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uqWL1w


고구려 발묶은 唐, 신라 품고 백제의 심장 겨누다

<90> 나당연합의 실행

2014. 01. 01   18:34 입력 | 2014. 01. 07 14:21 수정

 

660년 3월 10일 산서성 태원에서 결정된 당의 백제침공 소식은 다음달 초 신라 수뇌부에 공식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백제전에 보이는 당나라 참전 장군들의 명단은 이러하다. ‘신구도행군대총관 좌효위장군 소정방, 좌위장군 유백영, 우무위장군 풍사귀(馮士貴),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 

 

당군의 병력 규모와 함선 수효에 대해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향전(鄕傳) 자료를 인용해 “군대 12만2111명, 선박 1900척”이라고 하고 있다. 삼국통일 전쟁은 고대 한국인들에게 충격과 변화를 주었다. 대체로 간략하게 사건들을 기록한 ‘삼국사기’가 통일전쟁만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전쟁 과정을 복원할 수 있을 정도다.

 

12만여 병력·선박 1900척 이끌고 덕적도에 도착 

신라는 상주 금돌성에 병력·물자 집결 전쟁 대비


덕적도의 현재 모습. 항만이 발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660년 6월 이곳에 백제를 침략하기 위한 당나라 수군의 대함대가 집결했다. 옹진군청 제공


중간집결지 상주 금돌성


소식이 전해지자 신라는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신라 병부는 모든 병력을 백제를 용이하게 공격할 수 있는 중간 집결지인 상주 모동면 백화산에 위치한 금돌성(金突城) 부근에 집결시키기로 했다. 금돌성은 신라가 대백제전을 수행하는 기간에 신라 전쟁지도부(戰爭指導部)가 위치했던 곳이다. 왕은 이곳에서 야전군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았고 전쟁 전반을 지휘했다. 정치·외교·군사·행정 등에 대한 지침뿐만 아니라 적지에서 전투 중인 야전부대들에게 추가적인 병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명령을 내렸다. 


신라 수뇌부는 금돌성에서 전쟁지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주변에 인력을 배치하고 시설을 설치한 것은 물론 필요한 물자와 장비를 비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은 낙동강 수로와 경부선의 육로가 결절되면서도 백제의 심장부와도 멀지 않은 지점이었다. 경상도 지역에 있는 모든 물자들이 낙동강 수로를 이용, 상주 금돌성에 집중됐던 것으로 보인다. 창녕·함안·진주·성주 등 하류 쪽에서 수로를 거슬러 올라온 물자들은 선산읍 감천에 하역돼 그곳으로 운반됐고, 문경·안동·예천 등 상류에서 수로를 타고 내려온 물자들은 상주시 병성천 부근에서 하역돼 운반되었으리라. 


신라 병부는 물자와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교통로에 체증이 생기지 않도록 시간적인 배려를 했으리라. 지방 사단의 병력이 중앙보다 먼저 중간집결지로 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상주시에 위치한 상주정(上州停), 음리화정(音里火停)이 가까운 금돌성 부근으로 이동했고, 경북 청송의 이화혜정(伊火兮停)도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경산에 주둔하고 있던 하주정(下州停), 현풍의 삼량화정(參良火停), 함안의 소삼정(召參停) 등이 대구에 집결해 그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660년 5월 24일 김춘추가 왕경 경주를 출발했다. 김유신·천존·진주 등 장군들이 그를 수행했고, 대당(大幢) 서당(誓幢) 낭당(郎幢) 등 수도사단이 따랐다. 경산과 대구를 경유해 선산 부근에서 낙동강을 건너 금돌성으로 가 현장을 시찰한 후 그곳에 수도사단들을 남겨두고 보은의 삼년산성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년산성은 북쪽에서 내려올 신라사단들이 주둔할 제2의 중간 집결지였으리라. 6월 18일 신라왕과 지휘부가 시위부의 호위를 받으며 이전의 남천정에 도착했다. 이동거리가 354.8㎞로 환산되며, 기간이 22일이었으므로 당시 하루 이동 속도는 16.12㎞였다.


덕적도 회담 


한편 소정방과 신라 왕자 김인문 그리고 당나라 군대 수뇌부는 그해 5월 말 산동반도의 서쪽 북단 내주(萊州)를 출발했고, 선단이 동쪽으로 가면서 그 수가 불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1900여 척에 달하는 당 수군은 내주의 항구 규모를 생각할 때 산동반도 전역의 항구에 분산돼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군은 6월 초순에 산동반도 동쪽 끝 성산(成山;현 영성시) 부근의 앞바다에 집결해 한반도로 향했다. ‘삼국사기’는 소정방 선단의 규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해 많은 배가 천리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소정방 대함대가 서해안 서산 북쪽의 섬 덕적도(德積島)에 도착했다. 원래의 우리말 지명은 ‘큰물섬’이다. 해안선 길이 37㎞,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길게 놓여 있는 국수봉(314m)이 가장 높고, 이를 중심으로 남쪽 사면과 북쪽 사면은 완사면을 이루고 있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여러 곳에 소·만입·곶(串)이 발달했다. 무엇보다 산의 계곡에서 해변을 향해 담수가 흐르고 있다. 물이 높은 데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평평한 시냇물이 에두르는 곳이다. 그 섬은 많은 배를 정박할 수 있고, 주둔군이 먹을 수 있는 식수가 풍부한 곳이었다. 


김춘추가 남천정에 도착한 직후 김인문과 함께 소정방 함대에 승선했던 대감 문천(文泉)이 직접 와서 당군의 소식을 전했다. 덕적도에서 출발한 그는 흑금도-창서-제부도-당항성-남양-수원-용인을 거쳐 이천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를 멸망시킬 당의 대군이 한반도에 출현한 것이 확실해졌다. 김춘추의 얼굴에 만연의 미소가 흘렀으리라.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법민이 (소정방에게) 말하였다. 대왕(김춘추)은 지금 대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수시고 오실 것입니다. (중략) 법민이 돌아가 정방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대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김춘추는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에게 명해 100척의 배를 거느리고 가서 소정방과 그 군대를 맞게 했다. 한강을 출발한 일행의 배에는 수계 중상류에서 수취한 막대한 물자와 인력이 실려 있었으리라. 덕적도에 주둔한 10만 이상의 당나라 군대를 먹이는 것 또한 엄청난 작전이었다. 


6월 21일 일행을 태운 신라 함대가 덕적도에 도착했다. 소정방과 휘하 장군들과 신라군 수뇌부가 모인 작전회의가 열렸다. 신라 수뇌부의 작전을 담당한 실무장교의 상륙예상 후보지역에 대한 상황 설명이 있었고, 이어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으로 보인다. 소정방 측은 북쪽 고구려 국경에 배치된 신라군의 상당부분을 대 백제전선에 투입할 것을 강권했을 수도 있다. 신라가 당면한 작전에 병력을 많이 투입할수록 당군의 출혈이 줄어든다. 

 

당 고구려 요동에 묶어놓다 


회의 결과 나당 연합군의 최종 집결지는 백제 수도 사비성 앞으로 결정됐다. 신라군 주력은 지금의 논산을 지나 황산벌을 넘어 사비성 쪽으로 쳐들어가고 당군은 금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사비성으로 향하기로 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이렇게 전한다. “나(소정방)는 바닷길로 태자(문무왕)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 백제 수도 사비성에서 만나자.” 6월 말 회의에 직접 참석한 태자 김법민이 남천정으로 가 결과를 김춘추에게 보고했다. 신라왕은 고구려를 방비했던 남천정 등 한수 유역의 병력을 이끌고 중간 집결지인 금돌성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D-day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음이 급했다. 


산술 상 신라가 백제와의 결전에 5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북쪽의 병력을 남쪽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당 조정이 그해 5월 23일 시라무렌 지역에 대한 작전 개시 때문이다. 고구려에 협조적인 거란과 해족을 제압하는 군사행동이었다. 당은 돌궐계 아사덕추빈(阿史德樞賓)과 연타제진(延拖梯眞) 등의 부락병을 이끌고 해(奚)족을 토벌해 항복을 받아냈고, 이어 아사덕추빈을 시켜 거란을 공격, 송막도독인 야율아복고를 잡아 낙양으로 호송케 했다. 긴장한 고구려는 병력을 요동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동서에서 협격하는 작전이 시작된 660년 7월 그 중요한 시기에 고구려 군대가 신라 북쪽 국경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