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uTe2kh


백제 부흥군 지휘부 분열로 唐軍 기사회생 기회

<98> 웅진도독부 살아남다

2014.03.12 16:25 입력


당나라 군대를 지휘한 웅진도독부가 위치했던 공주 공산성의 모습. 당나라 군대 1만이 주둔해 있던 곳이다. 660년 말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심해지자 당군은 사비를 버리고 이곳 공주 공산성으로 도독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백제 웅진도독부에 당 고종의 칙서가 도착했다. 그 시기는 662년 1월쯤이었다. 칙서의 내용은 ‘자치통감’ 662년 7월 조에 다른 내용과 함께 일괄적으로 실려 있다. 많은 어려움에도 당나라 유인원과 유인궤가 웅진부성을 지켜내고 보급선을 회복하는 과정이 수록된 이 기록을 시간대에 맞춰 다른 기록들과 함께 재구성해 보자.

 

당 고종의 철수명령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웅진성에 주둔했는데 황상이 그들에게 평양의 군사들이 철수하면 한 개의 성만으로 홀로 굳게 할 수 없으니 의당 발을 빼서 신라로 가야 할 것이오. 김법민(문무왕)이 경에게 남아서 진수하기를 빌거든 그곳(신라)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고, 만약 그들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즉시 의당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돌아와야 할 것이오.” 


당 고종의 칙서는 평양 철수가 백제의 전황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황제는 백제에서 당군의 철수를 명한 셈이다. 


당시 당 고종을 압박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철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반란의 불씨와 여진이 있었고, 완전히 진화되는 데는 12개월의 시간을 더 필요로 했다. 무엇보다 토번제국이 중국 칭하이 성 방향으로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다. 660년 토번의 섭정 가르동?이 토번과 당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인 토욕혼에 대한 침공을 본격화했고, 662년 이미 많은 영토를 차지했다. 당나라가 한반도에 전력을 지속적으로 투입한다면 토욕혼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662년 2월 직후 웅진부성을 지키고 있던 유인궤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갈망하는 병사들에게 일장연설을 했다. “주상께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먼저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고 군사를 (이곳 백제에) 머물게 해 지켜서 그들의 심복을 제압해야 하는데, 비록 남아 있는 오랑캐가 가득하여 지키는 방비도 엄하니 의당 무기를 벼리고 말에게 먹이를 주어 그들이 뜻하지 않은 곳을 치면 이치로 보아 못 이길 것이 없다. 지금 평양에 있는 병사들은 이미 돌아갔는데 웅진에서도 발을 빼면 백제의 타다 남은 것들은 해가 다하기 전에 다시 일어나니 고구려는 언제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또한 지금 한 개의 성을 가지고 적들의 중앙에 있는데 만약에 발을 움직이기만 하면 바로 잡혀서 포로가 될 것이다.”


진퇴양난의 유인궤 

 

백제에서 당군이 철수한다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당제국의 애초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유인궤는 안전하게 철수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성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바로 포로가 될 터였다. 백제 부흥운동을 지휘하던 장수 중 한 명인 복신은 고립된 웅진부성의 유인궤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유인궤) 대사께서는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시는지요? 마땅히 재상을 파견하여 전송하겠소.” 그러한 가운데 662년 5월 170척의 배에 병력을 가득 실은 왜국(일본) 선단이 백제에 도착했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복신(福信)에게 금책(金策)을 주고 그 등을 두드리고 작록(爵祿)을 내려 주었다. 이때 풍장 등은 복신과 함께 머리를 조아리고 칙명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왜의 원군이 이어지면서 웅진도독부는 더욱 몰렸다. 


하지만 위기 돌파의 실마리는 백제저항군 내부의 문제에서 나왔다. 661년 9월 왕자 풍장이 백제에 도착한 직후에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그 휘하의 병력까지 장악했다. 풍장은 백제왕실 제사만 담당하는 힘없는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왜국의 천지천왕이 복신에게 작록을 내려준 것도 이러한 정황을 파악하고 힘을 실어준 것이 된다. 그것은 풍장과 복신을 더욱 벌어지게 만들었다. ‘구당서’ 백제전은 이렇게 전한다.


“이 시기(662년 7월) 복신이 이미 그 병권(兵權)을 전횡하니 풍장과 점점 서로 시기해 두 마음을 품게 됐다.” 백제 저항군 수뇌부의 분열상은 웅진부성의 유인궤도 알고 있었다. “복신은 흉패하고 잔학하여, 군신이 서로 시기하고 사이가 벌어져 서로를 도륙하고 있다. 바로 의당 (웅진성을) 굳게 지키면서 변화를 살펴보다가 기회를 잡아 이를 취하려면 움직일 수 없다.”


위기 돌파

 

당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인들이 분열된 상황에서 기회가 올 것이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웅진성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부흥운동 지휘부인 풍장과 복신 휘하의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내분이 백제인들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던 것은 확실하다. 


662년 7월 유인궤가 병력을 움직였다. “인원·인궤가 (백제인들이) 무방비한 것을 알고, 갑자기 성문을 열고 나가 이를 습격하였다. 백제부흥군이 차지하고 있는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그리고 대산(大山)·사정(沙井) 등의 책(柵)을 함락시키고, 많이 죽이고 사로잡았다. 병사들을 나눠 (새로 점령한 성과 책을) 지키게 했다.”


기존 연구 성과에 따르면 윤성과 대산책은 웅진도독부 주변의 중요거점이었고, 지라성과 사정책 등은 신라에서 웅진도독부로 들어오기 위해 거쳐야 하는 대전지역의 요새였다. 웅진부성을 둘러싸고 있는 백제인들의 경계가 소홀해지자 유인궤 등은 성문을 열고 나가 이를 점령했고, 나아가 지라성과 사정책을 확보했다. 이어 신라와 웅진의 당군 사이 식량운송로를 막고 있던 마지막 장애물 진현성(眞峴城: 대전 서구 흑석산성)을 신라군이 함락시켰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험한 요새여서 군사를 거듭 보내 그곳을 지키게 했다. 인궤는 조금 풀어진 틈을 엿보다가 신라의 군사를 끌어들여 밤에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고 풀을 밟고 올라가서 밝을 때쯤에는 그 성으로 들어가 점거하게 해 드디어 신라의 양식 운반로를 열었다.”


유인궤의 원군 요청과 당 조정의 고민

 

고사 직전의 웅진부성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그러자 유인원은 백제에서의 발판을 지켜내기 위해 당에 증원군을 요청했다. “유인원은 마침내 주문을 올려서 군사를 더 증파해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치주(산동 치박)·청주(산동)·내주(산동)·해주(강소 연운항)의 군사 7000명을 발동하여 (백제) 웅진에 가게 했다.”


하지만, 당 조정의 백제 증파는 이로부터 10개월 후인 663년 5월에 가서야 실행됐다. 뭔가 망설임이 있었다. 당 제국의 최대 고민은 토번이었다. ‘자치통감’ 662년 12월 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소해정이 귀환하면서 소륵(疏勒:카쉬가르) 남쪽에 이르렀는데, (서돌궐) 궁월(弓月)이 토번 군대를 끌어들여 싸우려 하자 소해정은 토번에게 군수품을 뇌물로 주고 겨우 돌아왔다. 서돌궐에 군주가 없어지자 아사나도지(阿史那都支)와 이차복(李遮匐)이 무리를 거두어 토번에게 붙었다.”


당시 토번의 세력이 가히 서역을 넘어 서돌궐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자치통감’ 663년 5월 조를 보면 “토번이 군대를 내어 토욕혼을 공격해 대파하였다. 토욕혼 왕(可汗) 갈발(曷鉢)과 홍화공주가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 양주(?州)에 의탁하면서 (당나라) 내지로 이주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토번은 토욕혼 땅과 사람을 모두 차지했다. 토욕혼은 건국 350년 만에 망했고, 이제 토번의 북쪽 변경이 당의 영토, 하서·농우(河西 ?右)와 마주하게 됐다. 당이 요동과 한반도에 병력을 집중하던 사이에 토욕혼이 토번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에게 전쟁은 소모가 아니라 생산이었다. 토번은 토욕혼의 광대한 초원과 전마 그리고 기병 자원을 손에 넣게 됐다. 토번 기병 전력의 근간은 이때 만들어졌고, 향후 전쟁에서 더 큰 생산을 위한 도구를 손에 넣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측천무후와 그녀의 산동파벌은 병력과 함대를 한반도에 증파하는 결정을 내렸다. 한반도에서 시작한 소모적인 전쟁은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토욕혼을 상실한 이상 서역 문제 때문에 한반도에서 손을 떼면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663년 6월 백제 부흥을 돕기 위해 왜군 2만7000명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백강(白江)의 대회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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