했다. 이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당의 장군이 있었다. 우장(右將) 동보랑(董寶亮)은 폭발 직전의 상황을 일단 멈춰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소정방의 발을 밟으며 말했다. 김문영을 처형하면 신라 군사가 우리 당군에 대해 변란을 일으킬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자 소정방은 김문영의 포박을 풀어주고 김유신에게 돌려보냈다. 이로써 양군의 갈등은 봉합됐다. 


사비성으로 밀려간 18만 대군 


김유신의 기세에 꺾인 소정방은 자존심이 상했다. 7월 12일 그는 나쁜 점괘가 나왔다고 핑계를 대고 더 이상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유신이 그를 달래는 어떠한 액션을 모든 병사가 보는 앞에서 취했던 것 같다.


소정방은 군대를 움직였다. 18만에 달하는 군대가 사비성으로 한 길로는 갈 수 없었다. 4개의 길로 병력을 나눴다. 현재 지도상으로 봐도 그 길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것을 추정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석성면 현내리에서 국사봉과 용머리산 사이를 지나 강변을 좌측으로 끼고 현북리에서 중정리로 가서 사비성에 이르는 길이다. 둘째는 현 석성휴게소 부근에서 조폐창을 지나 필서봉을 좌측으로 끼고 이르는 길이다. 셋째, 현 평안기도원에서 석재 가공단지를 거쳐 신암리와 송곡리를 거쳐 이르는 길이다. 넷째, 석성면 증산리에서 경찰충혼탑을 거쳐 청마산성을 우측으로 끼고 능산리를 거쳐 이르는 길이다.


논산에서 사비에 이르는 길들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을 막아낼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 있었다. 하지만, 험한 자연장애물이라 할 수 없었다. 구릉인 그곳에서 육탄으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4개 길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나당연합군을 백제의 젊은이들이 몸으로 막아내다 부서져 떠내려갔으리라.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사들이 절망적인 싸움에서 희생됐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백제) 군사는 모든 병력을 모아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전투 능력이 있는 자들이 상당수 소모되고 이제 사비성에는 보신만 하려는 무능한 자들이 남았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앞에 들이닥치자 백제의 왕자가 상좌평을 시켜 가축과 많은 음식을 보내왔다. 이를 소정방이 물리치자 의자왕의 여러 아들과 좌평 6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빌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항전을 포기한 백제 지배층 


진실은 절망의 순간에 모두 밝혀지는 법이다. 13일 해가 뜨기 전 의자왕은 태자 효(孝)와 함께 좌우 측근을 거느리고 북방 웅진성으로 도주했다. 그의 부덕과 무능이 백제 왕실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의식을 얼마나 약화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 상층부가 얼마나 분열됐는지 밝혀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의자왕의 부재 상황에서 그의 둘째 아들 태(泰)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남은 무리를 이끌고 사비성을 굳게 지키고자 했다. 그러자 태자 효의 아들 문사(文思)가 삼촌 부여융을 부추겼다. 백제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왕과 태자가 성을 빠져나갔는데 숙부(태)가 멋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은 어찌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문사와 부여융은 측근들과 함께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니 이를 본 백성이 그들을 따랐다. 아무도 태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없었고, 태는 넋을 놓고 이를 볼 수밖에 없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사라지는데, 백제 상층인사 가운데 성을 베개 삼아 사직과 운명을 함께하자는 자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태는 당과 항복 협상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사비성의 문을 열고 당나라의 깃발을 성첩(城堞)에 걸고 무조건 항복했다. 웅진성으로 도망갔던 의자왕이 5일 만인 18일에 그의 부하인 웅진방령(熊津方領) 예식(禰植)에게 사로잡혀 태자 태와 함께 사비성으로 끌려왔다. 당나라 수군이 금강에 상륙한 7월 9일부터 겨우 10일 만이었다. 


당의 백제 침략과 토번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에서 660년 8월 토번의 섭정 가르동첸이 아들 기정(起政)을 보내 당의 속령인 토욕혼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던 시점에 소정방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다고 명기하고 있다. 


그는 서역과 백제 두 전쟁의 관련성을 암시하고 있다. ‘돈황본토번역사문서’를 보면 가르동첸이 근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토욕혼에 7년(659∼666) 주둔했다고 하고 있다. 토번의 수뇌부는 당의 고구려·백제 섬멸 전쟁이 장기전이 되리란 것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2월과 다음해(661) 4월 연이어 고구려 공격을 명해 7월에는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다음해 물러갔다. 663년 당은 왜군 2만5000과 백제에서 대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해 토욕혼은 토번에 완전히 병합됐다. 당이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에 집중하는 사이 청해호∼차이담분지를 지나는 최남단 하늘의 실크로드가 토번의 손에 떨어졌다.

 

<서영교 중원대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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