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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원봉은 정말 물과 기름같은 사이였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임정로드'를 떠나다] 열두 번째 이야기, 난징을 떠나면서
글 조종안(chongani )편집 최은경(nuri78) 등록 2019.10.13 14:54 수정 2019.10.13 14:54
▲ 1937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출처: 임정 항주기념관)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넷째 날(4일)은 역사의 도시 난징(남경)에서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호텔을 출발,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난징대학, 리지샹위안소 유적진열관, 황룡산 기슭에 자리한 천녕사(天寧寺: 조선혁명간부학교 훈련지) 등을 돌아봤다.
난징 지역 유적지 답사를 모두 마치고 임시정부 전장 시기(35년 11월~37년 11월)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김구 어머니 포함) 생활상이 궁금해진 기자는 그들의 발자취를 추적하였다.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냈으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책자와 옛날 신문 등을 통해 조사하였다. 아래는 그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애국지사와 그 가족들 거주지
▲ 임시정부 진강(전장) 사무처 구지 ⓒ 조종안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5월 상해를 떠나 항주를 거쳐 1935년 11월 진강(전장)으로 옮긴다. 이때 임정 요인들은 중국 국민당정부가 있는 남경에 거주한다. 남경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인 진강에 청사를 마련한 이유는 일본 때문이었다. 일제는 중국 정부에 한국 임시정부 청사를 내주면 남경을 폭격하겠다는 협박을 계속해왔던 것.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은 광화문(光華門)에서 북동쪽으로 한 마장쯤 떨어진 남기가(藍旗街)에서 지낸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 청년들은 중화문(中華門) 안쪽 동관두(東關頭) 32호에 살았다. 동관두는 중화문 동북쪽 성내에 있었다. 이곳은 부자묘(공자묘) 거리를 따라 흐르는 내진회하(內秦淮河) 바로 남쪽이었다. 내진회하 물길은 장강(양쯔강)으로 연결된다.
남기가는 동관두에 있던 김구 계열 임시정부 요인과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강소성 의흥(宜興)의 징광사(澄光寺)로 피했다가 돌아온 한국국민당 청년당원 및 지청천 계열이 합류했던 곳이다. 이곳 1호에는 조소앙, 지청천 등이 8호에는 이동녕, 엄항섭 등이 머물렀다. 낙양군관학교 한인 반 출신과 한국독립당 청년들도 남기가에 거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아파트 단지로 변한 난징 교부영4-16호 ⓒ 조종안
김원봉의 의열단과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청년들은 교부영(敎敷營) 16호에 모여 살았다. 당시 16호는 2층 높이의 단층 건물 두 채로 이뤄져 있었으며 아담한 정원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서 김원봉 계열은 남경성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호가화원(胡家花園)으로, 김구와 지청천을 따르던 청년들은 수서문(水西門) 쪽 모가원으로 나뉘어 간다.
호가화원 동쪽 끝이 명양가(鳴羊街)이고 북쪽 끝은 화로강(花露崗)이다. 약산과 민족혁명당 당원들은 호가화원 안에 있는 묘오율원(妙悟律院)과 이연선림(怡然禪林)이란 암자에 거주하였다. 약산이 머물던 호가화원에는 교부영에서 나온 한인 특별반 졸업생뿐 아니라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과 교관, 김규식 선생도 함께 살았으며 민족혁명당 본부도 그곳에 자리하였다.
애국 청년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곽낙원 여사
▲ 상해 임시정부 시절 김구 가족(출처: 임정 항주기념관) ⓒ 조종안
김구 어머니(곽낙원 여사)도 손자들과 마도가(馬道街)에 살았다. 곽낙원 여사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1924년 1월) 며느리가 병사하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듬해 손자를 데리고 귀국한다. 윤봉길 의사 의거(1932) 이후 김구는 가흥(자싱)으로 피신한다. 그러자 일제는 곽 여사에게 협박을 가하였고, 그 소식을 접한 김구는 어머니를 중국으로 불러들인다.
마도가는 동관두 거리와 지척에 있었다. 이곳에는 김구 가족 외에 여러 독립운동가 가족이 이산의 아픔을 달래며 살고 있었다. 이곳의 애국 청년들에게 곽 여사는 선배 독립 운동가이자 고향 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고령임에도 임시정부 살림을 책임지면서 군자금 확보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젊은이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것.
옛날 신문에 따르면 백범이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곽 여사는 삯바느질과 허드렛일로 아들 옥바라지를 하였다. 곽 여사는 어느 날 아들을 면회한 자리에서 "나는 네가 경기감사나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태연히 말했다.
백범이 난징에 머물 때였다. 청년 단원과 동지들이 돈을 모아 곽 여사 생일상을 준비했다. 정황을 눈치챈 곽 여사는 회계 담당에게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겠다며 생일상 차릴 비용을 한사코 돈으로 달라고 해서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날 곽 여사는 동지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보자기에 싼 단총(권총) 두 자루를 내놓으며 격려해줬다고 한다.
임시정부 어머니로 통했던 곽낙원 여사, 그는 1939년 4월 충칭에서 아들 김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시 나이 여든둘.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아들과 손자 뒷바라지를 걱정하며 생을 마감했다. 곽 여사의 생전 소망은 아들이 소원을 이루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아들의 소원은 '대한독립'이었다(곽 여사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약산과 백범, 서로 존재 인정하며 독립운동 이끌어
▲ 김구가 고물상으로 위장하고 살았던 회청교 ⓒ 조종안
자싱에 피신해 있으면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개설한 백범도 거처를 난징으로 옮긴다. 백범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자 고물상으로 위장하고, 회청교(淮淸橋)에서 뱃사공 주애보와 함께 생활했다. 매만가 76호(가흥), 재청별장(해염), 회청교 등 백범이 머물렀던 곳의 공통점은 물길과 연결되는 가옥이라는 것. 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이 1932년 가을 남경 외곽 황룡산 기슭에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년(1932~1935) 동안 존재하였다. 약산은 이곳에서 엘리트 군관을 양성하는 한편 김구를 만나 좌우합작을 논의하였다. 당시 약산이 머무르는 호가화원에서 김구 거주지인 회청교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소요됐으며, 그 중간 지점에 교부영 16호가 자리하였다.
약산과 백범은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물과 기름 모두 세상에 필요한 액체이듯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갔다. 저장성 자싱에 피신하고 있던 백범이 난징 외곽에 있는 조선혁명 간부학교(교장 김원봉)를 찾아 생도들에게 선물을 전하고 격려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 지난 8월 17일 군산 강의 때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백범은 1934년 4월 초순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 교육 중 난징을 찾아 생도들을 위로한다. 당시 백범은 약산의 소개를 받아 연설을 하는데, 조선 해방은 학생들이 최후의 분투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만년필 한 자루씩을 선물했다. 2기생 중에는 조선이 낳은 최고의 작곡가 정율성도 있었다."- 김종훈 기자의 <약산로드 7000km> 241~242쪽에서
두 사람은 1939년 5월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을 발표한다. 16쪽으로 된 발표문에는 '공개신(公開信)'이 만들어진 배경과 독립운동 과정에서의 반성, 방향, 그리고 미래에 대한 논의 등이 온전히 담겼다. 문장이 시작될 때마다 들어간 '兩人(우리 두 사람)'은 백범과 약산이 어떤 각오와 자세로 글 작성에 임했는지를 암시한다.
공개신 말미에 10개 항으로 된 강령도 덧붙였다. 강령은 조선민족의 자주독립 국가 건설, 민주 공화제 건립, 매국적 친일파 재산 몰수, 대기업의 국유화, 토지 농민에 분급, 노동시간 감소, 각종 사회보험사업 시행, 정치·경제·사회적 면에서 남녀평등 보장, 국민 언론·출판·집회·결사·신앙의 자유,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국비로 시행 등을 언급하고 있다.
백범과 약산의 공개신은 발표 3개월 뒤 개최된 7당 통일 회의에서 결렬된다.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에 속한 7개 정당 및 단체 대표들이 통일방안과 최고기구 문제를 놓고 의견만 대립했지, 결론은 내리지 못한 것. 하지만, 이 만남은 1940년대 초 대한민국임시정부 기치 아래 좌·우 양 진영이 하나로 모이는 자양분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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