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daum.net/munhwajaecheong/17919183 (원글 사라짐)


논어책이 나온 인천 계양산성

문화재청  2012.10.05 13:11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에는 소박하지만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가 담긴 산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계양산입니다. 한강 하류에 있는 계양산에 계양산성은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중요한 군사거점이었습니다.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은 대외적 활동과 서해와 서울의 연결교통 요충지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국과의 교역 관문이었던 계양산성에 논어책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요, 계양산성에서 우물 집수정에서 발견된 논어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었을까요?


▲ 계양산 입구에 위치한 안내도                       ▲ 계양산 등산로 길

 

먼저 계양산성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지하철 1호선 계산역에 내려 계산 고등학교를 지나가다 보면 계양산을 바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산으로 들어가기 전 안내도는 계양산의 역사와 등산로가 잘 설명되어 있었고, 해발이 높지 않은 등산로는 나무와 꽃을 감상하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으로 충분했습니다.

 

▲ 현재 남아 있는 산성의 모습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계양산은 동쪽(해발 395m)에 위치했습니다. 계양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높이는 5m 정도로 고산성이라고도 부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계양산고성(桂陽山古城):석축둘레가 1,937척인데 지금은 모두 퇴락했다(石築周一千九百三十七尺 今皆頹落)’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재 산성은 축조한 지 1,500여 년이 지난 지금 석벽이 모두 허물어지고 축성의 형태만 남아 있었습니다.


계양산성과 연결된 등산로를 올라가 보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는데요, 그곳에서 바라본 탁 트인 전망은 서울과 인천의 모습을 동시 볼 수 있어, 이곳에 산성을 쌓은 이유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계양산 육각정의 모습(사진:문화재청)             ▲계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산성 주변의 모습(사진:문화재청)

 

계양산성은 다른 성곽과는 다른 특이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산에 있는 육각정에서 성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는데요, 이는 계양산성이 퇴뫼식 산성으로 쌓은 것으로,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성곽의 축조를 마치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형태로 쌓는 것을 말합니다. 이 형태는 주로 작은 규모의 산성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솟구치는 능선을 타고 오른듯한 성곽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벽의 경우는 돌을 흙으로 덮어 만든 내탁식 축조법으로 지어졌습니다.

 

▲ 계양산성 내부에서 노출된 집수정 (사진:고고학자 조유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헬기장이 들어선 계양산 정상 주변에는 현재 계양산성 3차 발굴조사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현재 발굴조사 중이라 들어갈 수 없었는데요, 이곳에는 집수정(集水井, 저수조)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집수정은 도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바다와 강을 통해 교역을 했던 곳이었습니다. 3-4세기에 만들어진 우물에서는 전형적인 한성백제의 토기가 발굴되었습니다. 원저단경호(圓低短頸壺, 바닥이 둥글고 목이 짧은 항아리)와 『논어』목간이 출토되었는데요, 당시 이 유물로 산성이 4세기경 한성백제 때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계양산성 집수정 하부에서 확인된 논어 목간 (사진:고고학자 조유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목간은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나무 또는 대나무를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조각을 말합니다. 목간은 주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또는 이것이 널리 쓰이기 전에도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처음 목간이 출토 되었고, 이후 옛 신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주, 함안, 김해 그 밖에 부여, 익산 지역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하지만 삼국시대 고대성곽인 계양산성에서 한반도에서 출토된 목간 중 가장 오래된 서기 3-4세기 한성 도읍기(BC18-AD475) 백제 목간이 발굴된 것입니다.

 

▲『논어(論語)』,제5장 공야장(公冶長)의 내용을 적은 목간 (선문대 고고연구소 제공)

 

이 목간은 나무를 5면으로 깎아 만든 목주에다, 각각의 면에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논어』의 공야장 내용을 실었습니다. 공야장은 공자의 사위이자 제자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1면에는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者斯焉取斯)’, 즉 공자가 자천(子賤)에 대해 말한 내용으로 “그 같은 사람은 참으로 군자다. 만일 노나라에 군자가 없으면 어떻게 그런 학덕을 터득했겠는가?”하고 묻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2면에는 ‘(子使漆雕開仕對日)吾斯之未能信子說’, 즉 공자가 칠조개(제자)에게 벼슬을 주고자 하자 칠조개가 “저는 아직 벼슬을 감당할 만한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3면에는 ‘(孟武伯問~求也~)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 즉 “맹무백(노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구(求·공자의 제자인 염유)에 대해 묻자 ‘그가 인자한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고, 맹무백은 ‘그렇다면 적(赤·공자의 문하생)은 어떠냐’고 물었다”라고 묻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이 밖에도 4면고 5면에 공야장의 문구가 남아 있었습니다.

 

▲ 계양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                           ▲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흔적들


계양산성은 현재 3차 발굴조사를 마친 후 분묘이장 및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은 한성백제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목간에 적힌 『논어』의 내용은 유교 수용과 한자의 도입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었습니다. 백제인들은 기록된 내용을 책으로 휴대하면서 이용했을 것 같은데요, 좋은 말씀을 항상 간직하며, 인생의 가르침을 얻고자 했던 목간을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실생활의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계양산성! 집수정에서 발견된 목간은 공자의 말씀을 마음속으로 새겨두며, 그 가르침 안에서 우리 선조는 더 큰 꿈과 포부를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계양산성에서 우리의 역사를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자료>

 

「고고학자 조유전과 이기환의 한국사 기행」, 조유전, 이기환 지음, 책문, 2010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