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 관창’의 위국충절 신라군 사기 최고조
<92>황산벌의 하루
2014. 01. 22 17:04 입력
660년 음력 7월 9일, 계룡시에서 논산 황산벌로 들어가는 계곡의 길목. 백제군의 진지에서 바라다보이는 향적산 봉수대에서 연기가 올랐다. 신라군이 근처에 온 것을 안 병사들의 손발이 더욱 빨라졌으리라. 신라군의 실제 병력은 10배가 되지만, 긴 골목 같은 지형 때문에 백제군을 상대할 수 있는 신라군은 거의 동등한 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진골귀족 자식들 최선봉 세워 적진 투입
사회지도층 희생정신으로 병사들 사기 불러 일으켜
병목지형 길목에서 바라본 논산 연산면 화악리 전경. 반굴과 관창이 백제 진지를 향해 돌격하던 모습이 상상된다. 계룡산의 주봉도 보인다.
수적으로 열세인 백제군은 야전에서 대열을 지어 보병 전투를 벌이는 것을 피하려 했으리라. 병력이 우세한 신라군이 교대로 병력을 투입하면 백제군의 체력이 금세 바닥날 터였다.
길목에 집중된 화망
멀리 신라군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들은 길목에 배치된 백제군 진지 앞에까지 다가와 멈춰 섰다. 한시라도 빨리 계곡의 길목을 통과해 당나라군과 연결돼야 하는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작전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병력의 재배치가 이뤄졌고 그 주력이 앞으로 전진했다. 심장의 고동을 자극하는 북소리가 빨라지면서 그들의 보폭도 늘어나고 빨라졌다. 그들이 장애물 지대에 도달했을 때 백제군이 일제 사격을 했다. 화살의 검은 구름은 반복적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신라군 머리 위로 떨어졌다. 신라군 대열이 주춤할 정도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신라군들이 쓰러졌고 대열에 군데군데 구멍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김유신은 마음이 착잡했으리라. 더 이상 전투를 했다가는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날 것이다. 징을 쳐서 중군의 후퇴를 명한다. 혼란에 빠진 신라군들은 개별적으로 무질서하게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전투는 다시 시작됐다. 습기가 가득한 무더운 공기 속에서 비명과 함성이 울려 퍼졌고, 대지는 피 냄새로 진동했다.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제군은 화망을 그 좁은 길목에 집중시켰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신라군은 백제군의 진지 3곳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가해 그 화망을 분산시키려 했던 것 같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유신 등은 군사를 3개로 나눠 4번을 싸웠다.” 이후 이어진 3번의 공격에도 백제군은 요동이 없었고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신라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신라군의 깃발은 정연하지 않고 대열에도 질서가 없었으며, 북소리에도 기(氣)가 서리지 못했다. 신라 병사들은 겁을 먹고 있었지만, 군 내부에 있던 당나라 군사고문단들이 신라군 수뇌부를 다그쳤으리라. 7월 10일까지 부여 부근에 도착해야 하니 빨리 그곳을 돌파하라고. 당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부여에 남긴 기념비인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를 보면 당나라 장수로서 우이도행군총관 신라왕 김춘추 휘하에 부총관으로 조계숙(曹繼叔)과 행군장사(行軍長史) 두상(杜爽)이 보인다. 당고종은 당의 장수를 신라군에 파견해 함께 작전에 임하도록 했던 것 같다. 역으로 신라군 장수도 당군에 보내 함께 작전에 참여하도록 했다. 위의 비문에 보이는 우무위중랑장 김양도(良圖)의 예가 그러하다.
장군, 자식을 제물로
채근을 당하는 김유신도 마음이 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당연합이 실행되는 백제와의 초전에서 이렇게 밀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터였다. 뭔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러자 김유신의 동생 흠춘이 자신의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삼국사기 김영륜전은 이렇게 전한다. “신하로서는 충성이 제일 중요하고 자식으로서는 효가 제일 중요하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다 이뤄진다.” 반굴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묻지도 않고 곧장 적진으로 돌격했다. 모든 신라군이 넋 놓고 지켜보는 가운데 홀로 말을 타고 질주해 오는 신라의 젊은이를 본 백제군은 의아해했다.
처음에는 적의 전령인가 했으리라. 하지만, 자세히 보니 창을 휘두르며 곧장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는 백제군의 손에 걸려 무의미하게 희생당했다. 자신의 자식을 적진에 내몰아 죽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그것도 한마디 질문도 하지 않고 사지로 뛰어드는 장군의 아들은 무엇인가. 순식간에 끝난 일이지만 백제군도 뭔가 시원치 않음을 느꼈으리라.
가야계인 김유신의 조카가 희생됐다. 죽음을 본 신라 병사들도 숙연해졌다. 그러자 전통 진골귀족 신라 장군들 가운데서도 희생자를 내기로 했다. 그는 품일의 아들로 화랑 관창이었다. 소년은 잘생기고 우아하며 귀티가 흐르는 자였다. 품일은 아들을 불러 말했다. ‘삼국사기’ 관창전은 이렇게 전한다.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功名)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쏜가?”
화랑도의 무사도
관창은 ‘예’하고는 바로 말 위에 올라 창을 들고 백제군의 진지를 향해 진격했다. 그를 막아서던 백제 병사 몇 명이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 하지만 그는 달려드는 병사들의 갈고리에 걸려 곧 말에서 끌어내려 졌고 몸부림치다 결국 사로잡혔다. 관창은 포박된 채 계백장군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이 관창의 얼굴을 가린 철갑투구를 벗기게 했다.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이라 놀랐다. 신라 장군들이 자신의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계백은 명령을 내렸다. “이 소년을 돌려보내라.” 관창은 돌아갔다.
관창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적의 깃발을 꺾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그의 마음속에 과연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관창은 다시 출격하겠다고 했고, 아버지 품일은 관창을 만류하지 않았다. 관창은 물을 마신 다음 적진으로 갔다. 신라군들은 관창이 다시 단기 필마로 백제군의 중앙을 향해 달리는 모습을 보고 경악해 하면서도 그 용기에 고무돼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관창은 이번에도 사로잡혔다. 계백은 생각했다. “나는 이 소년을 살려주고 싶다. 하지만, 또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이 소년을 참수할 수밖에 없다.” 포박된 소년은 끌려갔다. 칼이 번쩍였고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계백은 그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게 했다. 병사가 말의 엉덩이를 쳤다. 말이 신라군 진영에 도착하자 관창의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관창의 아버지는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감싸며 말했다. “우리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대왕을 위하여 죽었으니 다행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더욱더 연민을 느끼게 했다.
분개한 병사들
신라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모두 죽을 마음을 먹었다. 병사들은 장군이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이게 됐다. 신라군의 진격의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제군들은 뭔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눌렸다. 군영을 출발한 신라군들은 벌떼같이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들었다.
그것은 기세였다. 신라군은 목책에 다가오다가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신라군의 물결에 백제군의 화살도 바닥이 났다. 드디어 목책이 무너지고 그 문이 열렸다. 백제군은 일제히 신라군과 맞섰다. 계백장군 이하 전군의 대부분이 체력이 다할 때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좌평 충상과 상영 등 지휘관 20여 명이 살아남아 신라군의 포로가 됐다.
황산벌 전투는 삼국시대에 대를 물려가며 전쟁을 치러야 했던 장군들의 긴 세월 가운데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지도층의 희생정신과 상관을 추종하며 따르는 병사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이 사람(ein dieser)’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형이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무관들이 가졌던 국가 생존에 대한 의지가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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