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30044


'뛰는' 비담 위에 '나는' 김유신, 이유 있었네

[사극으로 역사읽기] 특집 '한국 고대사의 속속들이', 열세 번째 이야기

11.03.01 10:51 l 최종 업데이트 11.03.01 16:24 l 김종성(qqqkim2000)


▲  신라군의 전투 장면. 출처: <한국생활사박물관> 5권. ⓒ 사계절


신라는 동시대에 활약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가장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신라가 불리했던 것은 꼭 영토가 좁아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가 비단길(실크로드·오아시스길·사막길)이나 중국으로 접근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라 제7대 황제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가 비단길 개척에 나서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로마제국-중동-중앙아시아-북중국을 잇는 장대한 루트가 뚫린 이래, 세계적 혹은 지역적 차원의 패권구도는 이 길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종전에는 초원길을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비단길을 지배한 자가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비단길을 통해 인간·물자·정보를 포함해서 인류문명이 동서를 이동했기에, 이 길에서는 힘이 생겨났고 이 힘을 얻은 자가 패권을 쥘 수 있었다. 그래서 비단길을 장악하거나 혹은 그것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국가적 생존 혹은 발전을 기약할 수 있었다.


이 같은 비단길의 동쪽 끝에 중국이 있었다. 부여나 고구려 같은 나라들은 만주를 거점으로 중국과 비교적 수월하게 교류할 수 있었다. 백제나 가야는 해상에 대한 지배권을 바탕으로 중국대륙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여·고구려·백제·가야는 비단길의 혜택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나마 수월하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중국으로 가는 육로는 고구려 때문에 여의치 않았고 해로는 백제·가야·왜국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물론 그런 견제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중국의 교류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이런 경우를 가리켜 '가뭄에 콩 나듯 한다'는 속담을 사용한다. 


북한은 육로라도 있지... 육로·해로 다 막힌 '신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부와의 교류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수출 의존도가 높든 내수 의존도가 높든 마찬가지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마찬가지다. 육로와 해로가 꽁꽁 막힌 신라는 외부로부터 힘을 충전할 기회가 적었기에,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경쟁자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신라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세상을 살아나갈 길이 없었다. 


신라가 처한 처지는 오늘날 북한이 처한 처지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바닷길이 비단길을 대신해서 세계 최대의 길로 부각된 16세기 이래, 세계사에서 나타난 특징은 해양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포기하고 적어도 생존이라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든 해양으로 나가야 하는 시대가 16세기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런데 북한은 바다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혀 있다. 


북한 선박이 대양으로 빠져나가려면 한국·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 등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핵우산 하에 똘똘 뭉친 이들 지역을 뚫고 나가려면, 웬만큼 머리를 '굴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나마 중국 덕분에 육로를 이용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북한은 그나마 육로라도 이용할 수 있지만, 신라는 육로와 해로 양쪽이 모두 막혀 있었다. 북한이 처한 처지보다 신라가 처한 처지가 훨씬 더 열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신라나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에 시달리는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런 나라의 지도자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머리를 많이 '굴린다'는 점이다. 북한이 외교를 잘한다는 평판을 받는 것은 그만큼 머리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먹고 살만한 여유가 생기면 남의 눈치를 덜 보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신라나 북한 같은 나라들은 남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머리도 많이 굴리게 된다. 신라가 남다른 외교술을 계발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생존 위해 남다른 전쟁 기술을 활용하다


▲  세계사의 3대 길. 위로부터 초원길-비단길-바닷길. 출처: 고등학교 <역사부도>. ⓒ 신유


최약체 신라가 살아남기 위해 외교술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신라가 생존을 위해 남다른 전쟁기술을 활용했다는 점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삼국사기>를 읽다 보면 신라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방식이 아주 독특하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정상적인 대결을 통해 이긴 적도 있지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경우가 상당히 많다. 신라군이 유별나게 많이 사용한 전술은 바로 심리전이다. 그 점을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신라 제2대 남해왕 11년(서기 14)의 일이었다. 왜국이 전함 100척을 동원해서 신라 해안을 침공했다. 상황이 어찌나 급박했던지 신라는 수도 서라벌의 정예병을 급파해서 진압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라군의 관심이 해안으로 쏠린 틈을 타서,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이번에는 북쪽의 낙랑이 서라벌을 침공했다. 정예병이 서라벌을 비웠으니 수도를 빼앗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이때 희한한 일이 발생했다. 한밤중에 유성이 하늘에서 낙랑군 진영으로 툭 떨어진 것이다. 그러자 낙랑군 진영에서 일대 소동이 발생했다. 유성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인 병사들 사이에서 심리적 동요가 발생한 것이다.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낙랑군 지도부는 신속히 철군을 단행했다. 


유성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서, 위기에 처한 신라군을 살리곤 했다. 태종무열왕 재위 8년 5월 9일(651.6.2)에 개시된 고구려·말갈 연합 대 신라군의 북한산성 전투에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했다. 


고구려·말갈 연합군이 포거(포차) 즉 투석용 수레를 동원하여 돌을 쏘아대는 통에 북한산성 안의 신라 진영에서는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부서지는 일이 속출한 것이다. 성 안에는 군인과 여자와 노약자를 합해서 2800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신라 진영으로서는 강력한 대응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상태에서 군량미도 거의 떨어지고 사람들도 모두 지쳤다. 이제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수박에 없게 되었다. 


성 밖에서 돌이 날아오는 생지옥이 10여 일가량 계속된 5월 20일(6.13)이었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신라인들에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신라 장군 동타천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던 중에, 느닷없이 하늘에서 큰 별이 연합군 진영에 떨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연합군 진영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병사들이 공포심에 휩싸여 동요하는 통에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연합군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가짜 유성 적진에 떨어뜨려 불안감 조성한 신라군


▲  북한산성. 백제 초기에 세워진 산성으로 훗날 신라가 차지했다. 조선시대 때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되었다. ⓒ 문화재지리정보서비스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신라군을 도와준 유성. 이 유성은 신라군이 단독 혹은 공동으로 수행한 전투에서 자주 출현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도 고구려 진영에 유성이 떨어져서 전세에 영향을 준 일이 있다. 


유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읽어 보면, 이 유성의 정체가 실은 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 열전'에는 불씨를 내장한 허수아비를 연에 띄워 적진에 떨어뜨리는 신라군의 노하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신라군은 가짜 유성을 적진에 떨어뜨려 불안감을 조성하는 한편 "적진에 유성이 떨어졌다"는 선전전을 전개해서 아군의 사기를 높이곤 했던 것이다. 객관적 전력의 열세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신라의 몸부림이 심리전 R&D(연구개발)로 이어지고 이것이 실질적인 성과를 낳았던 것이다.  


▲  드라마 <선덕여왕>의 비담(김남길 분). ⓒ MBC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심리전을 활용해서 천하를 얻어 보려다가 낭패를 본 신라인이 있었다는 점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주목을 끈 비담이 그 주인공이다. 


선덕여왕 치하에서 상대등(국무총리)에 오른 비담은 여왕의 리더십이 공격을 받고 정권의 레임덕이 생기자, 주군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서 10일 가까이 지루한 대치국면이 계속되던 중에, 정부군 진영에 갑자기 큰 별이 떨어졌다. 비담은 이를 "여왕이 패배할 징조"라고 선전했고, 이 작전이 주효해서 신라군은 물론 선덕여왕까지도 벌벌 떨게 되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다. 비담이 '뛰는 놈'이면 김유신은 '나는 놈'이었다. 겁에 질린 여왕을 방문한 김유신은 "길흉화복은 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라며 "근심하지 마시라"고 왕을 위로했다. 그러고 나서 김유신은 연을 만들어 하늘에 띄웠다. 그런 뒤에 소문을 퍼뜨렸다.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도로 올라갔다"고. 정부군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고 결국 비담의 쿠데타는 종결되었다.  


신라군은 가짜 유성을 이용한 심리전에 익숙한 군대였다. 그런 신라 정부군을 상대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해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비담이 이 분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비담을 상대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해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김유신이 당시로서는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신라인들 사이에서 심리전의 노하우가 상당히 많이 축적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드라마 <선덕여왕>의 김유신(엄태웅 분). ⓒ MBC 


세계 문명교류의 루트인 비단길, 그 비단길의 동쪽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 비단길과 중국으로 가는 길이 고구려·백제·가야·왜국 때문에 막혀 있었던 신라. 그래서 신라는 상대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신라는 경제적·군사적·문화적 측면에서 후진성을 탈피하기 힘들었다. 신라는 콤플렉스가 많을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 


그러나 개인이건 국가건 간에, 콤플렉스는 절망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이 될 수도 있다. 김유신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람 하기에 달린 것"이다. 콤플렉스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을 역이용한다면, 콤플렉스는 좌절이 아닌 성공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킨 것은 가혹하게 비판하더라도, 최약체 신라가 콤플렉스를 디디고 최후의 생존자로 살아남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로 배울 것이 많다. 외교술이나 심리전 계발을 통해 열세를 극복한 신라의 사례를 보면서, 나 개인이 갖고 있는 혹은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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