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30&fileName=kn_074_0030.pdf
* 古代國家의 成長과 交通路 - 이도학" 중 "Ⅵ. 신라의 성장과 교통로"을 가져왔습니다.
신라의 성장과 교통로
경주분지에서 국가를 형성한 신라는 진한연맹내의 제국(諸國)들과 교류를 가졌고, 급기야 정복해 나갔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교통로를 설정하는 게 가능하다. 신라는 일찍부터 단층구조선이 발달한 형산강 지구대를 따라 영일만으로 나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갔다. “동옥저에서 사신이 와서 양마(良馬) 20필을 바쳤다”135)는 기사와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 소재한 화려현(華麗縣)과 안변에 소재한 불내현(不耐縣)136) 주민의 신라 북경(北境) 침공137) 기사를 놓고 보더라도 신라는 동해안로를 따라 지금의 함경남도 해안 지역과 교류를 가졌음을 알게 된다. 신라는 강릉선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인(印)을 얻어 왕(王)에게 바쳤다”138)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과 신라 수도인 경주를 잇는 동해안로의 개척과, 동해안로를 통한 교역으로써 물산의 경주 집중을 시사하고 있다. 신라는 동해안로를 통하여 소금과 해산물을 확보하는 동시에, 강릉 이북에 소재한 말갈로 등장하는 동예(東濊)139)와도 교역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정복활동은 이후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소재한 감문국이니 사벌국․소문국과 같은 진한제국 전역(全域)에 미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신라는 소백산맥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의 장악에 나서게 되었을 것인데, 예전부터 물류(物流)의 이동이 있어서 개척이 용이할 뿐 아니라 힘을 적게 들이고 넘을 수 있는 고개를 찾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계립령로와 죽령로가 개통되고 있다.
계립령로(雞立嶺路)를 개통시켰다.140)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141)
여기서 계립령로는 '삼국사기'에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142),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143)라고 하여 보이는데, 현재의 충주시 상모면에서 미륵대원을 지나면 하늘재라는 고개가 나타난다. 이 고개가 계립령으로서 충주에서 수안보를 지나 문경새재의 동편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이다. 죽령은 경상북도 풍기 북쪽에 소재한 고개가 되겠다.
신라가 '삼국사기' 기록처럼 2세기 중엽에 이들 고개를 개통시켰는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러한 교통로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은 제기되는데, 고조선 유민의 소백산맥 이남으로의 이주(移住)는 문헌이나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어 진다고 할 때144) 그 통로는 계립령로와 죽령로였음은 거의 분명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할 때 신라의 이들 교통로에 대한 개통 기사는 진한연맹의 맹주로서 영로개척(嶺路開拓)에 힘을 기울였음을 뜻한다. 또 이들 고개를 장악하여 일종의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는 동시에 물류(物流)의 이동을 통제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 준다.
신라는 종전까지 낙동강 하구에 소재한 김해의 금관가야가 장악하다시피 하였던 소백산맥 중심부를 관통하는 낙동강 水路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럼에 따라 소백산맥을 넘어오는 물류는 낙동강 수로를 통해 신속하게 경남 해변 지역까지 미치는 게 가능하였다. 더욱이 5세기대부터 고구려 군대가 신라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도로망이 정비․확충되어 나갔다. 특히 40년에 5만에 달하는 고구려군 보병과 기병의 대규모 이동은, 마차와 같은 수레의 운송을 가능하게 하도록 그것을 촉진시켰다고 보겠다.
이러한 선상에서 신라는 487년에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소사(所司)에게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145)라고 하였듯이, 전국적인 도로망의 확보와 그에 짝하여 국가의 법령과 그에 부수된 인적요원이 일사불란하면서 신속하게 지방에 하달․파견될 수 있게끔 하였다. 역(逆)으로 정비된 관도(官道)를 통하여 지방으로부터의 공물이 속속 올라오는 동시에 인적자원의 신속한 진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신라는 관도를 따라 지방통치의 거점인 산성을 축조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지방 말단의 촌락 가운데 산성(山城)이 축조되어 나갔다. 산성의 축조는 교통로의 개척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대규모 노동력의 동원과 석재(石材)와 건축기자재(建築機資材)의 운송에 필요한 우마(牛馬)와 수레의 통행이 가능한 촌락(村落)에는 현성(縣城)이 축조되어, 그 주변의 촌락을 지배하게 하였던 것이다.
5세기대 이후 신라는 계립령로 방비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지금의 문경에서 계립령로에 이르는 곳곳에 자연지세의 험고(險固)함을 이용하여 포장(布陣)한 성곽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문경시내에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소재한 마고성(麻姑城) 부근을 지나 상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문경 시내 남쪽 9Km에 소재한 수애석로(水崖石路)인 관갑천(串岬遷)을 지나야만 한다. 문경지역 3대 험조처(險阻處)의 하나인 관갑천은 묶어놓은 듯한 양 산협(兩 山峽)의 가운데를 관류하는 하천인데, 이 하천 옆 벼랑에는 3Km에 이르는 잔도(棧道)가 나 있다. 더욱이 관갑천 양안(兩岸)은 신라가 축조한 고모성(姑母城)과 고부성(姑父城)이 응대(應對)하고 있는 천험(天險)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험절(險絶)함은 “방비한 시설은 함곡관(函谷關)같이 장(壯)하고 가기 힘들기는 독도(蜀道)처럼 험(險)하다”146)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후일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이곳에서 길을 잃어 고전(苦戰)했다는 속전(俗傳)과 징비록(懲毖錄)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147) 요컨대 신라는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계립령로 주변에 성곽을 축조하였을 뿐 아니라, 소백산맥 이북과의 교섭은 물론이고, 고구려 세력의 남진을 저지해 나갔던 것이다.
신라가 소백산맥을 완점하게 되는 6세기 중반경에는 소백산맥 동서 교통로가 활성화 된다. 신라는 470년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여 금강 상류와 남한강 지류인 달천(達川) 상류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격(橋頭堡格)인 보은과148) 추풍령 방면을 통하여 백제와의 물류가 이루어지게 하였고, 합천과 함양 그리고 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서 가야 지역을 비롯하여 백제와의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와 동시에 신라는 소백산맥 북쪽을 넘어 한강 유역을 점유하게 되는데, 지금의 서울 일원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에 따라 신정복지와 수도인 경주간에는 물류의 증대가 이루어져 남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대규모 수로(水路)가 운송로(運送路)로서 활기를 띠게 되었던 관계로, 적성로(赤城路)의 개척을 통해 소백산맥 남북 교통로의 물류 증대를 보완하고자 했다.
적성로는 지금의 예천군 용문면과 문경시 산북면에서 시작하여 문경시 동로면 간송리에서 합쳐져 북쪽으로 이어지다가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赤城里)에서 분기(分岐)되어 서쪽으로는 계립령로에 이르는 교통로이다. 이 도로는 북쪽으로는 단양 적성(赤城)에 이르게 되는데, 적성리의 ‘벌재’라는 고개만 넘으면 거의 평지에 가까운 도로가 단양까지 계속된다. 이 적성로는 당초 예천 지역 수장의 관할이었으나 6세기 중반 신라 군대가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 적성으로 진출할 때 이용한 도로로 추정될 정도로 전략적 비중이 만만치 않았고, 실제 그 노변(路邊)에는 성곽들이 곳곳에 축조되어 있다.149) 그 밖에 소백산맥 남북을 잇는 교통로(交通路)로서 저수령(低首嶺)․도령(島嶺)․이화령(伊火嶺)을 넘는 소로(小路)들이 개척된 것으로 보인다.150) 신라의 교통로 확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둔시킨 6정(停)이라는 군단(軍團)의 성격이다. 停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진대(秦代)에 교통역전(交通驛傳)에 설치되었던 정(亭)151)을 연상시키는데, 신라의 6정(停) 또한 수도인 경주와 지방으로 진출하는 중간교통 거점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느낌을 준다. 이는 6정(停)의 주둔지를 통해서 유추되는 것인데, 그 면면은 상주정(上州停,상주․김천․선산)․귀당(貴幢)․신주정(新州停,하남시)․비열홀정(比列忽停,안변)․실직정(悉直停,삼척)․하주정(下州停,창녕․합천․경산)이 된다.152) 이들 정(停)은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축으로 하여 전국으로 뻗어나간 간선도로상(幹線道路上)에 위치하고 있다. 즉, 상주정은 경주→김천→선산→상주에서 청주 방면으로, 신주정은 경주→영천→의성→영주→죽령→충주→하남→개성 방면으로, 비례홀정은 경주→삼척→강릉→고성→안변→함흥 방면으로, 실직정은 비례홀정과 마찬가지로 동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하주정은 경주→양산→창녕→합천→남원 방면으로 뻗어가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선상에서 통일신라는 경주를 축으로 한 북해통(北海通)․염지통(鹽池通)․동해통(東海通)․해남통(海南通)․북악통(北傜通)과 같은 5개의 간선도로가 확립되었는데, 5통(通)은 5가로(街道)의 의미로서 수도에서 각 지역으로 그것도 9주(州)의 주치(州治)와 5소경(小京)으로 통하는 중요한 군사(軍事)․행정도로(行政道路)로 정비되었다.153)
주석
132) 李道學, 漢城後期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整備 ('百濟論叢' 2, 1990) p.308.
133) 李道學, 백제 고대국가 연구, pp.142~143.
134)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咸陽郡 形勝 條에 의하면, 팔량현 위에는 신라때의 陣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였을 때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백제는 중요한 교통로상에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하였음을
135) 三國史記 권1, 赫居世居西干 53年條.
136) 李丙燾, 韓國史 古代篇(1959) p.161.
137) 三國史記 권1, 儒理尼師今 17年條.
138) 三國史記 권1, 南解次次雄 16年條.
139) 三國史記 권5, 太宗武烈王 5年條.
140)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3年條.
141) 三國史記 권2, 阿達羅尼師今 5年條.
142) 三國史記 권45, 溫達傳.
143) 三國史記 권41, 金庾信傳.
144) 三國史記 권1, 赫居世居西干 卽位年條.
경주 조양동 토광묘와 그 유구에서 출토된 前漢鏡 등이 대동강 유역과의 연관성을 방증해주고 있다.
145) 三國史記 권3, 照知麻立干 9年條.
14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聞慶縣 形勝 條.
147) 李道學, 高句麗의 洛東江流域 進出과 新羅․伽倻經營 , pp.98~9.
148) 崔永俊, 南漢江水運硏究 (地理學 35, 1987), p.82.
149) 李道學, 新羅의 北進經略에 관한 新考察 , pp.30~32.
‘벌재’ 곧 ‘赤城’이라는 지명은, 고구려가 丹陽을 지배하던 때의 행정지명인 ‘赤山’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겠다. 그러므로 ‘赤山’과 관련한 類似地名들이 그 인근에 散在하게 되었는데, 단양으로의 진입로인 벌재[赤城] 또한 赤城境域內로의 進入路임을 뜻하는 지명이라고 하겠다.
150) 이에 관한 상세한 조사는 朴相佾, 小白山脈地域의 交通路와 遺蹟 (國史館論叢 16, 190), pp.151~207을 참고하기 바란다.
151) 王綿厚․李健才, '東北古代交通'(1990), p.19.
152) 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1954) pp.323~347.
153) 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1974) p.40. 그런데 氏의 개별적인 교통로 지목에는 誤謬가 적지 않다고 본다. 가령 氏가 北海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安邊으로 이어지는 海岸路는 東海通이 타당하다. 氏는 경주에서 충주를 지나 황주로 이어지는 통로를 鹽池通으로 지목하였지만 北傜通이 타당하다. 또 北傜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남양에 이르는 통로는 北海通으로, 海南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남원과 나주로 이어지는 통로는 鹽池通이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氏가 東海通으로 지목했던 경주에서 晋州로 이어지는 통로는 海南通이 온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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